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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43화 (143/257)

제143화

레이라 여왕과 단둘이 되자 밀턴이 말했다.

“너무 많이 받아들인 것 아닌가요?”

“무슨 말이에요. 피곤한데?”

레이라 여왕은 매일매일 전향한 귀족들을 상대한다고 피곤함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지금 항복하고 있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영주들을 말하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문제없어요.”

“걱정이 되어서 그러죠.”

밀턴은 은근히 레이라 여왕의 뒤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었다.

“걱정은 무슨…. 이러지 마요. 당신 체면이 있지.”

레이라 여왕은 밀턴이 자신의 어깨를 주물러 주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녀가 여왕이라고 해도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주물러 준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는 꽤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밀턴은 자신의 사랑스런 요물이 보기 드물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이 어깨를 더 정성껏 주무르며 말했다.

“뭐 어때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그래도 그렇…. 아….”

레이라 여왕은 사양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밀턴의 손길이 주는 시원함이 제법 좋았다.

그녀는 내심 포기한 것처럼 행동하며 밀턴의 마사지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뭐가 걱정이라는 거예요. 아…. 거기 살살 좀….”

“많이 뭉쳤네요. 걱정이야 되죠. 너무 많은 영주들이 우리한테 항복했어요. 그들의 영토를 다 합하면 거의 우리나라의 원래 영토만 하잖아요?”

“좀 많기는…. 아아…. 하죠.”

레이라 여왕은 녹아드는 것 같은 안락함을 느끼며 목소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그녀의 한숨을 들은 밀턴은 순간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너무 무방비해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요.”

“흐음…. 뭐가요?”

“그거야….”

순간 ‘당신이요.’라고 말할 뻔한 밀턴이었지만 가까스로 사고를 업무 모드로 돌리고 말했다.

“국경의 방비를 말하는 거죠. 지금 우리 병력으로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서부 지역을 지키기 어려울 거예요.”

레스터 왕국이 동부 쪽 국경의 방비를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스트라부스 왕국도 서부 지역의 방비에는 그리 공을 들이지 않았다.

이렇다 할 수비 거점도 없는 상황에서 이 넓은 서부가 전선이 된다면 밀턴은 이 지역을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항복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레스터 왕국군의 병력만 가지고 싸워야 했다.

이제는 수적인 우위도 공화국군에 있었고, 전선이 넓어지면 불리해지는 것은 이쪽이었다.

“으음…. 그래요. 거기….”

“이봐요. 여왕 전하, 사람 말에 대꾸를 해야죠?”

“아아…. 당신 손길이 너무 황홀해서 그래요.”

“…….”

“후훗. 알았어요. 장난 안 하고 대답해 줄게요.”

레이라 여왕은 한결 가벼워진 어깨를 돌리며 밀턴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적들은 전쟁을 못 해요.”

“어째서죠?”

“힐데스 공화국이 망하고 지크프리트가 공화국군의 통수권을 잡았다고 하더군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밀턴으로서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이제까지 지크프리트는 능력에 비해 직위가 낮아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 지크프리트가 공화국군의 총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실질적인 전쟁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밀턴으로서는 한층 더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라 여왕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지크프리트가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전쟁은 멈출 거예요.”

“그 말에 근거는 뭡니까?”

“우선은 당초의 목적을 이뤘기 때문이죠. 일단 이 전쟁은 대외적으로 공화국군이 이긴 전쟁이에요. 스트라부스 왕국을 무너트렸고 바우첸 국왕까지 사로잡았으니 말이죠.”

“그랬죠. 하지만 우리나라 때문에 힐데스 공화국 본토가 넘어갔지 않습니까? 거기다 점령지인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까지 우리가 먹었으니….”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활약이 너무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크프리트라면 여기서 전쟁을 멈추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적어도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을 되찾고 싶을 겁니다.”

“훗, 당신은 전쟁터에서의 지략에 비해서 정치적인 감각은 살짝 떨어지네요.”

레이라 여왕이 미소를 머금고 하는 말에 밀턴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거 미안하군요.”

자존심에 미세하게 금이 간 밀턴을 보고 레이라 여왕은 살며시 달라붙어서 사근사근하게 위로했다.

“후후후. 토라지지 마요. 당신이 못하는 걸 내가 잘 받쳐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거니까.”

“…….”

‘진짜 요물이라니까?’

그녀의 애교를 접하는 순간 정신 상태가 무장 해제 되었다.

이쯤 되면 거의 세뇌의 영역이 아닌가 싶었다.

“크흠…. 설명 계속해 주시겠어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목적을 달성한 시점에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애당초 옳지 않아요. 당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을 소진하기 때문이죠.”

“그건 그렇지만, 그런 말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일이잖아요. 우리가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을 날름 집어삼켰는데 과연 그걸 넘어갈까요?”

“물론 넘어가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하고 전쟁을 지속하면 그 전쟁이 어디까지 길어질지 짐작도 할 수 없어요.”

“놈이 우리를 그 정도로 경계할까요?”

“예.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을 경계하겠죠.”

“나를 말인가요?”

밀턴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자 레이라 여왕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도 지크프리트를 높게 평가한 모양인데. 제가 보기에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에요. 이번 전쟁에서 지크프리트의 계획을 몇 번이고 수정하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그거야 뭐….”

겸손하게 말하려고 하는 밀턴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엄연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후후후…. 사실 내가 이렇게 대범하게 서부 지역을 집어삼킬 수 있는 것도 당신 덕분이에요.”

“내 덕분이라고요?”

“예. 그래요.”

레이라 여왕은 아찔한 미소와 함께 밀턴의 어깨에 기대서 말했다.

“레스터 왕국군의 5만 병력은 큰 장애가 안 될지 몰라도, 그 5만 병력을 지휘하는 게 명장 밀턴 포레스트라면 적에게도 충분한 억제력이 된다, 라는 전제하에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그녀는 밀턴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내 사랑하는 밀턴.”

‘우와….’

순간 밀턴은 오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요물도 요물도 요물도….

진짜 이런 요물이 없다.

논리적인 팩트와 설득력을 곁들여서 자기 남자의 능력을 칭찬해주고 마지막에 사랑한다는 결정타를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날렸다.

“……”

‘참자. 참아야 한다.’

순간 밀턴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자신을 억눌렀다.

만약 여기가 야전의 막사가 아니었다면?

만약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약혼 상태를 넘어 부부인 상태였다면?

만약 레이라 여왕이 군주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귀족 여인이었다면?

이 조건 중에 하나라도 갖춰져 있었다면 밀턴은 절대 참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결혼만 해봐. 결혼만 하면….’

뭔가 잔뜩 벼르는 밀턴의 표정을 보고 레이라 여왕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놀릴 때가 제일 귀엽다니까?’

레이라 여왕은 밀턴의 뺨을 슬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며칠 안에 공화국에서 사신이 올 거예요.”

“정말인가요?”

“예. 이제 전쟁을 계속하기는 힘드니, 무사히 전쟁을 봉합하기 위해서 외교적인 교섭을 하겠죠. 겸사겸사 우리가 집어삼킨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도 탈환하고 싶을 테고 말이죠.”

“괜찮겠어요? 일단 명분상으로는 우리가 패전국이잖아요? 협상에 불리하지 않을까요?”

이 전쟁으로 인해서 레스터 왕국은 영토가 세 배 이상 넓어졌고 잠재적 위협인 힐데스 공하국도 없애 버렸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레스터 왕국은 패전국이다.

전쟁의 사후 처리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은 승자인 법.

레이라 여왕의 수완을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리한 조건에서 고전하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레이라 여왕은 밀턴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당신이 전쟁터에서 흘린 땀과 피를 헛되이 하지 않아요. 여기서부터는 나의 전장인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외교전은 모두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

‘확실히 이건 레이라가 잘하는… 아!’

밀턴은 생각하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레이라, 부탁이 있어요.”

“…그게 뭐죠?”

“외교를 한다면 지크프리트와 지척에서 만나겠죠?”

“그렇겠죠.”

“그 자리에 나를 합석시켜 주세요. 놈을 직접 보고 싶어요.”

“예. 그거야 어려울 것 없죠.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요.”

‘좋아.’

밀턴은 다행이라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크프리트를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 괴물의 능력치를 꼭 확인해 봐야겠어.’

적이 어떤 놈인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

레이라 여왕의 예상대로….

지크프리트는 사신을 보내서 레이라 여왕과 협상의 자리를 만들겠다고 시도를 했다.

양쪽은 최소한의 인원을 거느리고 중립 지대를 만들어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약속의 날.

야외에서 모두가 지켜볼 수 있는 넓은 장소에서 양쪽의 대표들이 만났다.

“처음 뵙는군요. 레이라 폰 레스터라고 합니다.”

레이라 여왕이 환하게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했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슈하이머라고 하오.”

“하노버슈 공화국의 페인하임이오.”

두 총통은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했다.

사실 왕국과 공화국이라는 사상적 입장 차이를 생각하면 외교의 장이라고 해도 풀어진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레이라 여왕의 미모를 보고 흔들리려는 마음을 똑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둘은 일부러 딱딱한 태도를 취했다.

양쪽의 톱들이 인사를 했으니 이제 그 밑의 인물들이 인사를 할 때이다.

아니, 밑에 인물이라고 해도 비중이 낮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만남이야말로 이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밀턴 포레스트다.”

“지크프리트다.”

존대는 없었다.

악수도 없었다.

둘의 표정에서도 외교의 장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날카로운 날이 서 있었다.

적어도 이 둘은 대외적으로는 결코 오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향해서 오만하고 딱딱한 태도를 고수했다.

마치 절대로 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

“…….”

밀턴 포레스트와 지크프리트가 공식 석상에서 만난 첫 만남.

훗날 역사에서는 이 장면을 두고 수도 없이 많은 연극과 노래가 생겨난다.

이 시대를 양분한 두 영웅의 첫 조우로서 말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군.”

밀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역시 말을 받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이야. 리트인크 성에서 한 번 볼까 싶었는데…. 자네 도망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

지크프리트의 말투에 같은 편인 두 총통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왜 이러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왜 여기서?’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지크프리트의 행동에 밀턴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내 기마술은 썩 괜찮은 편이지. 그런데 자네는 괜찮나?”

“뭐가 말이지?”

“아니, 내 부하의 보고로는 멀쩡하게 달리다 말에서 떨어지는 걸 봤다고 하더군.”

“…….”

밀턴은 트라이크가 지크프리트를 저격했을 때의 일을 꺼낸 것이다.

“내심 그러다 목이라도 부러지지 그랬나? 그랬다면 애도의 꽃 한 송이는 보냈을 텐데 말이야.”

가시가 가득한 밀턴의 말을 들으면서 레이라 여왕도 생각했다.

‘평소와 달라. 생각보다 더 날카로운데?’

공식 회담 자리에서 칼부림을 할 정도로 성질이 급한 인간은 이 자리에 없다.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레이라 여왕은 바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계속 서 있으려니 연약한 여자인 저로서는 다리가 아프네요. 이제 문명인답게 앉아서 얘기할까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일단 준비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밀턴은 자리에 앉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지크프리트를 바라봤다.

‘이제 확인 한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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