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후퇴 중이던 연합군의 본대.제133화
밀턴이 공화국군과 격돌한 것과 지크프리트가 볼로나 후작의 군과 전투를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지크프리트는 밀턴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최대한 빠르게 이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서 서둘렀다.
“전군 전진! 궁병은 화살을 아끼지 말고 쏴라!”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다.
자신이 낚였다는 것을 깨달은 지크프리트는 최단시간에 이 전장을 정리해 버리고 어서 아군을 수습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추격을 맡긴 네이든으로서는 밀턴 포레스트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이 전장을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몰랐다.
빠른 섬멸을 위해서 포위망을 전진 시킨 사이에 누군가가 이 전장에 은밀하게 접근하고 있음을 말이다.
붉은 머리에 커다란 장궁을 매고 있는 남자가 중얼거렸다.
“저놈이 지크프리트인가?”
트라이크가 나타난 것이다.
세비안 자작이 밀턴에게 말한 한 방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처음부터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제롬에게 수고를 시키면서까지 지크프리트를 유인했는데 그 대가가 고작 2만 병력의 섬멸?
이걸로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전에 리트인크 요새의 패배에서 연합군이 잃은 피해가 5만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걸로는 한참 부족했다.
그래서 트라이크에게 따로 밀명을 내린 것이다.
볼로나 후작의 군을 멀리서 미행하며 시기를 보다가 지크프리트가 나타나면 저격을 하라고 말이다.
[저격의 방식과 타이밍은 전부 맡기겠습니다. 내키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비안 자작이 내린 임무는 사실상 암살에 가까운 것으로 기사에게 내리기에는 꺼려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세비안 자작은 조심스런 말투였지만 트라이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한테 맡기십쇼.]
기사의 명예.
지금은 기사였지만 원래 용병 출신인 트라이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주 무기는 활이다.
멀리서 노리는 게 뭐 어때서?
몰래 쏘는 게 뭐 어때서?
원래 이렇게 쓰는 무기다.
트라이크는 일말의 거부감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라는 것이 트라이크의 생각이었다.
말에서 내린 트라이크는 두 발로 지면에 섰다.
그리고 평소에 쓰던 거대 장궁을 꺼내서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유감은 없다만 좀 없어져 줘야겠다.”
표적은 군의 지휘를 위해서 정신이 없었다.
거기다 자신은 지금 정확하게 뒤를 잡았고, 주변에는 자기 화살을 막아줄 호위 병력도 적었다.
거리가 꽤 멀고 바람이 좀 불기는 했지만 트라이크에게 그런 건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가라.”
팅!
맑은 소리와 함께 트라이크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크프리트의 뒷목을 노렸다.
투구와 갑옷의 이음새를 정확하게 노린 화살이 지크프리트의 지척에 도달한 그 순간.
“읏!?”
휙!
지크프리트는 급하게 자기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이질적인 감각이 경고했고,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단련된 육체는 그 경고를 정확하게 따랐다.
그리고 트라이크가 쏘아낸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지크프리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크프리트 비서관님?”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화살을 발견한 측근들은 지크프리트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다. 혈관은 피했어.”
대답하는 지크프리트의 목소리는 몹시 차분했다.
누가 봐도 방금 전에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크프리트의 머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적과 반대 방향에서 인기척도 없이 날아온 화살…. 그렇다면?’
시선을 돌린 지크프리트는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에 한 명의 남자가 말 옆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눈이 싸늘해졌다.
“저놈은…?”
밀턴 포레스트에게 엄청난 실력의 궁사가 있다는 첩보는 입수했다.
그 실력이 워낙 탁월해서 용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사로서 서임을 했다는 정보도 들었다.
그 남자의 이름이 분명….
“트라이크, 트라이크 로우라고 했었지?”
저놈이 아마 그 놈일 것이다.
지크프리트의 눈이 반짝였다.
이 자리에는 밀턴도 없고, 그 밀턴의 오른팔이 제롬도 없다.
하지만 저 트라이크라는 남자의 비중을 생각할 때 여기서 놓치면 훗날 두고두고 귀찮아질 것이다.
“고스트 1조, 나를 따라라! 적을 친다!”
결심을 굳힌 지크프리트는 빠르게 말을 몰아서 트라이크를 향해서 질주했다.
“저걸 피하다니?”
트라이크는 상당히 놀랐다.
이제까지 전장에서 표적을 놓쳐 본 것은 이게 두 번째다.
처음은 밀턴 포레스트.
지금의 주군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상대는 주군이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적 지크프리트였다.
‘완전히 시야의 사각에서 쏜 화살인데 그걸 피했어. 저놈…. 익스퍼트 수준이 아닐지도 몰라.’
트라이크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지금 이 순간 적은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다.
후퇴하려면 지금이다.
다행이 이 임무를 위해서 트라이크는 디스트로이종 중에서도 최상급을 배정받고 왔다.
거리가 벌어진 지금 작정하고 달리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라이크는 다른 선택을 했다.
“허락은 안 받았지만….”
그리고 그는 자신의 활을 내려놓고 말에 예비용으로 준비한 다른 활을 꺼내 들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기형적인 장궁과 비슷한 사이즈의 활로 부무장으로 가지고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사실 이건 부무장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드디어 이걸 써 보는군.”
얼마나 기다렸던가?
주체할 수 없는 기대감 때문일까?
트라이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트라이크]
기사 LV.4
무력 - 84 통솔 - 90
지력 - 50 정치 - 17
충성 - 94
특성 - 원시, 저격, 속사
원시 LV.9(MAX) : 시력이 좋아진다.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 매에 버금하는 시력을 갖추고 있다.
속사 LV.9(MAX) : 활을 연달아서 쏠 수 있는 속도가 늘어난다. 연속으로 화살을 발사하면서도 정확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저격 LV.8 : 활의 사거리가 늘어난다. 거리가 멀어도 활의 위력과 정확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트라이크의 상태창이다.
처음에 밀턴과 만났을 때 무력 수치가 79였는데 이제는 84까지 올랐다.
보통 기사들이라면 최소 익스퍼트 중급, 혹은 상급에 턱걸이를 할 정도의 실력인 것이다.
그러나 트라이크는 검을 잡아도 오러를 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검에 대한 수련도가 낮고 오러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도 않았다.
트라이크가 검을 잡고 싸우면 보통의 기사 두 셋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무력이 70대 초반인 익스퍼트의 기사가 상대라면 절망적인 격차를 드러냈다.
밀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감출수가 없었다.
트라이크의 무력은 80을 훌쩍 넘었다.
설령 검으로 오러를 뿜어내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뭔가 좀 이상했다.
그래서 제롬과 여러 가지 상의를 해서 몇 가지 시험해본 결과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트라이크는 이미 익스퍼트의 궁사다.
오러를 외부로 발출하지 못할 뿐이지 몸 안에는 이미 충분한 기운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비정상적으로 궁술에 특화된 신체 능력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보통 장정들이 반도 못 당기는 대형 장궁을 연속으로 속사하는 능력이나 표적을 겨냥할 때 1미리도 흔들리지 않고 완벽하게 컨트롤되는 신체 능력.
이것은 절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렇게 응축된 능력을 외부로 뿜어내기에 활은 너무나 좋지 않은 무기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밀턴과 제롬은 막혔다.
활을 아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트라이크의 경지에 비하면 제롬이나 밀턴은 그냥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하면 활로 오러를 뿜어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가져본 적도 없었다.
트라이크의 경우는 정말이지 특수한 케이스였다.
그러나 뜻밖에 해답을 나온 것은 이 고민을 들은 비앙카였다.
“기운을 외부로 뿜어내기만 하면 되는 거제? 그럼 방법은 있데이.”
그렇게 말하면서 비앙카가 트라이크에게 내민 것은 꽤 굵은 나무의 원목이었다.
사람의 허벅지 정도 되는 크기의 나무는 가지라고 하기는 굵었고 목재라고 하기에는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신기한 것은 잘린 지가 꽤 되었는데도 나무에는 여전히 생기가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게 뭡니까?”
트라이크의 질문에 비앙카가 말했다.
“드라이어드라고 하는 나무데이.”
“드라이어드? 그건 설마….”
드라이어드라고 하면 나무의 정령으로 알려져 있다.
숲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아름다운 여인의 환상을 보여줘서 유혹한 다음 천천히 정기를 빨아 먹는 정령.
대강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그건 환상 속의 존재였다.
실제로 정령을 본 사람도 없고 그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옛날 얘기라고 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신빙성이 달라지는 법이다.
마법사라고 하면 이면의 신비한 세계에 접한 존재.
비앙카가 드라이어드라고 말하자 트라이크는 덜컥 믿어 버렸다.
“설마, 진짜 그런 존재가 있는 겁니까? 이 나무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요?”
비앙카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문디 자슥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가지고…. 니 정령 본 적은 있나?”
비앙카의 말에 트라이크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비앙카님이 드라이어드라고 말씀 하셨지 않습니까?”
“쯧쯧, 그게 오해라 카이. 드라이어드는 원래….”
그리고 비앙카의 이어지는 설명에 의하면 드라이어드는 정령이 아니라 실제 남대륙 오지에 존재하는 기생목의 일종이라고 했다.
살아 있는 생물을 유혹하는 페르몬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그 생물의 정기를 흡수하는 성질도 가지고 있다.
워낙 희귀한 나무이긴 하지만 정령은 아니고 엄연하게 살아 있는 식물이라고 했다.
생명령이 워낙 강해서 가지를 잘라 좌도 수십 년은 죽지 않고 주변에 정기를 흡수할 생명이 있으면 그대로 살아남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드라이어드 원목은 비앙카가 수집해 둔 물건이었다.
마법사란 원래 세상에서 오만가지 물건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습성이 있어서 이런 물건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군요. 그래서 이 흉흉한 나무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트라이크의 물음에 비앙카는 혀를 차며 말했다.
“니 혹시 엘프라고 아나?”
“엘프? 그 전설의 종족 말입니까?”
트라이크는 깜짝 놀랐다.
“그래. 남대륙에는 아주 드물지만 실존하기도 하는 종족이데이.”
“본 적도 있습니까?”
“어렸을 때 딱 한 번.”
“오오오….”
전설의 종족인 엘프가 실존한다는 말에 트라이크는 꽤 감격한 듯했다.
“엘프 하면 뭐가 딱 생각나노?”
“그거야 당연히 미모죠.”
“…….”
“신이 만들면서 미의 종족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엘프.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
“혹시 아는 여성 엘프 있으세요?”
있으면 지금 당장 소개시켜 달라고 할 것 같은 트라이크를 비앙카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인간아. 인간아….”
“아, 왜 그러십니까? 남자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여성을…. 윽.”
“시끄럽다!”
비앙카는 자기 완드를 휘둘러서 트라이크의 텅 빈 머리를 응징했다.
“아…. 왜 때립니까?”
“됐고, 니는 말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라.”
그리고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고 설명을 이어갔다.
“엘프하면 활이데이. 가들은 인간 궁수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궁술이 뛰어나데이.”
“호오…. 저보다 더 좋답니까?”
“그건 내도 모르지. 근데 확실한 것은 가들은 경지에 오르면 활 가지고도 오러를 뿜어낸다 안 카나.”
“…….”
호승심이 드러났던 트라이크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고민을 이미 해결한 선례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그곳에서 세비안 자작이 말했다.
“주군, 손님이 왔습니다.”
세비안 자작이 주군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당연히 이 세상에 한 명밖에 없다.
지크프리트의 예상과 달리 밀턴이 본대에 있었던 것이다.
“병력 규모는?”
“총 2만, 사령관은 네이든이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밀턴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듣보잡이네.”
“예?”
“아니, 아무것도. 그보다 계획이 적중한 모양이군. 세비안.”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웃으며 말했다.
“미끼가 팔팔했기 때문이죠.”
“쿡….”
밀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크게 외치며 전군에 명령했다.
“전군! 손님을 맞이한다. 겁 없이 달려드는 공화국군에게 본때를 보여준다!”
“옛!”
“전군. 반전! 적을 섬멸하라!”
“와아아아아아아!!!”
밀턴의 명령 한마디에 후퇴 중이던 연합군이 갑자기 뒤로 반전을 했다.
그러자 뒤에서 기습을 위해서 진군 중이던 공화국군은 크게 당황했다.
“어… 어찌 이렇게 빠르게?”
군이 행군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선두에 서야 하는 병과와 후미를 지켜야 하는 병과가 다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적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사전에 준비가 되었다는 건가? 이건 설마?”
지크프리트에게 명령을 받고 자신만만하게 출전한 네이든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건 후퇴 병력이 아니다.
후퇴를 가장해서 적을 유인하고 있는 병력이었다.
그 증거로 가장 선두에서 달리는 기사단의 최전선에는….
“내가 제롬 테이커다!”
밀턴의 듬직한 오른팔, 제롬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스터를 선두에 세운 기사단의 돌격은 돌입하는 순간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발휘하며 적의 전열을 부숴버렸다.
콰쾅! 콰직! 쾅!
“으아악!”
“커어억….”
적의 추격을 위해서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던 경기병을 선두에 세운 공화국군으로서는 재앙이었다.
이것이 마스터가 전쟁터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거기다 뒤를 이어서 따르는 기사단이 날뛰자 공화국군은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다.
“보병 전속력으로!”
“공화국 새끼들을 열렬히 환영해 주자!”
“우오오오오오!!”
그렇게 엉망이 된 전열에 들이닥치는 보병.
그리고 그 뒤를 받쳐주는 궁수대의 엄호까지….
이미 군의 기능을 상실한 공화국군은 적수가 아니라 유린의 대상일 뿐이었다.
직접 참여할 필요도 없이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밀턴이 말했다.
“적의 병력 규모가 얼마라고 했지?”
“2만으로 추정됩니다.”
그 보고에 밀턴은 흐뭇한 표정을 하고 세비안 자작에게 말했다.
“확실히 제대로 한 방 먹였군. 지크프리트 녀석 빡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걸?”
빡친다는 표현은 후작위의 귀족이 쓰기에 살짝 상스럽다는 지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적의 빡침은 아군의 행복이니까.
“감사합니다.”
세비안 자작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세비안 자작의 진심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이전에 커다란 실패를 한 자신이었지만 그런 자신을 밀턴은 믿어 주었다.
그 실패로 인해 주군인 밀턴에게 목숨의 위기까지 겪게 했는데 말이다.
자신이 밀턴의 입장이라면 아마도 자신을 다시 믿어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밀턴은 당연하다는 듯이 세비안 자작을 신뢰했다.
한 번의 패배로 세비안 자작의 가치를 의심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밀턴의 신뢰가 세비안 자작에게 있어서는 눈물이 나올 만큼 감사한 일이었다.
자신을 향한 밀턴의 신뢰가 꺼지지 않았기에 이 작전도 가능했던 것이다.
‘덤으로 볼로나 후작의 공명심도 한몫하긴 했지만 말이야.’
세비안 자작은 피식 웃었다.
세비안 자작의 작전을 처음부터 살펴보면 이렇다.
우선 후퇴하는 척을 하며 지크프리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후퇴하는 적을 추격할 기회라는 선택권을 말이다.
보통은 여기에 함정을 설치하고 그 함정에 적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겠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한층 더 공을 들였다.
약 1만의 기마대를 추려서 적의 본토를 우회 공략한다, 라는 작전을 입안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작전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였다.
당초 계획대로 코브르크 공화국의 곡창 지대를 유린하거나 수도를 공략할 수 있다면 북부 전선의 패배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커다란 공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볼로나 후작은 그 작전에 지원을 했다.
[약속하지 않았소? 나에게 지휘권을 주고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고?!]
그리고 볼로나 후작뿐만 아니라 한 명이 더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났다.
[잠시만요. 그런 약속을 받은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포레스트 후작님! 저와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겠죠?]
그게 바로 바이올렛 공주였다.
공적이 목이 마른 그녀는 이 임무를 자신이 맡고 싶었고 진심으로 볼로나 후작과 맞서며 대립했다.
그만큼 이 작전을 성공 가능성이 컸고, 성공했을 때의 대가는 더 컸다.
세비안 자작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뭐가 고맙냐 하면….
‘바이올렛 공주가 딱 좋은 바람잡이 역할을 해 주는군. 진심인 만큼 효과가 아주 좋아.’
그렇다.
애당초 이 작전은 그럴듯해 보였지만 미끼였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좋은 작전이 맞았다.
시도했을 때의 성공 가능성과 지금 전황을 봤을 때 성공만 한다면 적의 급소를 한 방에 후벼 팔 수 있었다.
다만, 역설하자면 그렇기에 이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
‘지크프리트라면 아마 이 부분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이다.’
더 이상 세비안 자작은 지크프리트를 얕보지 않았다.
자신과 대등, 아니 그 이상의 전략가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하고 있었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건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에도 모두 들어 있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작전을 짜는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우회 기동을 예상한다면 당연히 요격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공화국군의 4만 병력은 반드시 분열할 테고, 후퇴하는 아군을 공격하는 병력은 적어진다.
매복이나 별다른 함정 없이 그저 후퇴 중인 대열을 약간 손봐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받아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덤으로 지크프리트까지 그쪽으로 유인할 수 있다면 최고였다.
세비안 자작은 밀턴에게 귀띔을 했고 밀턴은 볼로나 후작에게 말했다.
[이 작전은 볼로나 후작님에게 맡기겠소.]
[포레스트 후작님!?]
[현명한 결정이오.]
바이올렛 공주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고 볼로나 후작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그리고 제롬에게 후작의 경호를 맡기겠소.]
밀턴의 이어진 말에 볼로나 후작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이제 제롬이 마스터라는 것은 숨겨진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군에 마스터가 더해진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문제는 그 마스터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자신이 성공적으로 적의 후방을 공격한다고 해도 제롬의 존재감 때문에 공적이 적게 평가될 우려가 있었다.
그런 볼로나 후작의 불안감을 알고 있는 세비안 자작이 말했다.
[주군, 테이커 경이라는 억지력이 없으면 적의 본대와의 전투가 힘들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자 볼로나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이번 작전은 내 휘하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러니 테이커 경의 지원은 필요 없소.]
[하지만 적진을 가로지르는 시점에서 적과 조우할 수도 있지 않소? 그러자면 역시….]
[그럼, 작전의 중간 지점까지만 테이커 경을 움직이게 하고 이탈하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세비안 자작의 말에 볼로나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좋을 듯하오. 아니, 그게 최선이오.]
볼로나 후작은 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무척 크게 봤다.
당연히 성공할 작전에 괜한 짐을 얹어서 공적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볼로나 후작의 말에 밀턴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바이올렛 공주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시오.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비안 자작의 작전은 시작된 것이다.
우회 병력이 지크프리트에게 예상될 것이라고 확신을 했다.
그리고 그 우회 병력에 제롬 테이커를 포함시켜 놓으면 그것 역시 지크프리트가 반드시 파악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책사란 때때로 적의 능력을 신뢰해야 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세계는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세비안 자작의 이 작전은 보통의 지휘관이 상대라면 괜히 마스터를 밖으로 빼돌려서 전력을 낭비하는 것이 되었겠지만 상대가 지크프리트이기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주군인 밀턴이 지크프리트를 의식하는 만큼, 지크프리트 역시 밀턴을 의식하고 있다.
제롬 테이커가 밀턴의 측근이자 중요 전력이라는 것을 적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제롬 테이커라는 거물을 미끼로 써서 지크프리트를 유인할 수 있다.
그렇게 확신을 하고 작전을 입안했다.
그리고 지금.
세비안 자작의 작전은 모두 맞아떨어졌다.
지크프리트를 자기 생각대로 움직인 세비안 자작에게 눈앞에 있는 2만의 병력은 고마운 먹잇감으로 보일 뿐이었다.
볼로나 후작을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타국의 귀족이며 같은 전장에서 합을 맞추기에는 피곤한 인물이었다.
어쨌든 본인이 의욕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미끼가 된 것이다.
“여기서 저 병력을 잡아먹으면 지크프리트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아무리 명전략가라고 해도 병력의 차이가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그래. 그러자면 여기서 전과를 최대한 확대해야겠군.”
그렇게 말한 밀턴은 뒤편을 슬며시 보고 세비안 자작에게 말했다.
“그럼 슬슬 풀까?”
“시기상으로는…. 예. 괜찮을 듯합니다.”
“이르지는 않을까?”
“어차피 제어하기 힘드니까요. 지금처럼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판이 깔렸을 때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군.”
밀턴과 세비안 자작의 말만 들으면 꼭 미친개의 목줄을 풀어도 되는가 마는가에 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럼 슬슬 풀지. 안 그래도 뒤통수가 따가워.”
“예. 알겠습니다.”
밀턴의 허락을 받은 세비안 자작은 뒤편에 전령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전군 돌격!”
“공주님을 따라라!”
“절대 뒤처지지 마라!”
“와아아아!!”
바이올렛 공주가 플로렌스 공국의 군사를 이끌고 미친 듯이 적에게 달려갔다.
“괜찮겠지?”
“예. 뭐…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여전히 실전에서는 좀처럼 제어가 되지 않는 바이올렛 공주였다.
하지만 그녀가 나선 이상 적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끄는 군은 추격에 그야말로 특화되어 있었고, 플로렌스 공주의 끈질긴 집념은 피 냄새를 맡은 늑대처럼 끈질기고 집요했다.
“적어도 반 이상은 확실하게 잡아먹겠군.”
“그렇겠죠.”
여기서 병력을 크게 잃으면 앞으로 지크프리트가 동부 전선에서의 활동이 상당히 위축될 것이다.
“이걸로 지크프리트에게 확실히 한 방 먹인 셈이군.”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잠시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직입니다.”
“아직이라고?”
“예. 제가 주군에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크프리트에게 한 방 먹여 주겠다고.”
“아직 뭐가 더 있다는 건가?”
밀턴이 말에 세비안 자작은 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켜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