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밀턴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세비안 자작의 입으로 들으니 무게가 크게 다가왔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멸망.
이것이 뜻하는 것은 그냥 남의 나라 하나가 깃발을 내린다는 뜻이 아니다.
절대, 그렇게 가벼운 의미가 아니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북부의 공화국을 막아주는 방패였고, 그 방패가 있었기에 다른 왕국들은 비교적 안온한 시기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런 스트라부스 왕국이 공화국에 먹혀 버리면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공화국에 대비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증강시킬 테고, 그렇게 증강시킨 군사력은 결국 전쟁터로 향할 것이다.
‘결국, 혼돈의 시대가 도래하는 건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밀턴은 이번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여기서 공화국을 확실하게 꺾어놓고 사상의 대립 시대가 만들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보여준 미적지근한 반응과 스트라부스 왕국의 패배로 인해서 공화국을 꺾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실질적으로 밀턴에게 있어서 이번 원정은 실패한 것이다.
“XX X 같은 새끼들….”
밀턴의 입에서 짜증이 잔뜩 묻어난 욕설이 나왔다.
“누구를 향해서 그렇게 말하시는 겁니까?”
“전부 다.”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은 다른 왕국과 제국, 거기다 멍청하게 패배한 스트라부스 왕국, 하필 자신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버린 공화국의 지크프리트 등등….
그냥 다 짜증나고 싫은 밀턴이었다.
“후우우…. 그럼 세비안.”
“예. 말씀하시죠.”
“지금부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가장 좋은 것은 세 번째 안배…. 릭 경과 토미 경이 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해야겠죠. 그 수가 통하느냐? 마느냐? 여기에 따라서 우리도 선택지가 나눠집니다.”
“만약 둘이 만약 임무를 성공한다면?”
“그때는 두 가지 선택권을 쥐어야죠.”
“말해 보게.”
“여기저기 금이 가고 갈라졌다고 해도 방패가 없는 것보다는 낫죠. 스트라부스 왕국을 살려내는 겁니다.”
“가능한가?”
“세 번째 안배가 성공만 한다면 말이죠.”
“흐음…. 또 하나의 선택지는?”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레스터 왕국이 북부의 패권을 잡는 겁니다.”
“…….”
대답을 하지 않는 밀턴에게 세비안 자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선택은 주군의 몫입니다.”
‘제일 골치 아픈 걸 나한테 떠넘기다니.’
피곤함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 밀턴이었다.
그런 밀턴에게 세비안 자작이 말했다.
“하지만 주군. 세 번째 안배와 별개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세 번째 안배가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지크프리트의 발을 여기에 묶어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결국 놈과 싸우긴 싸워야 한다는 말이군.”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드시 한 방 먹여 보이겠습니다.”
“가능하겠나?”
“맡겨 주십시오.”
대답하는 세비안 자작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지크프리트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북부 전선에서 미리 준비해둔 안배가 제대로 먹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북부 전선이 뚫린 이상 공화국군은 순조롭게 스트라부스 왕국을 점령해 갈 것이다.
자신이 없다고 해도 북부 전선의 참모부에는 데이비드가 있다.
데이비드는 지크프리트가 인정하는 전략가로 세상에는 그 능력을 숨기고 있지만 충분히 스트라부스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 수 있는 책사다.
그리고 공화국군이 스트라부스 왕국을 압박하면 할수록 동부 전선의 상황도 유리해질 것이다.
아무리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후방이 소란스러우면 보급에 차질이 생긴다.
그리고 보급으로 인한 문제점은 대군일수록 더 빠르게 드러나는 법이다.
이대로 대치하고 시간만 끌면 적은 알아서 자멸하게 되어 있다.
물론 지크프리트는 밀턴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어떤 행동을 하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역시 후퇴할 텐데 말이야.’
기껏 점령한 코브르크 공화국의 성과 요새를 포기한다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급이 무너지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전선의 유지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우책이다.
아무리 아깝다고 해도 대와 소의 구분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면 후퇴를 할 것이다.
후퇴해서 스트라부스 왕국 본토의 수비에 주력하며 공화국군에 대응하는 것이 옳다.
물론 그렇게 후퇴하려고 하면 지크프리트가 후방을 공격하겠지만, 이 상황에서는 후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밀턴 포레스트가 그런 선택을 할까?’
지크프리트의 안에서 최근 밀턴의 평가는 더 높게 올라갔다.
이전의 전쟁에서는 자신에게 이겼지만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때 작정하고 상부의 명령만 신경 쓰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리트인크 요새의 전투에서 지크프리트는 밀턴을 이겼다.
하지만 그 전투로 인해서 오히려 더 요주의 인물로 경계하게 되었다.
예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번에 지크프리트는 작정하고 밀턴을 잡아내기 위해서 큰 작전을 펼쳤다.
리트인크 성이라는 중요 거점을 통째로 미끼로 쓰면서 대범한 작전을 펼쳐서 밀턴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결과는 실패였다.
비록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당초 목표였던 밀턴을 잡지는 못했다.
그 원인은 제롬이라는 기사가 실력 이상의 분투를 보여준 것과 후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플로렌스 공국의 기습 때문이었다.
특히 제롬이라는 기사가 마스터일 것이라고는 지크프리트 역시 상상도 못했다.
‘절대 전쟁터에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서 경지에 오르거나 한 그런 것이 아니었어. 진작 올랐지만 대외적으로 철저하게 숨겨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뻔하다.
바로 자신을 경계해서였다.
첫 전투 이후 밀턴 포레스트는 지크프리트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서 꾸준하게 칼을 갈아왔던 것이다.
이번 전투로 지크프리트는 밀턴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공화국 내부에서도 자신을 운 좋아서 벼락출세한 인간으로 평가하는 인간들이 대부분인데 전쟁에서 딱 한 번 상대했던 밀턴 포레스트가 자신을 훨씬 더 경계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상부에서 찍히는 한이 있더라도 죽였어야 했는데….’
지크프리트는 처음의 전투에서 밀턴을 죽이지 않은 선택을 크게 후회했다.
그때는 손으로 뽑을 수 있는 싹이었는데 이제는 도끼로 찍어도 한 번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굵은 나무가 된 것이다.
‘이놈은 뭔가 상식 이외의 수단을 동원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크프리트는 전선의 지도를 살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혹시라도 적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무엇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그때 전령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타났다.
“지크프리트 비서관님. 급보입니다.”
“뭐지?”
“적이 점령한 벨스 성과 호르니 성을 포기하고 후퇴하고 있습니다.”
‘역시 후퇴인가?’
지크프리트는 적이 예상한 움직임을 보이자 미간을 찌푸렸다.
“적의 움직임에 다른 특이 사항은 없는가?”
“예? 그…. 아직 추가 보고된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정찰망을 최대한 가동해서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라.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고 해도 절대 놓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서둘러! 정보는 느긋하게 모아서는 가치가 없다!”
“옛!”
지크프리트의 추상같은 명령을 받은 전령은 빠르게 튀어 나갔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지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분명 뭔가 있어. 없을 리가 없어.”
정예군이라는 것은 그저 강하기만 한 군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상관의 명령에 기민하게 반응해서 빠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정예라는 증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공화국군의 명령 체계는 대단했다.
소위 안 되면 되게 하라, 라는 말이 유행하는 공화국군은 지크프리트의 지시가 있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정찰 정보를 갱신해 왔다.
“적의 퇴각로와 병력 규모와 배치. 그리고 후미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기마대의 움직임과 본대의 이동 경로입니다.”
전령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그리고 바로 보고서의 내용을 전략 지도에 표시하면서 생각에 집중했다.
“…·미를 생각보다 많이 남겼군.”
지크프리트의 말에 반대편에 있던 작전 참모가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군의 추적을 경계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아. 특히 기마대의 비율이 높다. 왜지?”
“그건….”
“지금 스트라부스 본국의 상황은 몹시 위태롭다. 그걸 조금이라도 빠르게 진정시키려면 후퇴에 속도를 올려야 해. 다소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게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에 병력을 집중시키다니? 왜지? 무엇 때문이지?”
“…….”
지크프리트가 의문을 가질 때마다 뭐라고 대답을 하려 한 참모였지만 정작 말을 할 틈도 없었다.
지금 지크프리트는 다른 사람과 문답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문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화국군의 사령관 지크프리트가 연합군을 이끄는 지크프리트가 되어서 자신에게 자문자답을 하고 있었다.
체스는 본래 두 명이서 하는 게임이다.
하지만 집중력 높은 고수라면 혼자서도 체스를 둘 수 있다고 한다.
한 수 한 수를 둘 때마다 흑과 백의 입장을 바꿔 가며 최선을 다해서 생각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지크프리트라는 남자의 전략은 그것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게 지도에 집중하던 지크프리트의 눈이 반짝였다.
“여기 이 지점.”
“예?”
“그리고 여기와 여기.”
지크프리트는 지도상에 세 점을 지정하며 말했다.
“당장 가장 빠른 기마대를 조직해서 이곳으로 정찰을 보내라.”
“옛. 알겠습니다.”
전령이 명령을 받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앞에 있는 참모가 물었다.
“그곳으로 정찰대를 파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적이 퇴각하기로 했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곳으로 보입니다만?”
“퇴각을 위해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저 세 곳은 적이 우리 군을 우회해서 역습을 시도할 때 반드시 지나가야 할 지점이다.”
“아….”
참모는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밀턴 포레스트는 이전의 전쟁에서도 우리나라의 수도를 위협했었지?’
지크프리트가 레스터 왕국을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을 때 밀턴은 대범하게 힐데스 공화국의 수도를 위협했다.
덕분에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했고 레스터 왕국도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때와 같은 행동을 안 한다는 보장이 없어.’
병력을 후퇴시키는 척하면서 별동대를 조직해서 적을 우회.
그대로 코브르크 공화국의 수도나 곡창 지대를 공격하는 것.
밀턴 포레스트라면 충분히 할 법한 작전이었다.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것도 적에게 들키지 않았을 때나 효과가 있는 작전이지.’
작전 참모는 이 상황에서 이런 대범한 수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밀턴 포레스트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 대단한 인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괴물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었다.
‘지크프리트님이 계시다면 문제는 없다. 사실 이런 분이 총통이 되었다면 진작 공화국이 대륙을 통일했을지 모르는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는 작전 참모의 안에서는 존경을 넘어서는 어떤 감정이 생겨났다.
사실 그런 감정은 지크프리트와 함께 전쟁에서 활동을 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가지게 되는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