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전쟁터에서 아군의 전략을 채택하는 거야 좋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전략이 거둔 성과를 도둑질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도 그대 역시 일단은 우리와 같은 참모진의 일원이 아니오? 그런데 할 말이 하나도 없소?”
질책이 섞인 상대의 말에 데이비드가 몹시 비굴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부족하여….”
“도대체 여기는 왜 있는 거요?”
“그게… 일단 총통 각하께서 일단 저를 연락책으로 임명하시어… 그, 죄송합니다.”
횡설수설하며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비굴함과 무능함의 표본 같아 보였다.
“쯧, 그럴 거면 전쟁에 참모로서 참전하지 말고 차라리 창을 들고 병사로 종군하시오. 그 편이 도움이 되겠군.”
“죄송합니다. 제발 그것만은….”
“에잉….”
못마땅하다는 듯이 데이비드를 갈구던 참모에게 다른 참모가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그래도 방해가 되고 있는 건 아니지 않소?”
“흥, 그냥 보릿자루를 가져다 놓은 거랑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참모는 더 이상 데이비드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무능하고 비굴한 소인배 따위와는 상종하기도 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좌중을 향해서 자기 생각을 말했다.
“아마도, 적은 우리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소.”
“공격을 기다린다?”
“그렇소. 상대인 밀턴 포레스트는 비록 적이지만 지략이 뛰어나오. 그런 남자가 아무 의미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을 리가 없소. 아마 우리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며 그때를 대비해서 함정을 준비해 놨을 가능성이 크오.”
“흐음…. 일리는 있군요.”
“얕볼 적은 아니니 말이오.”
다른 참모들이 동의한다는 듯이 말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이건 인내심 싸움이오. 조바심을 내서 먼저 움직이면 크게 불리하오.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빈틈없는 포진으로 적을 기다립시다. 그럼 반드시 적은 공격해 올 것이오.”
“맞는 말이군.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지.”
“좋은 생각이오.”
참모진들이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고 데이비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군량이 아니라 숨 쉬는 산소도 아까운 병신 새끼들이군.’
양군이 대치하고 이틀이 지났을 때.
공화국군에 한 가지 비보가 날아들었다.
“뭐라고 북쪽에 있는 진형으로 1만의 병력이 날뛰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적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도저히 막아내기 힘들다고 합니다.”
전령의 보고에 참모진은 경악했다.
밀턴을 막기 위해서 대부분의 전력을 여기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북쪽이라고 해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뚫리다니?
“적은 누구인가?”
“플로렌스 공국의 바이올렛 공주라고 합니다.”
“바이올렛 공주? 그렇다면 플로렌스 공국이 이끄는 병력이란 말인가? 그들은 동부에 남아서 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참모진이 알기로 밀턴이 후퇴하고 코브르크 공화국와 대치하고 있던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플로렌스 공국의 병력이었다.
그런데 그 바이올렛 공주가 여기에 나타나다니?
“그렇다면 동부는? 적들이 설마 텅텅 비워 두었던 말인가?”
“그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럴수가? 기껏 점령한 우리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을 버렸다고? 그 탄탄한 방어 라인을?”
코브르크 공화국 출신의 참모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방어 라인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스트라부스 왕국이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군사를 동원했던가?
그걸 기적처럼(?) 함락시킨 게 바로 밀턴이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이 무너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밀턴 포레스트라는 남자의 가치가 확 올라갈 정도였다.
그리고 방어 라인을 점령한 후에 밀턴이 점령지의 안정화에 힘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밀턴 포레스트도 저 방어 라인을 완벽하게 점령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기껏 다 점령해 놓은 방어 라인을 다시 버리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쩌지요? 북부로 병력을 보내야 할까요?”
“기… 기다려 보시오. 그럼 아군의 병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밀턴 포레스트를 상대해야 한단 말이오? 적은 그렇게 간단한 상대가 아니오.”
“하지만 북부 쪽이 뚫린다면 우리는 보급이 끊어진 상태로 적지에서 적과 싸워야 하오. 자칫 잘못하면 10만의 공화국군이 모두 궤멸할 수도 있다는 말이오.”
참모들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서 논쟁에 들어갔다.
사실 이들로서는 밀턴 포레스트를 상대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번 전쟁에서 밀턴이 워낙 혁혁한 공을 세우며 눈부신 활약을 한 덕분에 그 명성이 훨씬 올라갔다.
알게 모르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공화국의 지크프리트.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
이 두 명이 양쪽의 에이스 카드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병력을 나눠서 북부에 지원할지 말지에 관해서 활발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전령이 추가 정보를 가지고 왔다.
“북부에 나타난 1만의 군에 마스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스터의 이름은 제롬 테이커입니다.”
이 정보가 공화국군에 가져온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제롬 테이커? 그 밀턴 포레스트의 오른팔 말인가?”
“이럴…. 혹시?”
“혹시 뭐요?”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밀턴 포레스트는 우리 발을 묶기 위한 미끼일 뿐이고 진짜 주군은 북부를 관통하고 있는 1만의 병력일지도 모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밀턴 포레스트가 자신을 미끼로 전력을 집중시킨 후에 소수 정예의 1만 정병을 꾸려서 북부를 관통한다는 말이오.”
“하…. 하지만 1만 가지고 도움이 되겠소? 지금 레스터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출진한 힐데스 공화국의 병력은 5만이오. 아무리 마스터가 포함되었다고 하나….”
“이런 답답한 사람들. 북부를 관통할 수 있다면 더 빠르게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이 있지 않소.”
그 말에 다른 이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우리 하노버슈 공화국 본토를 노린다는 말이오.”
“그렇소. 북부 전선을 무너트리고 병력이 적어진 지금이야말로 적들이 우리의 급소를 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하지만 1만의 병력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이오. 거기에는 최근에 공화국으로 전향한 오브라이언 공…. 도 있지 않소?”
“이런 답답한…. 승패를 떠나서 북부 전선에서 다시 싸움이 벌어지면 보급선이 멈추오.”
“앗?!”
“이런…?”
다른 참모관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우리 병력이 무려 10만이오. 10만 병력을 보급 없이 얼마나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한 달? 보름? 길어야 2주 후면 바로 영향이 드러날 것이오.”
전쟁에서 가장 피해야 할 상황.
그것은 보급이 떨어진 상황이다.
10만이 아니라 100만의 대군이라고 해도 쫄쫄 굶고 있는 병사들이라면 전혀 무섭지 않다.
오히려 대군이면 대군일수록 보급의 유지는 더 어려워지고 영향력도 더 크게 나타나는 법이다.
“과연,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북부에서 자신의 오른팔이 보급선을 차단하고 그 효과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던 건가?”
참모 중에 한 명은 그제야 밀턴의 속셈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주변에 다른 참모들도 그 추리에 동의를 했다.
“위험합니다. 이건…. 우리가 너무 불리해요.”
“보급은 무조건 지켜야 합니다.”
“그걸 최우선으로 작전을 생각해 봅시다.”
우왕좌왕 떠드는 참모들을 보며 데이비드는 조소했다.
‘완전히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군.’
적이 북부에서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보급선이 완전히 무너질지는 의문이다.
1만의 병력 가지고 보급에 지장을 줄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설령 보급이 무너진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일주일 이상 버틸 수 있는 군량이 있다.
그렇다면 우선은 적과 싸워서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 후에 적의 대응에 따라서 아군의 행동 지침을 정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참모들은 그저….
이러면 어쩌지?
저러면 어쩌지?
큰일이야 큰일. 어쩌면 좋지?
‘애냐?’
데이비드가 보기에 참모들은 완전히 냉정을 잃었다.
밀턴 포레스트라는 강적을 상대하는 것에 겁을 먹었고.
공화국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10만이라는 대군을 지휘하는 것에도 역시 부담을 느꼈다.
군을 인간으로 비유하면 참모진은 머리다.
그 머리가 자신감을 잃고 당황하고 있으면 아무리 군사가 강군이라도 그 전력은 반 이하로 줄어두는 법이다.
“일단, 전군을 후퇴합시다. 두 개를 동시에 막으려고 했다가는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소.”
“그렇습니다. 우선은 북부의 보급선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옳소. 힐데스 공화국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우리가 밀턴 포레스트의 발을 묶어 두는 것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하오.”
결국 나온 결론은 전군 후퇴였다.
그 광경을 보고 데이비드는 피식 웃었다.
‘전부 주군의 예상대로군.’
데이비드는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미리 지크프리트에게 언질을 받았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공화국군의 참모진에 남아서 다른 상황이 발생하면 보고를 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지크프리트가 말했던 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더 남아 있어도 내가 할 일은 없겠군.’
데이비드는 이제 슬슬 이 답답한 돌대가리들 사이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사흘.
세비안 자작이 장담하고 사흘이 지난 아침 날.
어제까지만 해도 바로 앞에 탄탄하게 진형을 유지하고 있던 공화국군의 진형이 사라졌다.
어두운 야밤을 통해서 빠르게 철수한 것이다.
전령에게 상황을 보고 받은 세비안 자작은 밀턴에게 웃으며 말했다.
“정확하게 사흘 후입니다. 주군.”
“으음…. 그때 사흘째라고 하지 않았나?”
“사흘 후라고 했습니다.”
“정말인가?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쳇.”
밀턴은 골드가 든 주머니를 세비안 자작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설마 이렇게 딱 맞출 줄이야.”
투덜거리는 밀턴을 보고 주변에 기사들은 상황을 깨달았다.
‘내기했었구나.’
어쨌든 길은 열렸다.
사흘 동안 대치만 했을 뿐인데 알아서 적이 길을 터준 것이다.
적을 완전히 손바닥 위에 올려서 가지고 노는 세비안 자작의 지략에 밀턴은 은은하게 감탄했다.
‘원래 이 정도였나? 아니야.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세비안 자작의 유능함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밀턴이었지만 그런 밀턴이 보기에도 최근 세비안 자작의 지략은 한 차원 다른 경지로 올라간 느낌이었다.
리트인크 공성전의 패배 이후 자아 성찰을 하면서 한층 더 지략이 올라간 결과였다.
‘점점 발전하는구나. 세비안도, 제롬도….’
최근의 전투에서 점점 발전하는 둘을 보며 밀턴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 둘의 충성심을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능한 신하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주군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특히 최근에 지크프리트가 마스터의 경지라는 것도 그 압박에 한몫을 했다.
밀턴 본인도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기는 했지만, 벽에 걸려서 최근 1년 동안 계속 정체기만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군, 무슨 생각하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그럼 예정대로 진행하지.”
“예. 알겠습니다.”
‘일단은 눈앞의 전쟁에 집중하자.’
그렇게 밀턴이 이끌고 있는 본군이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으로 진군했다.
물고 물리는 난전.
훗날 1차 이념 대립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수렁 속에 빠져 있었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이 무너졌고, 스트라부스 왕국의 북부 국경도 무너졌다.
레스터 왕국의 반격으로 힐데스 공화국의 본토가 절반 가까이 침략 당했다.
지크프리트는 힐데스 공화국군을 끌고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을 관통해서 무방비한 레스터 왕국을 공격하려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밀턴 포레스트가 그런 지크프리트를 추격하기 위해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으로 진입했다.
공화국의 존재로 인해서 항상 전화에 휩싸여 왔던 대륙의 북중부 지역은 항상 시끄러웠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심각한 상태였다.
남부의 국가들은 이 전쟁이 끝나면 국경선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핵심은 지크프리트를 추격하고 있는 밀턴 포레스트였다.
이 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한 두 남자가 곧 부딪힐 것 같아지자 전 대륙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둘의 부딪힘이 사실상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전투라는 것을 말이다.
과연 언제 어떻게 부딪힐까?
다른 나라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전쟁의 향방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