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바하슈텐 총통에게 헌화를 마치고 슈하이머 총통이 지크프리트에게 말해다.
“앞으로 힐데스 공화국은 어쩔 생각인가?”
바하슈텐 총통의 사망한 지금 힐데스 공화국의 최고 책임자는 지크프리트다.
사실, 직위로 따지면 공화국에는 총통 밑에 세 명의 대장이 있다.
하지만 힐데스 공화국의 세 대장은 모두 고령으로 이번 원정에 따라오지 못했다.
수도에 남겨두고 온 그들은 이미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고 그 밖에 책임자들도 소재가 불분명하다.
실질적으로 지금 힐데스 공화국에 대한 전권은 지크프리트에게 있는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슈하이머 총통은 지크프리트에게 의사를 물었다.
거기에 지크프리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나라를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허…. 3국 동맹을 사실상 주도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자네 아닌가? 어째서 그리 약한 말을 하나?”
슈하이머 총통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총통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뒤에서 받쳐 주시고 앞에서 이끌어 주시던…. 실로 제 아버지 같은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비통한 지크프리트의 말에는 분노가 절절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런 분이 돌아가셨는데 제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는 지크프리트에게 페인하임 총통이 말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건가? 지금 힐데스 공화국군 전원이 자네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어. 그런데 이렇게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다니. 자네 설마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건가?”
페인하임 총통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군은 제 차석 지휘관에게 맡길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자네 설마?”
“그저 한 명의 국민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슈하이머 총통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기서 자네가 없어지면 힐데스 공화국은 어쩌라고?”
“…….”
“차석 지휘관에게 맡긴다? 자네의 차석 지휘관이 누구인가? 자네를 대신할 만큼 유능하기는 한가?”
“데이비드라고 하는 친구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본군의….”
“데이비드? 설마 그 무능한 밥벌레?”
데이비드가 본군에 머무는 동안 열심히 어필한 무능함은 슈하이머 총통의 귀에도 들어왔다.
공화국 참모진에 무능한 밥벌레 하나가 있는데 도무지 쓸데가 없다고 말이다.
지크프리트가 은퇴하고 그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둔재라니?
이건 공화국 전체의 손실이다.
지금 공화국은 몹시 중요한 상황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을 쓰러트리기는 했지만 아직 점령지 전체를 안정화시킨 것은 아니다.
점령지를 안정화 시키고 힐데스 공하국의 본국도 정리해야 하고, 공화국의 연합도 새롭게 정비해야 하고….
어쨌든 할 일이 태산이다.
무엇보다 슈하이머 총통은 지크프리트가 탐이 났다.
힐데스 공화국이 멀쩡할 때는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지금 힐데스 공화국은 사실상 와해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지크프리트 역시 자유로운 야인에 가까운 신분.
그가 코브르크 공화국으로 와 준다면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어도 아깝지 않을 듯했다.
‘절대 놓쳐선 안 된다.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절대.’
결론을 내린 슈하이머 총통이 근엄한 목소리로 지크프리트에게 말했다.
“자네의 슬픔은 알겠네. 바하슈텐 총통을 아버지처럼 여겼다고 하니 실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고 아픔이겠지.”
“…….”
지크프리트는 침묵했지만 슈하이머 총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몰아붙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자네 정도의 남자가 여기서 주저앉는단 말인가? 그게 정말 바하슈텐 총통이 바라는 바인가?”
“총통 각하의 뜻에 관해서 함부로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분에 관해서 무엇을 아신단 말입니까?”
지크프리트가 역정을 내자 슈하이머 총통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모르지. 개인적인 친분이 없으니 내가 바하슈텐 총통에 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네.”
“그게 뭡니까?”
“자네가 바하슈텐 총통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한 만큼, 바하슈텐 총통 역시 그대를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일세.”
“…….”
그 말에 지크프리트는 크게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슈하이머 총통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어떤 부모도 자신의 죽음 후에 자식이 좌절하고 주저앉기를 바라지는 않네. 자네가 알고 있는 바하슈텐 총통은 그렇지 않았던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을 떠나는 법. 그것은 늦던 이르던 모두 마찬가지네. 부모가 자식에게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가르침은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법이지.”
“…….”
“자네가 이렇게 주저앉아서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것이 바하슈텐 총통이 바라던 바인가? 자네 그릇은 고작 그 정도인가? 대답해 보게.”
“…저는…. 저는….”
갈등이 가득한 표정으로 망설이는 지크프리트를 보고 슈하이머 총통은 거의 다 됐다고 느꼈다.
이만큼 몰아붙였으면 이제는 살짝 풀어줘서 스스로 움직이게 해야 했다.
“하루 정도 시간을 주겠네. 그때 자네의 심경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주게.”
그리고 슈하이머 총통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다.
그리고 페인하임 총통은 떠나면서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두드리고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나?”
페인하임 총통마저 나가고 지크프리트는 혼자 남았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쉽군.”
***
바하슈텐 총통의 죽음이 공표되는 것과 동시에 또 한 가지 공표된 사실이 있었다.
힐데스 공화국이 깃발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본토가 3분의 2 이상 함락당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냥 무작정 깃발을 내린 것은 아니다.
힐데스 공화국은 코브르크 공화국과 하노버슈 공화국에 자발적인 합병이 되었다.
나라는 다르지만 사상이 같은 형제 국가에 편입되어 낙원을 건설하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투쟁하자.
라는 명분으로 합병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진행한 것이 바로 지크프리트였다.
바하슈텐 총통 사망 후에 힐데스 공화국의 고위층 인사가 거의 전멸한 상황에서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힐데스 공화국의 마지막 지도층으로서 나라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그리고 지크프리트 본인은 공화국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공화국군 총사령관.
이 전쟁이 진행되는 한은 지크프리트가 공화국의 모든 군사들에 대한 명령권을 가진다는 말이다.
사실, 이 공화국의 3국 연합이 결성되는 순간 이미 지크프리트가 참모로서 하던 역할이다.
다만, 그것을 공식적인 직함으로 만들어서 권위와 명분을 더 선명하게 만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애매한 것은 지크프리트가 공화국의 소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공화국은 연합을 결성하고 있지만 이것은 영구적인 국가 합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강적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공화국 3국이 힘을 합쳤을 뿐이다.
그런데, 힐데스 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했지만 레스터 왕국의 역습을 받고 쓰러졌다.
3국 연합은 자연스럽게 2국 연합이 되었고 지크프리트는 남은 힐데스 공화국의 전력을 추스르며 공화국군 총 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과연 소속은?
하노버슈도 아니고 코브르크도 아니고 그저 공화국군 총사령관이다.
이것은 지크프리트의 입지를 굉장히 미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공화국군 총사령관은 실질적으로 공화국군 전체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통수권이 언제까지 유지되는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공화국간의 연합이 끝나는 순간 소멸하는지? 아니면 그 후에도 계속되는지?
아무것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지크프리트가 공화국의 모든 군사력을 한 손에 거머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두 총통은 지크프리트를 이렇게 애매한 위치에 올려둘 생각이 없었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슈하이머 총통은 지크프리트를 자국으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옆에서 페인하임 총통 역시 같은 제의를 했다.
슈하이머 총통은 자신의 바로 직속 보좌관을 제시했고 페인하임 총통은 하노버슈 공화국의 대장직을 제시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둘 다 사양했다.
힐데스 공화국이 깃발을 내리고 모두가 힘든 이때 자기 혼자 국가를 바꾸고 요직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국가 중에 하나만 택했을 때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명분도 더해져서 지크프리트는 일종의 중립 같은 위치에서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사실 너무 많은 권력을 쥐어준 것은 두 총통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지크프리트와 차분하게 교섭을 해서 권한을 적절하게 제어할 시간도 없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멸망한 지금 남부에 있는 다른 나라, 특히 앤드루스 제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다.
한시라도 빠르게 이 전쟁의 사후 처리를 서둘러야 했고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지크프리트뿐이었다.
열흘.
두 총통이 지크프리트와 면담을 가지고 딱 열흘 만에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지크프리트는 가장 편리한 위치를 고수하며 공화국의 전군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선적으로 점령지를 안정시켜야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지크프리트가 이제 본격적으로 스트라부스 왕국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그때.
“급보입니다.”
전령이 다급한 표정을 하고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서… 서쪽의 영지들이 앞을 다퉈서 레스터 왕국으로 항복을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지크프리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세하게 보고하라?”
“예. 그게….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 영주들이 레스터 왕국에게 항복을 하고, 레스터 왕국에서는 이미 해당 영지를 자국의 영토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차려놓은 밥상에 난입을 하다니?’
지크프리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고, 모든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레스터 왕국에서 마지막까지 거슬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밀턴 포레스트…. 또 네놈의 짓이냐?”
드물지만 지크프리트의 예상은 빗나갔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의 영주들이 앞다퉈서 항복하고 있는 것은 밀턴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밀턴이 아니라 레이라 여왕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다는 정보를 들은 그 순간.
레이라 여왕은 바로 움직였다.
감이 탁 하고 왔다.
지금이 바로 움직여야 할 때라고 말이다.
그녀는 바로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직접 움직였다.
그때 그녀가 대동한 병력은 고작 기사 50인이 전부였다.
아무리 원정으로 인해서 병력이 없다고 해도 일국의 여왕이 고작 50인을 대동하고 움직이다니?
적어도 너무 적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속도라는 것을 알았다.
‘지크프리트가 공화국을 추스르고 태세를 바로 잡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레이라 공주는 마차가 아니라 자신도 말을 타고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그녀는 동쪽의 국경 지대에서 밀턴과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여왕님, 어째서 여기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보고 밀턴이 오히려 놀랐다.
그리고 그녀가 밀턴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은….
“물 좀 줘요.”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는 밀턴에게 물을 요구했고 밀턴은 직접 자기 수통을 주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그대로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일국의 여왕치고는 우아함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계속 달려서일까?
그녀는 상당히 지쳐 있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는 왜?’
레이라 여왕은 물을 다 마신 후에 호흡을 정돈하고 밀턴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약혼녀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여기는 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그것뿐이에요?”
“어? 아니 그건 너무 뜻밖이라….”
“됐어요. 일단 급하니까 나중으로 미뤄 둘게요.”
‘미루는 건가?’
밀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이라 여왕은 바로 말을 이었다.
“현재 상황은요?”
“스트라부스 왕국이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역시….”
급하게 오느라고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었지만 지금 상황은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간 것이었다.
“바우첸 국왕이 항복 성명을 냈나요?”
“예. 수도가 함락 당하고 다른 왕족까지 모두 포로로 잡혔으니 어쩔 수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