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두 눈을 부릅뜬 바하슈텐 총통을 보며 지크프리트가 말을 이었다.
“본국의 상황을 전하면 당신은 불안해서라도 스트라부스 수도 공략에 동참하지 않았을 테죠. 그러니 제가 수를 썼습니다.”
“지…. 지크프리트,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는 거냐? 네놈…. 네놈 설마?”
바하슈텐 총통의 얼굴에 불신과 공포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자신과 지크프리트,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직속 병력인 고스트뿐이다.
전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지크프리트가 자연스럽게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바하슈텐 총통은 자각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뱀의 아가리에 들어와 있음을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프리트는 계속 바하슈텐 총통에게 말을 했다.
마치 이게 마지막 보고라는 식으로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본국은 살릴 수 없습니다. 애당초 우리가 레스터 왕국을 공격한다고 해도 페일런 공작은 군을 물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 대신 레이라 여왕이 백성들을 고무시켜 우리 군을 막았겠죠. 그 틈에 후방에서 밀턴 포레스트가 우리 군을 공격하면, 레스터 왕국에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전황을 뒤집는 것은 무리죠.”
“…·그런 말. 나에게는 하지 않았지 않나? 어째서 정직하게 보고하지 않았나?”
“왜냐하면 이런 보고를 정직하게 했다면 당신은 현실을 부정하고 어떻게든 본국을 살려내라는 억지나 쓰며 내 발목을 잡을 병신 이하의 개새끼이기 때문입니다.”
“…….”
평소와 같이 담담하고 사무적인 말투.
하지만 그 내용은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가 깃들어 있었다.
바하슈텐 총통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능력에 비해서 욕심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일인자로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 지크프리트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저 관계의 청산을 넘어서 자신을 배신하겠다는 의도라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쓸 만한 사냥개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 사냥개가 자기 생각 이상으로 유능하고 똑똑하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한 번도 자신이 사냥개에게 물릴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었다.
“내…가 없으면 자네 혼자서 뒷감당이 가능할 성싶은가?”
주변을 둘러봐도 자기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황.
바하슈텐 총통은 최대한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은 말을 골랐다.
힐데스 공화국의 총통인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함으로써 자신을 죽이면 곤란할 것이라는 것을 주지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뜸을 들이던 지크프리트는 바하슈텐 총통에게 말했다.
“당신이 여기서 없어진다는 것은 꽤 유감스러운 일이죠. 원래는 당신이 그렇게 소원하던 통일 공화국의 탄생 까지는 당신을 전면에 내세우고 움직이려고 했는데 말이죠.”
지크프리트로서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틀어진 것은 계산 이외였다.
언젠가는 바하슈텐 총통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초의 계획대로라면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뒤의 일이어야 했다.
벌써 바하슈텐 총통을 버린다는 것은 지크프리트의 계획이 크게 틀어졌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밀턴 포레스트 때문이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설마 듣도 보도 못한 변방의 소국 출신의 귀족 한 명이 자신의 계획에 이렇게 발목을 잡고 늘어질 줄은 몰랐다.
사소한 걸림돌이라고 취급했던 존재는 이제 결코 사소하다 말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되었고, 지크프리트는 계획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상념에 잠긴 표정을 보고 바하슈텐 총통은 혹시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생각을 돌리게. 최근 우리 사이에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해서는 안 될 일이야. 공화국의 미래를 생각하게. 우리 둘이 모두 필요해.”
바하슈텐 총통의 열변은 상념에 잠겨 있던 지크프리트의 정신을 현실로 돌렸다.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지크프리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 순간 고스트 대원들이 바하슈텐 총통을 좌우에서 잡았다.
“무… 무슨 짓이냐? 지크프리트! 다시 생각하게. 내 죽음을 그리 쉽게 은폐할 수 있을 성싶은가? 내 부재가 밝혀지면 자네의 지위도 위험해!”
바하슈텐 총통의 열변에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으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통 각하.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준비라니? 그게 무슨….”
“죽을 사람을 앞에 두고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는 건 싸구려 악역이나 하는 일이죠. 그래도 짧게 말하자면….”
지크프리트는 품 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며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유능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라는 것을 말이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그만 죽어라.
라는 지크프리트의 말에 바하슈텐 총통의 눈이 뒤집혔다.
“지크프리트 네 이놈!! 크윽….”
발광하려던 바하슈텐 총통은 고스트의 완력에 강제로 제압당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대전의 한쪽에서 와인병과 잔을 가져왔다.
그리고 한 잔에는 와인을 따르고 다른 한 잔에는 와인과 함께 미리 준비한 독을 탔다.
그리고 자신이 한 잔을 들고 다른 한 잔은 근처에 있는 고스트 대원에게 맡겼다.
“그래도 그간의 정리를 생각해서 고통 없는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이놈… 우읍.”
바하슈텐 총통은 반항하려고 했지만 고스트 대원들은 강제로 그의 입을 열었다.
그리고….
“건배, 당신의 죽음을 위해서….”
지크프리트의 건배사에 맞춰서 고스트들이 총통에게 와인을 강제로 먹였다.
“우웁! 우우웁!”
총통은 어떻게든 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고스트들은 총통의 코를 막고 강제로 입에 와인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와인이 입에 들어가기 무섭게 바하슈텐 총통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커억…. 크…. 크르르륵….”
피가래가 끓는 소리와 함께 바하슈텐 총통은 빠르게 숨을 거뒀다.
그리고 총통이 죽은 것을 확인하자 지크프리트는 자기 와인 잔을 다 비우고 크게 외쳤다.
“군의관! 총통 각하가 위급하시다! 군의관!!”
지크프리트의 고함을 듣고 다른 공화국의 군인들이 들어왔을 때 보인 것은 쓰러진 바하슈텐 총통을 끌어안고 비통하게 소리치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이었다.
***
거목이 쓰러졌다.
그것도 군사력만 놓고 보면 대륙의 2위라고 평가 받던 그 스트라부스 왕국이 말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도 함락.
이 충격적인 사태는 대륙을 강타했다.
단순히 수도만 함락 당한 것이 아니라 스트라부스 왕국의 국왕과 왕족들까지 모두 사로잡혀 버렸다.
사실 이 시점에서 아직 스트라부스 왕국에는 저항할 여력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국왕을 잡았다는 것이다.
왕국은 국왕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나라다.
왕이 국가의 정점이자 상징이며 실지배자이기도 했다.
지크프리트는 바우첸 국왕에게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을 받고 유폐시켜 버렸다.
국왕이 항복을 결정한 순간 왕국은 더 이상 싸울 명분이 사라졌다.
그 강성하던 스트라부스 왕국이 국왕 한 명의 사인 하나로 저항의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공화국에게 항복할 수 없다며 저항 의지를 불태우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분전으로 흐름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국왕이 항복을 한 이상 스트라부스 왕국은 명분을 잃었고, 명분을 잃은 나라가 하나로 뭉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이것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 후에 힐데스 공화국의 움직임이었다.
수도를 점거한 후에 서둘러서 주변 영지를 점령한 것까지는 빠르게 움직였지만 그 후에는 점령한 템플리체에 틀어박혀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그 행동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지만 얼마 후에 한 가지 정보가 세상에 풀려 나왔다.
힐데스 공화국의 바하슈텐 총통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템플리체를 점령한 직후 공화국에 앙심을 품은 왕궁의 시종이 총통에게 독을 써서 암살을 했다.
라는 것이 공식적인 정보였다.
이 정보가 공개되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동맹국인 두 공화국이었다.
페인하임 총통과 슈하이머 총통은 만사를 제치고 템플리체로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지크프리트를 찾았다.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서 지크프리트를 찾아간 그들이 본 것은….
“허어…. 저럴 수가?”
“으음….”
하얀 꽃으로 장식된 바하슈텐 총통의 관 앞에서 수척해져 있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이었다.
옷은 아직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피가 묻어 있고, 양 뺨은 홀쭉하게 들어갔고 머리는 아무런 손질도 하지 않아서 흐트러져 있었다.
항상 깔끔하게 차려 입고 흐트러짐이 없었던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기억하는 두 총통은 크게 놀랐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는 것인가?”
슈하이머 총통이 안내한 군인에게 물었다.
“그게…. 사흘 전에 주변 영지를 복속시킨 후 쭉 저 상태이십니다. 음식은 고사하고 물도 드시지 않고 계셔서….”
“허어….”
슈하이머 총통은 크게 탄식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크프리트는 공화국의 미래를 맡길 정도로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공화국 3국을 적절하게 조율해서 동맹을 맺고 스트라부스 왕국을 마침내 멸망까지 몰고 간 그 능력은 경이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슈하이머 총통은 종종 생각했다.
뭐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크프리트의 행동을 볼 때 섬뜩한 느낌을 들었다.
예의에 어긋남이 없고 언행에 사상을 의심할 여지도 없었지만 뭔지 모를 꺼림칙함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을 보니 그간 자신이 지크프리트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하슈텐 총통의 죽음에 저렇게 애통해 하는 지크프리트의 행동을 보고 처음으로 인간미를 느낀 것이다.
‘바하슈텐 총통을 향한 충성심이 진짜였구나.’
슈하이머 총통이 은은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 지크프리트가 그 둘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양 상태가 심각한지 일어나는 과정에서 한 번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지크프리트는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슈하이머 총통 각하와 페인하임 총통 각하를 뵙습니다.”
“으음…. 수고가 많네.”
“자네의 공적은 들었네. 용케도 수도 공략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해냈군.”
페인하임 총통의 공치사에 지크프리트는 씁쓸하게 말했다.
“병사들의 공이 컸을 뿐입니다.”
일국의 수도를 하루 만에 공략한 공적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지크프리트는 그저 만사가 허무하다는 듯이 말했다.
‘허어…. 이 친구 마음이 떴군.’
슈하이머 총통은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깝게 혀를 찼다.
그리고 하얀 꽃으로 장식된 관을 보고 말했다.
“변고를 들었네. 바하슈텐 총통이 여기에 계신 건가?”
“예. 그렇습니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는가?”
관을 열라는 말에 지크프리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관이 열리고 안색이 보랏빛으로 변한 바하슈텐 총통의 모습이 드러났다.
“독살이었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제가 미처 막지 못하여….”
지크프리트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주먹을 꽉 쥐고 온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주군을 잃고 비통해 하는 충신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내 지크프리트는 분노를 진정시키며 두 총통에게 말했다.
“헌화(獻花)를 하시겠습니까?”
“물론이네.”
“당연히 그래야지.”
두 총통은 손에 꽂을 쥐고 직접 바하슈텐 총통의 관에 바치며 애도를 표했다.
지금의 공화국군은 3국 동맹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힐데스 공화국은 가장 큰 활약을 하고도 가장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본국의 수도가 함락 당했고 총통은 독살 당했다.
힐데스 공화국의 내일을 이끌어갈 인재라고 평가 받던 지크프리트 역시 지금은 상심이 큰 듯 보였다.
이때 두 총통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이제 경쟁자는 하나뿐.’
절묘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던 3국 동맹에서 실질적으로 하나가 무너지자 동맹 전체의 밸런스도 무너져 버렸다.
양국의 총통은 바하슈텐 총통의 시신 앞에서 꽃을 바치며 이미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