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평생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제이크가 다시 한번 충성심을 다지고 있는 그때, 지크프리트가 눈을 떴다.
“제이크.”
“예. 주군.”
“나는 본진으로 돌아간다. 이곳의 지휘는 너에게 맡기겠다.”
“예. 알겠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이제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그늘 속에 제이크라는 존재를 감춰왔다.
하지만 그런 제이크에게 일군을 맡긴다는 것은 이제 그 존재를 숨기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없는 동안 적과 싸우기보다는 견제하며 버티기만 하면 된다. 적절한 시기에 내가 연락을 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제이크에게 지시를 내린 후에 지크프리트는 최소한의 호위 병력만 데리고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말에 오르고 잠시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밀턴 포레스트….”
어쩌면?
아니, 근거는 없지만 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초래한 것은 틀림없이 밀턴 포레스트다.
논리적인 근거는 없었지만 그런 확신이 드는 지크프리트였다.
“다음에는 반드시 죽이겠다.”
그렇게 말하며 지크프리트는 동부 전선을 이탈했다.
본진에 돌아간 지크프리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하슈텐 총통의 큰 질책이었다.
“어떻게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단 말인가?”
바하슈텐 총통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지크프리트에게 있다는 듯이 매섭게 다그쳤다.
“죄송합니다. 총통 각하.”
지크프리트는 담담하게 머리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사실 지크프리트의 실책이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니다.
북부의 동토를 관통해서 힐데스 공화국의 본토를 공격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그 일이 벌어진 지금에 와서조차도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지크프리트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지크프리트뿐만 아니라 공화국의 어떤 참모나 장교들도 북부의 위험성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바하슈텐 총통 본인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바하슈텐 총통은 지크프리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과거에는 절대 이렇지 않았다.
지크프리트가 공화국 안에서 고속 출세를 하며 주변의 많은 견제를 받았지만 자기 자기를 굳건하게 지켜줄 수 있었던 것은 바하슈텐 총통이 정치적인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온전한 자신의 사람이라고 믿어온 바하슈텐 총통은 지크프리트의 재능을 크게 아꼈기 때문이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물론이고 공적인 자리에서조차 지크프리트를 자기 아들처럼 대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하지만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온 신뢰는 이번의 실패로 인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본국에서 들려온 소식은 하루하루 최악의 사태를 경신하고 있었다.
북부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는 5,000의 병력을 처리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남부 국경에서는 레스터 왕국의 페일런 공작이 군을 이끌고 북상 중이었다.
이미 국경 수비대는 패배했고 페일런 공작이 이끌고 있는 군은 힐데스 공화국의 요새를 하나씩 점령해 가고 있었다.
이미 국토의 3분의 1이 넘는 지점까지 페일런 공작의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망국의 위기감이 피부로 다가온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바하슈텐 총통의 그릇은 크지 않았다.
“나라에 이런 위기를 초래하다니? 이 대역죄를 어찌 갚을 것인가? 그대를 산 채로 찢어 죽인다고 해도 죄를 사하기에는 부족할 것이야! 알고는 있는가?!”
본인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버거워진 사태에서 비난을 조금이라도 모면하기 위해서일까?
바하슈텐 총통은 자신의 심복인 지크프리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있었다.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절박함에서 비롯된 우행이었지만….
항상 이런 경우 본인은 자각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입니다.”
지크프리트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순순히 그 죄를 뒤집어썼다.
“후우…. 후우….”
한참 동안 매도에 가까운 질책을 쏟아낸 바하슈텐 총통은 충혈된 눈으로 지크프리트를 노려보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조금은 냉정을 찾았는지 그제야 가장 먼저 했어야 할 말을 입에서 꺼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있는가?”
“예. 있습니다.”
지크프리트의 입에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자 바하슈텐 총통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
“예. 오면서 쭉 생각했습니다. 본국을 살리는 동시에 이 전쟁의 성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말입니다.”
“그게 정녕 가능하겠는가?”
바하슈텐 총통의 눈빛이 다시 돌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국가를 위기로 내몬 역적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신뢰할 수 있는 심복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뀐 것이다.
“말해 보게. 어떤 방법이 있는가?”
“그것은….”
지크프리트가 계획을 설명하고 그 설명을 듣기에 따라서 바하슈텐 총통의 표정도 시시각각 변해 갔다.
그리고 모든 설명이 끝나고 바하슈텐 총통이 말했다.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부족하지만 저의 소견으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바하슈텐 총통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가능할까? 너무 대범한 수 같기도 한데?’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진행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바하슈텐 총통의 허락을 받은 지크프리트는 즉시 군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부로 공화국의 연합군에서 힐데스 공화국의 병력은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 전장을 이탈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다른 두 공화국이 허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힐데스 공화국이 움직인 곳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대였다.
서부 지역의 요새와 영지들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움직이는 그 행동은 굉장히 빨랐다.
점령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를 목적으로 하고 달리는 그 모습에서 다른 이들도 힐데스 공화국의 목적을 알 것 같았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쪽.
거기에 있는 것은 레스터 왕국이었다.
“과연, 묘안이군.”
“대단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게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대응책이 아닌가 합니다.”
레스터 왕국으로 진군하는 힐데스 공화국군을 보며 공화국 연합군의 본진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작전 참모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전쟁은 스트라부스 왕국을 침공하기 위한 전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전쟁에서 가장 걸리적거리고 있는 존재는 레스터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다.
밀턴이 동부에서 대활약을 했기 때문에 코브르크 공화국이 위기에 봉착했다.
그 후에 힐데스 공화국의 북부에 나타난 것 역시 레스터 왕국의 별동대라고 밝혀졌다.
거기다 레스터 왕국의 페일런 공작은 이번 기회에 힐데스 공화국을 끝장내 버리겠다는 듯이 군을 진격시켰다.
지금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레스터 왕국인 것이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는 힐데스 공화국의 병력을 이끌고 레스터 왕국을 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레스터 왕국은 원정과 힐데스 공화국 공격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국내에는 이렇다 할 수비 병력이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 스트라부스 왕국과 레스터 왕국은 기본적으로 동맹이었다.
그 말은 국경 지대의 방비가 어설프다는 말이었다.
일단 당도하기만 하면 힐데스 공화국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지크프리트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나는 본국의 위기를 구할 수 있다.
지금 페일런 공작이 힐데스 공화국을 공격하고 있지만 본국이 위기에 처한다면 병력을 물려야 할 것이다.
지금 레스터 왕국의 방비로는 힐데스 공화국을 막을 수 없다.
가장 빠르게 귀환할 수 있는 병력인 페일런 공작은 귀환을 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밀턴 포레스트의 견제다.
지금 밀턴은 동부 지역에서 지크프리트가 남긴 공화국군과 대치하고 있다.
하지만 본국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는 그도 원정을 계속하기 힘들 것이다.
페일런 공작이 제때 귀환한다고 해도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힐데스 공화국군은 심각한 위협이다.
가장 빠르게 귀환할 수 있는 병력이 페일런 공작의 북부군이라면 가장 큰 힘이 되는 최대 전력은 밀턴 포레스트가 이끄는 중앙 정규군이다.
페일런 공작이 귀환해서 시간을 끄는 동안 밀턴 포레스트가 서둘러 귀환해서 힐데스 공화국의 뒤를 공격한다.
이게 레스터 왕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방어책이었다.
상황을 해석한 공화국군의 참모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밀턴 포레스트를 막아야겠군요.”
“그렇소. 굳이 정면으로 싸우지 않아도 시간을 끌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오.”
“우리가 시간을 끄는 만큼 레스터 왕국은 더 위기에 빠질 테니 말이오.”
연합군의 참모들은 전쟁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바로 위에 보고를 했다.
그리고 그들이 보고를 하던 시점에 동부 전선을 지키고 있던 제이크가 전령을 보냈다.
동부 전선에서 대치중이던 밀턴 포레스트가 후퇴를 했다고 말이다.
공화국군의 참모들은 그 정보를 듣고 자신들의 판단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즉시 상부에 보고를 했고 공화국군은 창끝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 밀턴 포레스트가 동쪽에서 공격해 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만, 연합군에 남아 있던 참모들 중에 딱 한 명만은 삐뚤어진 시선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그는 지크프리트의 심복인 데이비드였다.
그는 바쁘게 움직이는 공화국군을 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보고합니다. 우리 군의 진행 방향에 공화국군의 진을 치고 있습니다.”
척후병이 가져온 보고를 들은 밀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옆에 있는 세비안 자작을 보며 말했다.
“자네 예상대로군.”
“뻔히 보이는 일이었으니까요.”
세비안 자작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지크프리트가 서부 지역으로 군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세비안 자작은 지금의 상황을 예상했다.
당연히 예상하고도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여기서 저놈들을 격퇴하면 되는 건가?”
적의 병력 규모는 10만.
아군의 병력은 5만.
하지만 밀턴이 보기에는 지크프리트가 포함되었던 4만의 병력이 훨씬 더 버거워 보였다.
솔직히 싸워야 한다면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저놈들을 상대하기에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서둘러서 서부로 이동해야 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강행 돌파인가?”
“아니요. 이대로 대치입니다.”
“시간이 아깝다고 하지 않았나?”
“예. 하지만 싸우지 않고 통과할 수 있다면 그만큼 전력을 아낄 수 있으니까요.”
“싸우지 않고 통과한다고?”
“예. 제 예상으로는…. 아마 사흘 후에는 적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줄 것입니다.”
자신만만한 세비안 자작의 말에 밀턴은 웃으며 말했다.
“자신만만하군.”
“예. 믿어 주십시오.”
“좋아. 다만 그것과 별개로….”
밀턴은 세비안 자작에게 뭔가 비밀리에 말을 했고, 세비안 자작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밀턴은 세비안 자작의 말대로 공화국군과 별 전투 없이 대치에 들어갔다.
하루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하며 어떤 자극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공화국군이었다.
적극적으로 공격할 줄 알았던 밀턴이 진형을 차리고 얌전하게 대치에 들어갔다.
예상을 한참 벗어난 행동이었다.
공화국군을 이끌고 있는 두 총통은 참모진에게 상황을 분석하라고 명령했고 참모진들은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왜 저러는 것일까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본국에 위기 상황을 자각하고 있으니 군을 물렸을 터. 그렇다면 서둘러야 하지 않나?”
공화국군의 참모들은 밀턴의 속내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참모들의 회의장에 존재감을 죽이고 가만히 있던 데이비드에게 누군가가 질문을 했다.
“공은 어찌 생각하시오? 적의 노림수는 뭐라고 생각하시오?”
질문을 받은 데이비드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어설프게 말했다.
“그….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어…. 짐작 가는 게 전혀 없다는 말이오? 일전에 북부 전선을 붕괴시킨 작전은 그대의 작품 아니었소? 그만한 작전을 구상한 전략가가 어찌 그리 소극적이오?”
참모진의 시선은 데이비드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데이비드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수치스러운 듯이 말했다.
“사실…· 그때의 작전은…. 제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뭐라고? 그럼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란 말이오?”
“그…. 지크프리트 비서관님이 가시기 전에 작전을 구상하는 걸 옆에서 봤습니다. 그게… 좋은 작전 같아서….”
데이비드의 말에 참모진들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의 작전을 훔쳤다는 건가?’
‘그리고 그걸 자기 공적으로 돌렸다고?’
‘쓰레기 이하로군.’
참모진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 데이비드에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