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사실 바우첸 국왕이 직접 항복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우첸 국왕의 신병이 공화국의 안에 있는 이상 포로가 된 국왕의 공식 성명 따위는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으니 말이다.
“국왕이 정식 항복을 했다는 말은, 이 전쟁이 우리 쪽의 패배로 끝났다는 말이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밀턴은 씁쓸하게 말했다.
이 전쟁을 최초에 참전할 때만 해도 패배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저력을 믿었고, 또 주변국들도 머리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를 보라.
저력을 믿었던 스트라부스 왕국은 마스터 중에 한 명이던 오브라이언 공작의 배신으로 인해서 무너졌다.
주변국들은 애당초 적극적인 협조를 하지 않았다.
밀턴은 최대한의 성과를 올렸지만 역시 지크프리트는 만만치 않았다.
그런저런 결과가 합쳐져서 나온 것이 지금의 결과다.
패배.
전쟁의 주체가 된 스트라부스 왕국이 항복을 한 시점에서 이번 전쟁은 패전이다.
밀턴이 독자적으로 군을 끌고 전쟁을 수행할 수는 있겠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이 완전 항복을 한 이상 그건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비안의 계책으로 힐데스 공화국을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힐데스 공화국의 수도를 함락하고 영토의 80퍼센트 가량을 점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비록 전쟁은 패배했지만 이로써 레스터 왕국이 얻은 것은 크다.
우선 영토가 한 배 반은 넘게 늘어났다.
힐데스 공화국의 영토는 대부분이 산간 지방이라 농토로서의 의미는 없지만 그 대신 철광석이 국가의 주요 생산품이었을 정도로 광맥이 풍부한 땅이다.
거기다 북부의 불안 요소를 완전히 없애 버렸기 때문에 전선의 부담도 제법 없어졌다.
만약 힐데스 공화국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면 레스터 왕국의 처지는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북쪽에서 힐데스 공화국의 위협을 맞서면서 동쪽의 전선에서도 압박이 들어왔다면 군비를 지금의 두 배 이상으로 늘려도 무리였다.
‘전쟁이 끝나면 릭과 토미에게 큰 상을 줘야겠군.’
이 모든 것이 세비안 자작이 반쯤 가설에 가까운 개념으로 내놓은 작전을 릭과 토미가 훌륭하게 성공시켜 준 덕분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그 둘일지도 몰랐다.
밀턴이 그렇게 마음속으로 이 전쟁의 결과를 정리하고 있을 때.
“포레스트 후작. 지금부터의 계획은요?”
“우선은 동부에 머물면서 국경 지대를 안정화시킬까 합니다. 그동안 동쪽은 우방 국가인 스트라부스 왕국과 마주하고 있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성벽의 개보수부터 할 일이 많겠죠.”
밀턴의 말에 레이라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벌써 마무리를 할 생각인가요?”
“설마? 여기서 더 할 생각입니까?”
“당연하죠.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우리가 얻은 건 고작해야 북부의 힐데스 공화국 하나뿐이잖아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밀턴의 물음에 레이라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걸로 간신히, 라고 해야겠죠.”
순간 밀턴은 레이라 여왕의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을 공략할 생각입니까?”
“예. 맞아요.”
“무모합니다. 당장 스트라부스 왕국이 항복을 했으니 점령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영토도 너무 넓고, 무엇보다 공화국이 공격을 해 오면 막을 수도 없을 겁니다.”
밀턴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레이라 여왕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정식으로 전쟁을 해서 영토를 탈취했을 때의 일이죠.”
“그 말씀은…. 전쟁을 거치지 않고 영토를 빼앗는다는 말입니까?”
“맞아요.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거든요.”
레이라 여왕은 아찔한 미소를 지었고, 밀턴은 그 미소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런 이런, 내 사랑스런 요물이 또 뭘 하려는 걸까?’
레이라 여왕.
현재 그녀는 지력 94에 정치 95라는 수치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지략이라고 해도 전쟁의 책략에 치중을 하고 있는 세비안 자작과 달리 레이라 여왕은 내정에 특화된 지략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자신감 있게 나섰다는 것은 서부 공략의 핵심이 전투가 아니라 지략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열 받을 것이라는 것 말이다.
“뭘 하실 생각입니까?”
“훗, 지금 즉시 발이 빠른 기마를 모아 주세요.”
그리고 레이라 여왕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차지하겠어요.”
테이라 백작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봉토 귀족이다.
그는 최근 하루하루를 술에 의지해서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그는 지금 나라를 잃었고, 얼마 있지 않아서는 가문과 작위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수도가 함락 당하고 국왕이 항복을 했다.
그 시점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은 공식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물론 몇몇 귀족들은 그것에 납득하지 않고 의용군을 일으켜서 맞서 싸웠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공화국군은 항복을 했음에도 맞서는 귀족들은 본인과 그 가족까지 전원 처형하겠다고 공표했다.
그 대신 순순히 항복을 하면 목숨을 구해주고 어느 정도의 사유 재산을 인정해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귀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작위는 박탈당할 것이다.
당연히 귀족이 아닌 이상 영지도 몰수당할 테고 말이다.
작위와 영지.
이것은 귀족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아니 해석에 따라서는 생명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조상 대대로 이어온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걸 눈 뜨고 빼앗기게 생겼으니 어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는가?
“제길, 명예도 모르는 공화국에 있어야 하다니? 차라리 재산을 챙겨서 외국으로 날라 버릴까?”
하루에도 몇 번씩 한 말이지만 테이라 백작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후우…. 무리지. 무리야. 토지의 매각이 불가능한 시점에서 챙길 수 있는 재산이라고 해봐야 100분의 1도 안 되는데….”
영지와 영지민, 그리고 직속 상단까지.
귀족의 재산이라는 것은 그렇게 금방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각을 하고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와서는 그럴 시간도 여건도 안 되니 이대로 도주한다면 챙길 수 있는 재산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럴 바에는 일단 공화국에 항복해서 최대한 많은 재산을 정식으로 인정받는 것이 낫다.
그런 계산을 다 마친 후였기 때문에 테이라 백작은 하루하루 술만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백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테이라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 있고 싶으니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는데 집사가 굳이 연락을 했다.
“누구냐?”
어쩌면 드디어 공화국에서 사람을 보내서 정식으로 정리 작업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테이라 백작에게 집사가 한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레스터 왕국의 레이라 여왕님께서 보내신 사신입니다.”
“…뭐라고?”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았다.
레스터 왕국.
예전이라면 서쪽 끝에 있는 약소국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공화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해상 무역으로 커다란 부를 축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턴 포레스트라는 전쟁 영웅이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 최근 레스터 왕국은 대륙에서도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런 레스터 왕국의 군주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사신을 보내다니?
“지금 즉시 만나겠다. 로비, 아니 서재로 안내하라. 그리고 주변에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지시하라.”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테이라 백작은 한 명의 기사를 만났다.
“레스터 왕국의 중앙 기사단 소속인 셰인 보나트라고 합니다.”
“음, 필리어스 테이라… 백작이오.”
뒤에 작위를 붙일 때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붙였다.
그는 아직까지는 백작이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레이라 여왕님의 사신이라고 들었소. 나를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오?”
“저는 친서를 전달할 뿐입니다. 그리고 대답을 받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기사는 테이라 백작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테이라 백작은 즉시 봉인을 찢고 안에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내용을 읽으면서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바뀌어 갔다.
그리고 편지를 다 읽은 후에 그는 기사에게 말했다.
“답은 언제까지 해 주어야 하오?”
“여왕 전하의 명령대로는 답변은 즉시 받아 오라고 했습니다.”
“즉시?”
“예. 시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도 그렇군.”
테이라 백작은 한숨을 내쉬고 서재의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결심을 굳혔다.
“내 대답은….”
며칠 후.
“신 필리어스 테이라, 레스터 왕국의 유일 군주이신 레이라 폰 레스터 여왕 전하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테이라 백작은 레이라 여왕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레이라 여왕은 그의 어깨를 검으로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레스터 왕국의 군주, 레이라 폰 레스터의 이름으로 필리어스 테이라 백작을 본국의 귀족으로 인정하노라. 또한 그의 영지는 그대로 그의 다스림 안에서 존속하게 될 것이다.”
“영광이옵니다. 전하.”
테이라 백작은 군주를 대하는 신하의 예를 표했다.
그는 지금부터 레스터 왕국의 귀족, 테이라 백작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이들이 다가와서 축하를 해 주었다.
“역시 테이라 백작님도 결심을 굳히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테이라 백자님.”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는 이들을 보고 테이라 백작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자네들은 나보다 더 빨랐군.”
“하하하…. 그만큼 가까웠기 때문이죠.”
“시기는 모두 비슷비슷했을 겁니다.”
테이라 백작과 대화를 하는 이들은 모두 전 스트라부스 왕국의 귀족들이다.
그중에서도 서부 지역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봉토 귀족들 말이다.
그들 전원이 앞다투어 레이라 여왕에게 항복을 해 버렸다.
그리고 레이라 여왕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영지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항복한 귀족의 수가 벌써 마흔이 넘어갔다.
이만큼의 귀족들이 한꺼번에 항복을 하면 그들에게 줄 은상만 해도 보통이 아닐 테지만….
이번에는 얘기가 달랐다.
레이라 여왕이 그들에게 항복을 권하면서 제시한 조건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 작위의 존속.
둘, 영지의 권리 인정.
이게 다였다.
뭔가를 새롭게 내려준 것이 아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해 주겠다, 라는 수수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제시를 받은 귀족들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갈 만큼 반가운 제의였다.
공화국에 항복한다면 절대 바랄 수 없는 두 가지를 레이라 여왕이 제시했기 때문이다.
신분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공화국에 항복하면서 작위와 영지를 인정받을 방법은 없다.
무슨 로비를 해도 안 된다.
애당초 국가의 기조(基調)가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레이라 여왕은 단 1골드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크프리트가 수도를 공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런 미래를 예상하고 달려온 것이다.
스트라부스 왕국 멸망.
공화 정치 도입.
귀족들의 반발.
거기에 손길을 내밀면 어떻게 될까?
그런 가설을 머릿속에 세우자 도저히 엉덩이를 왕좌에 붙이고 있을 수 없었다.
밀턴에게 전령을 보내서 일을 진행시킬 수도 있었지만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실제 구 스트라부스 왕국의 귀족들이 마음으로 항복한 것은 전선까지 나와 있는 레이라 여왕이 그들 하나하나의 충성 맹세를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적절한 시기를 노린 신의 한 수, 아니 요물의 묘수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손을 쓸 틈도 없었던 것이 이때 지크프리트는 다른 두 공화국의 총통을 설득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화국 안에서 자기 지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절대적인 우선순위였기 때문에 동부 전선에서 레이라 여왕이 수완을 발휘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레이라 여왕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를 온전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갔고,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밀턴은 혀를 내둘렀다.
‘와아…. 저게 되네. 돼.’
원래 네 거지만 계속 네 거라고 인정해 줄게.
대신 너는 나한테 영원히 충성을 맹세해야 돼.
밀턴이 옆에서 보고 있는 상황은 이거였다.
그런데 이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충성을 맹세하는 귀족들은 진심으로 큰 감격을 느끼는 듯했다.
‘내 여자지만 점점 요물화를 더해 가는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