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무방비 상태였던 북부 수비대를 무너트린 릭과 토미는 그대로 요새를 점거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그대로 힐데스 공화국의 수도를 노리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힐데스 공화국을 경악시켰고, 당연히 전장에 있는 바하슈텐 총통에게 전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원군을 보내서 공화국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부에서 적이 나타났다는 것은 수도의 바로 지척에 적이 나타났다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다른 두 총통은 그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북부 전선을 무너트린 지금이야말로 스트라부스 왕국의 영토를 최대한 점령할 수 있는 기회다.
이제까지 고생고생해서 겨우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데 전력을 나눈다는 말이 먹히겠는가?
특히 코브르크 공화국의 슈하이머 총통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동부 전선이 뚫리고 거의 괴멸 상황까지 갔을 때 그 역시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크프리트가 간신히 다른 두 총통을 설득해서 원군을 이끌고 가 상황을 진정시키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이 거의 다 무너져 버린 후였다.
그런 전례가 만들어져 버렸다.
슈하이머 총통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위기는 외면당했는데 이제 와서 힐데스 공화국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원군을 보낼 수는 없었다.
“실제 지크프리트가 가서 귀국을 구하지 않았소?”
“그것은 전황에 필요한 일이라는 지크프리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오. 지금하고는 상황이 다르오!”
“어떻게 다르단 말이오. 지금 우리나라에 적이 들어왔는데?”
“고작 5,000 남짓이라고 하지 않소? 그것조차 대응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오?”
“지금 우리나라는 전력의 대부분을 이 원정에 동원하였단 말이오? 그런 상황에서 5,000의 병력은 충분히 위험하오.”
힐데스 공화국의 바하슈텐 총통과 코브르크 공화국의 슈하이머 총통은 서로 죽일 듯이 싸웠다.
같은 공화국이고 뭐고 간에 일단 나라가 다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국의 안전과 이득이었고 지금 같이 심각한 위기 상황이 닥치자 필연적으로 분열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까지는 이런 상황이 찾아 왔을 때마다 지크프리트가 적절하게 중앙에서 중재를 하며 균형을 잡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 지크프리트는 밀턴을 상대하기 위해서 동부로 떠나 있었다.
사공이 셋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던가?
애당초 대등한 관계가 세 명이라는 시점에서 이 동맹에는 불안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결국 논쟁을 아무리 벌여도 의견은 팽팽하게 대립했고, 결국은 원군을 보내지 않는 것으로 결정 났다.
바하슈텐 총통이 납득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다수결에 의해서 그렇게 정해졌을 뿐이다.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하슈텐 총통 한 명뿐이었지만 다른 두 명의 총통이 거기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다.
절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슈하이머 총통은 기어코 원군을 보내야 한다면 차라리 힐데스 공화국 전군이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노버슈 공화국의 페인하임 총통도 그건 괜찮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바하슈텐 총통으로서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막 북부 전선을 무너트려서 스트라부스 왕국을 본격적으로 집어삼키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힐데스 공화국이 돌아가면 삼등분으로 나눠 먹어야 할 이득이 이등분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다른 두 총통이 그걸 노리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발을 빼겠는가?
‘빌어먹을 개새끼들….’
바하슈텐 총통은 이를 갈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본국에 서둘러 전령을 보내서 아군의 병력으로 어떻게든 수도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동부에 있는 지크프리트에게도 전령을 보내 상황을 알렸다.
‘괜찮을 것이다. 아무리 배후를 점령당했다고 해도 5,000의 병력 정도라면 본국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바하슈텐 총통은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
“지금 뭐라고 했지?”
바하슈텐 총통이 보낸 전령에게서 본국의 상황을 들은 지크프리트는 몸을 가늘게 떨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예. 본국의 배후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수도가 위급하다는 정보가 전해졌습니다.”
지크프리트는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있는 전령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순간 목을 베어 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냉철한 지크프리트였지만 지금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낄 정도로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원군은? 원군은 얼마나 보내기로 했지?”
가능하면 이번에 새롭게 포섭한 오브라이언을 보내서 본국의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이 좋았다.
배후를 뚫린 것은 위험했다.
어쩌면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브라이언 공작에게 1만의 군대만 더해서 보낸다면 수도를 잃는다고 해도 능히 수복 가능하리라.
피해를 안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가장 피해를 적게 보는 대응법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크프리트에게 전령의 대답은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원군은 없다고 결정 났습니다. 대신 자국의 병력으로 어떻게든 대응하라고….”
“도대체 누가 그딴 지시를 내렸나!!”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는 지크프리트의 살기에 전령은 자신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죽…. 죽는다.’
마스터인 지크프리트의 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전령은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런 지크프리트를 막은 것은 옆에 있던 제이크였다.
“진정하십시오. 주군.”
“…….”
자신을 가로막은 제이크를 보고 지크프리트는 바닥을 드러낸 인내심을 지하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렸다.
생각 같아서는 이게 진정할 일이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자신답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최악에 최악인 것이다.
“후우우우우….”
깊은 호흡을 내뱉으며 지크프리트는 자기 안에 울화를 최대한 가라앉혔다.
‘냉정하자. 여기서는 냉정해야 한다.’
지금 자신의 상황을 보건대 입에서 한숨이 아니라 피를 토해도 분기가 가라앉을까 말까이다.
하지만 그게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상 지크프리트는 무조건 냉정해야 했다.
“전령.”
“예? 히끅…. 말씀…. 히끅 하십시오.”
딸꾹질로 말을 더듬거리고 있는 전령에게 지크프리트가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원군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라. 본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지크프리트의 말에 전령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이번 문제를 가지고 세 명의 총통이 서로 대립했다는 정보는 이미 공화국 안에서 비밀도 아니었다.
참모들은 물론이고 일반 병사들 사이에도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황을 모두 전해들은 지크프리트는 침통하게 신음했다.
“으음….”
무엇이 잘못되었던가?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고찰을 하자 답은 나왔다.
‘내 실수다. 총통들 간에 불화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사상이 같다고 해도 서로 다른 나라의 국가 원수 세 명이 참여한 동맹군이다.
사실 지크프리트는 이 원정군을 자신이 직접 이끌려고 했지만 바하슈텐 총통이 참전을 원했고, 거기에 질세라 다른 두 명의 총통도 참전 의사를 밝혔다.
바하슈텐 총통 혼자서 동맹군에 참전하면 동맹군의 안에서 자국의 권리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크프리트 본인이 본군에 있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지크프리트는 힐데스 공화국 소속이었지만 적절한 명분과 수려한 언변, 그리고 공통된 목표를 제시하면서 세 명의 총통이 불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적절하게 컨트롤했다.
그리고 밀턴에게 대응하기 위해 동부 쪽으로 오기 전에도 혹시 본군에 문제가 생길지 몰라 자신의 측근인 데이비드에게 지시를 하여 미리 북부 전선 공략 작전을 짜 놓았다.
우연한 기회에 손에 넣은 카드였지만 뭐든지 쓰기 나름이랄까?
혹시 몰라서 일단 손에 넣어둔 카드였을 뿐인데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았다.
덕분에 스트라부스 왕국의 심장을 도려낼 비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지크프리트가 만들어둔 작전으로 스트라부스 왕국의 북부 전선을 무너트렸다.
일단 눈앞에 먹잇감을 던져주면 세 명의 총통이 불화를 일으킬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힐데스 공화국의 북부에서 적이 나타나다니?
천하의 지크프리트라 해도 이건 상상도 못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런 작전, 아니 이건 이미 작전도 뭣도 아니야. 도박이다. 그것도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은….’
성공 확률은 낮았지만 그 대신 성공했을 때의 배당은 엄청나게 높았다.
세비안 자작이 혹시나 싶어서 말했던 세 번째 안배.
밀턴은 그것을 적극 채용해서 릭과 토미에게 중임을 맡겼다.
그리고 그 둘이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힐데스 공화국의 배후를 점한 병력은 고작 5,000이었지만 이 5,000이 이번 전쟁에서 발휘할 수 있는 파괴력은 5만, 아니 10만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본국에서 자체적으로 대응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그게 언제지?”
“제가 출발할 때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이제 와서 돌리기는 늦었군.”
지크프리트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힐데스 공화국은 대부분의 전력을 원정에 투입했다.
유일하게 본국에 남아 있는 전력은 남쪽에 레스터 왕국과 마주하고 있는 국경 수비 병력뿐이다.
‘바하슈텐 총통의 명령이 있었다면 국경 수비대의 병력이 움직였겠지.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되는 병력이었는데….’
이 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레스터 왕국과의 국경 지대 방비에는 큰 공을 기울였던 지크프리트였다.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국경 지대에 있는 것은 레스터 왕국의 마스터인 션 페일런 공작인 것이다.
그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서 방비를 해 놓았다.
그런데 그곳에 병력이 빠졌다.
아마 적이 이것을 모르고 움직이지 않기를 바라며 그랬겠지만….
‘멍청한….’
그런 기적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
힐데스 공화국의 북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병력은 아마 레스터 왕국군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전에 얘기가 되었을 것은 뻔한 일.
아마 페일런 공작은 전군을 이끌고 힐데스 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리라.
수도를 지키기 위해서 병력을 뺀 국경 수비 병력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못 해. 절대로….’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페일런 공작이 이끄는 북부군은 강적이다.
그런데 지금 같은 악조건 속에서 이길 만큼 유능한 인재는 지금 본토에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미래를 빨리 보는 법이다.
그게 희망찬 미래든 절망에 물든 미래든….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지금 빠르게 깨달았다.
‘본국은 살릴 수 없다.’
쉽게 포기한 것이 아니다.
이건 상황을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해서 나온 결론이었다.
본국을 살릴 수 있다면 지크프리트도 당연히 살리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다만, 그럴 수 있는 길이 도저히 보이지가 않았다.
몇 가지 방도는 보였지만 그건 오히려 살리는 것보다 더 최악인 우행 중에 우행일 뿐이었다.
‘본국은 살릴 수 없다.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도 당초 구상했던 것과는 꽤 달라질 것이야.’
지크프리트의 머리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분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냉철하게 분노를 잘라 버리고 오직 이성만으로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한다.
톡톡톡톡톡….
지크프리트는 어느새 차분하게 앉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령은 그런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오히려 얼떨떨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이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분노를 느꼈는데 이제는 되레 차분해졌다.
과연 조금 전의 지크프리트와 지금의 지크프리트가 동일 인물이 맞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 정도로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이다.
‘역시, 놀라운 절제력이다.’
제이크는 그런 지크프리트를 보고 은은하게 감탄했다.
지크프리트는 신묘한 지략과 무쌍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제이크가 생각할 때 지크프리트의 가장 대단한 점은 정신력 그 자체에 있었다.
무력도, 지력도, 야망을 숨기고 굴욕을 감수하는 심계도….
모두 지크프리트의 인간을 초월한 정신력에 근거해서 하나씩 쌓아올린 것이다.
‘자신을 완벽하게 절제하고 통제하는 정신력. 주군은 그것을 타고나셨다.’
때로는 그래서 인간 같지 않은 비정함이나 냉철함도 보이지만 제이크는 확신했다.
지크프리트다.
지크프리트밖에 없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진정한 제왕은 오직 지크프리트 한 명뿐인 것이다.
공화주의던 왕권주의건 간에 그딴 건 상관없다.
이 세상의 정점에 지크프리트가 올라갈 수만 있다면 그런 사상의 종류 따위는 지극히 사소한 일이다.
적어도 제이크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