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32화 (132/257)

제132화

후퇴 중이던 연합군의 본대.

그곳에서 세비안 자작이 말했다.

“주군, 손님이 왔습니다.”

세비안 자작이 주군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당연히 이 세상에 한 명밖에 없다.

지크프리트의 예상과 달리 밀턴이 본대에 있었던 것이다.

“병력 규모는?”

“총 2만, 사령관은 네이든이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밀턴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듣보잡이네.”

“예?”

“아니, 아무것도. 그보다 계획이 적중한 모양이군. 세비안.”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웃으며 말했다.

“미끼가 팔팔했기 때문이죠.”

“쿡….”

밀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크게 외치며 전군에 명령했다.

“전군! 손님을 맞이한다. 겁 없이 달려드는 공화국군에게 본때를 보여준다!”

“옛!”

“전군. 반전! 적을 섬멸하라!”

“와아아아아아아!!!”

밀턴의 명령 한마디에 후퇴 중이던 연합군이 갑자기 뒤로 반전을 했다.

그러자 뒤에서 기습을 위해서 진군 중이던 공화국군은 크게 당황했다.

“어… 어찌 이렇게 빠르게?”

군이 행군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선두에 서야 하는 병과와 후미를 지켜야 하는 병과가 다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적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사전에 준비가 되었다는 건가? 이건 설마?”

지크프리트에게 명령을 받고 자신만만하게 출전한 네이든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건 후퇴 병력이 아니다.

후퇴를 가장해서 적을 유인하고 있는 병력이었다.

그 증거로 가장 선두에서 달리는 기사단의 최전선에는….

“내가 제롬 테이커다!”

밀턴의 듬직한 오른팔, 제롬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스터를 선두에 세운 기사단의 돌격은 돌입하는 순간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발휘하며 적의 전열을 부숴버렸다.

콰쾅! 콰직! 쾅!

“으아악!”

“커어억….”

적의 추격을 위해서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던 경기병을 선두에 세운 공화국군으로서는 재앙이었다.

이것이 마스터가 전쟁터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거기다 뒤를 이어서 따르는 기사단이 날뛰자 공화국군은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다.

“보병 전속력으로!”

“공화국 새끼들을 열렬히 환영해 주자!”

“우오오오오오!!”

그렇게 엉망이 된 전열에 들이닥치는 보병.

그리고 그 뒤를 받쳐주는 궁수대의 엄호까지….

이미 군의 기능을 상실한 공화국군은 적수가 아니라 유린의 대상일 뿐이었다.

직접 참여할 필요도 없이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밀턴이 말했다.

“적의 병력 규모가 얼마라고 했지?”

“2만으로 추정됩니다.”

그 보고에 밀턴은 흐뭇한 표정을 하고 세비안 자작에게 말했다.

“확실히 제대로 한 방 먹였군. 지크프리트 녀석 빡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걸?”

빡친다는 표현은 후작위의 귀족이 쓰기에 살짝 상스럽다는 지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적의 빡침은 아군의 행복이니까.

“감사합니다.”

세비안 자작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세비안 자작의 진심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이전에 커다란 실패를 한 자신이었지만 그런 자신을 밀턴은 믿어 주었다.

그 실패로 인해 주군인 밀턴에게 목숨의 위기까지 겪게 했는데 말이다.

자신이 밀턴의 입장이라면 아마도 자신을 다시 믿어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밀턴은 당연하다는 듯이 세비안 자작을 신뢰했다.

한 번의 패배로 세비안 자작의 가치를 의심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밀턴의 신뢰가 세비안 자작에게 있어서는 눈물이 나올 만큼 감사한 일이었다.

자신을 향한 밀턴의 신뢰가 꺼지지 않았기에 이 작전도 가능했던 것이다.

‘덤으로 볼로나 후작의 공명심도 한몫하긴 했지만 말이야.’

세비안 자작은 피식 웃었다.

세비안 자작의 작전을 처음부터 살펴보면 이렇다.

우선 후퇴하는 척을 하며 지크프리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후퇴하는 적을 추격할 기회라는 선택권을 말이다.

보통은 여기에 함정을 설치하고 그 함정에 적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겠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한층 더 공을 들였다.

약 1만의 기마대를 추려서 적의 본토를 우회 공략한다, 라는 작전을 입안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작전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였다.

당초 계획대로 코브르크 공화국의 곡창 지대를 유린하거나 수도를 공략할 수 있다면 북부 전선의 패배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커다란 공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볼로나 후작은 그 작전에 지원을 했다.

[약속하지 않았소? 나에게 지휘권을 주고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고?!]

그리고 볼로나 후작뿐만 아니라 한 명이 더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났다.

[잠시만요. 그런 약속을 받은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포레스트 후작님! 저와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겠죠?]

그게 바로 바이올렛 공주였다.

공적이 목이 마른 그녀는 이 임무를 자신이 맡고 싶었고 진심으로 볼로나 후작과 맞서며 대립했다.

그만큼 이 작전을 성공 가능성이 컸고, 성공했을 때의 대가는 더 컸다.

세비안 자작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뭐가 고맙냐 하면….

‘바이올렛 공주가 딱 좋은 바람잡이 역할을 해 주는군. 진심인 만큼 효과가 아주 좋아.’

그렇다.

애당초 이 작전은 그럴듯해 보였지만 미끼였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좋은 작전이 맞았다.

시도했을 때의 성공 가능성과 지금 전황을 봤을 때 성공만 한다면 적의 급소를 한 방에 후벼 팔 수 있었다.

다만, 역설하자면 그렇기에 이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

‘지크프리트라면 아마 이 부분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이다.’

더 이상 세비안 자작은 지크프리트를 얕보지 않았다.

자신과 대등, 아니 그 이상의 전략가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하고 있었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건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에도 모두 들어 있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작전을 짜는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우회 기동을 예상한다면 당연히 요격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공화국군의 4만 병력은 반드시 분열할 테고, 후퇴하는 아군을 공격하는 병력은 적어진다.

매복이나 별다른 함정 없이 그저 후퇴 중인 대열을 약간 손봐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받아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덤으로 지크프리트까지 그쪽으로 유인할 수 있다면 최고였다.

세비안 자작은 밀턴에게 귀띔을 했고 밀턴은 볼로나 후작에게 말했다.

[이 작전은 볼로나 후작님에게 맡기겠소.]

[포레스트 후작님!?]

[현명한 결정이오.]

바이올렛 공주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고 볼로나 후작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그리고 제롬에게 후작의 경호를 맡기겠소.]

밀턴의 이어진 말에 볼로나 후작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이제 제롬이 마스터라는 것은 숨겨진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군에 마스터가 더해진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문제는 그 마스터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자신이 성공적으로 적의 후방을 공격한다고 해도 제롬의 존재감 때문에 공적이 적게 평가될 우려가 있었다.

그런 볼로나 후작의 불안감을 알고 있는 세비안 자작이 말했다.

[주군, 테이커 경이라는 억지력이 없으면 적의 본대와의 전투가 힘들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자 볼로나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이번 작전은 내 휘하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러니 테이커 경의 지원은 필요 없소.]

[하지만 적진을 가로지르는 시점에서 적과 조우할 수도 있지 않소? 그러자면 역시….]

[그럼, 작전의 중간 지점까지만 테이커 경을 움직이게 하고 이탈하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세비안 자작의 말에 볼로나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좋을 듯하오. 아니, 그게 최선이오.]

볼로나 후작은 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무척 크게 봤다.

당연히 성공할 작전에 괜한 짐을 얹어서 공적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볼로나 후작의 말에 밀턴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바이올렛 공주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시오.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비안 자작의 작전은 시작된 것이다.

우회 병력이 지크프리트에게 예상될 것이라고 확신을 했다.

그리고 그 우회 병력에 제롬 테이커를 포함시켜 놓으면 그것 역시 지크프리트가 반드시 파악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책사란 때때로 적의 능력을 신뢰해야 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세계는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세비안 자작의 이 작전은 보통의 지휘관이 상대라면 괜히 마스터를 밖으로 빼돌려서 전력을 낭비하는 것이 되었겠지만 상대가 지크프리트이기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주군인 밀턴이 지크프리트를 의식하는 만큼, 지크프리트 역시 밀턴을 의식하고 있다.

제롬 테이커가 밀턴의 측근이자 중요 전력이라는 것을 적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제롬 테이커라는 거물을 미끼로 써서 지크프리트를 유인할 수 있다.

그렇게 확신을 하고 작전을 입안했다.

그리고 지금.

세비안 자작의 작전은 모두 맞아떨어졌다.

지크프리트를 자기 생각대로 움직인 세비안 자작에게 눈앞에 있는 2만의 병력은 고마운 먹잇감으로 보일 뿐이었다.

볼로나 후작을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타국의 귀족이며 같은 전장에서 합을 맞추기에는 피곤한 인물이었다.

어쨌든 본인이 의욕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미끼가 된 것이다.

“여기서 저 병력을 잡아먹으면 지크프리트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아무리 명전략가라고 해도 병력의 차이가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그래. 그러자면 여기서 전과를 최대한 확대해야겠군.”

그렇게 말한 밀턴은 뒤편을 슬며시 보고 세비안 자작에게 말했다.

“그럼 슬슬 풀까?”

“시기상으로는…. 예. 괜찮을 듯합니다.”

“이르지는 않을까?”

“어차피 제어하기 힘드니까요. 지금처럼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판이 깔렸을 때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군.”

밀턴과 세비안 자작의 말만 들으면 꼭 미친개의 목줄을 풀어도 되는가 마는가에 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럼 슬슬 풀지. 안 그래도 뒤통수가 따가워.”

“예. 알겠습니다.”

밀턴의 허락을 받은 세비안 자작은 뒤편에 전령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전군 돌격!”

“공주님을 따라라!”

“절대 뒤처지지 마라!”

“와아아아!!”

바이올렛 공주가 플로렌스 공국의 군사를 이끌고 미친 듯이 적에게 달려갔다.

“괜찮겠지?”

“예. 뭐…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여전히 실전에서는 좀처럼 제어가 되지 않는 바이올렛 공주였다.

하지만 그녀가 나선 이상 적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끄는 군은 추격에 그야말로 특화되어 있었고, 플로렌스 공주의 끈질긴 집념은 피 냄새를 맡은 늑대처럼 끈질기고 집요했다.

“적어도 반 이상은 확실하게 잡아먹겠군.”

“그렇겠죠.”

여기서 병력을 크게 잃으면 앞으로 지크프리트가 동부 전선에서의 활동이 상당히 위축될 것이다.

“이걸로 지크프리트에게 확실히 한 방 먹인 셈이군.”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잠시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직입니다.”

“아직이라고?”

“예. 제가 주군에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크프리트에게 한 방 먹여 주겠다고.”

“아직 뭐가 더 있다는 건가?”

밀턴이 말에 세비안 자작은 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켜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