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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27화 (127/257)

제127화

다음날.

유하네스 후작을 비롯한 4인의 연합국 귀족들은 참모부에 찾아가서 자신들이 데리고 온 병사들에 대한 지휘권 반환을 요구했다.

물론 참모부는 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하네스 후작이 슬며시 내민 편지 한 장이 상황을 뒤집었다.

“이건…?”

편지를 확인한 셴버 백작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유하네스 후작은 입꼬리를 진하게 올리며 그런 셴버 백작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그분의 추천장이오.”

“…….”

셴버 백작은 추천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혹시 위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 소인배들이 간 크게도 그분의 이름을 가짜로 팔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믿기지를 않았다.

‘도대체 그분은 무슨 생각으로….’

셴버 백작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추천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상대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것이다.

“지휘권을 돌려주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셴버 백작은 우선 유하네스 후작의 의도를 알아야 했다.

이들에게서 지휘권을 빼앗은 것은 국왕의 명령도 있었지만 실제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실무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다시 군사를 돌려받고 전쟁터에서 무모하게 설치면 방해일 뿐이다.

그런 셴버 백작의 의도를 읽은 유하네스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도 이제 전쟁터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조금은 알 것 같소.”

“호오…. 뭘 알았다는 거요?”

“일단, 경험이 없는 우리가 갑자기 지휘권을 쥐고 전쟁터에서 활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자각 정도는 생겼소.”

“흐음….”

셴버 백작은 살짝 눈을 치켜떴다.

상대의 입에서 거의 처음으로 맞는 말이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유하네스 후작은 말을 이었다.

“군사를 돌려받고 난 후에는 후방에서 보급 부대로 활동하겠소. 본국의 명령이 있기에 이 전쟁의 중간에서 발을 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전쟁에 계속 참여는 해야지. 그리고 더 이상 데리고 온 병사들의 피해도 피하고 싶소.”

“…….”

‘놀랍군.’

셴버 백작은 꽤 놀랐다.

무엇이 놀랐냐 하면….

‘모두 맞는 말이야.’

지금 이들이 지휘권을 주장하면서 전력을 보전하는 동시에 이 전쟁에 끝까지 달라붙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유하네스 후작은 그걸 가지고 온 것이다.

만약 유하네스 후작이 군을 돌려받으면 전방으로 가서 군사를 지휘하며 큰 공을 세우겠다, 같은 답 없는 말을 했다면 지휘권을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분의 추천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셴버 백작은 이 전쟁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유하네스 후작의 말대로라면 지휘권을 돌려준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다.

어차피 보급에 들어가는 인력이 줄어들기만 해도 전쟁에 도움이 된다.

‘어쩌면 그분이 추천장을 주면서 이렇게 하라고 귀띔을 했는지도 모르겠군.’

거부할 이유가 사라지자 셴버 백작은 결단을 내렸다.

안 그래도 이 인간들이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징징거리는 꼴은 제법 스트레스였다.

“알겠소. 지휘권을 돌려주겠소. 하지만 동시에 보급 부대에서만 활동한다는 서약을 해줘야겠소.”

“얼마든지 하겠소.”

그렇게 해서 유하네스 후작과 그 일행은 드디어 자신들이 데리고 온 군사들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비록 그 숫자는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병사를 돌려받고 후방의 보급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유하네스 후작의 앞에 다시 한번 클라우디아가 나타났다.

다만 혼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남자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나타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리퍼드 왕국에서 온 시온 유하네스 후작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하네스 후작은 몹시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고 뒤에 있는 다른 일행도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 클라우디아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에게 아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말했죠? 잘될 거라고?”

“흐음…. 과연, 그대가 말한 대로군.”

남자는 클라우디아의 이마에 사랑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맞추고 유하네스 후작에게 말했다.

“유하네스 후작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클라우디아를 향해서 말할 때와는 다르게 지극히 차가운 목소리에 유하네스 후작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바모스 영애에게 얘기는 충분히 들었습니다.”

“좋다. 빈틈없이 잘 수행하도록. 실패는 용서치 않겠다.”

소속 국가도 다르지만 마치 직속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고압적인 명령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유하네스 후작은 거기에 일말의 거부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3만의 병력을 끌고 후방으로 물러나는 그들을 보며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이제 포석은 다 깔렸어요. 그런데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후회?”

클라우디아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 인생에 유일한 후회라면 그대를 늦게 만났다는 것이지.”

“어머….”

“걱정 마시오. 내가 반드시 그대를 행복하게 해 주겠소.”

“고마워요. 맥.”

클라우디아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와 입술을 겹쳤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4국 연합군은 전선에서 물러나서 보급 역에 충실하게 임했다.

사실 공격하는 쪽이라면 모를까?

지키고 있는 쪽에서 보급의 임무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징발된 지원 물품을 운반하는 것이 다였고, 자국의 영토 안에서 운반하는 것이라면 군대가 아니라 상회에 맡겨도 괜찮을 정도였다.

이 전쟁은 규모가 상당하니까 군에서 직접 보급 부대를 운용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임무 자체는 쉬운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쉬운 임무에 별 탈 없이 적응하는 동안 반가운(?) 소식도 한 가지 날아들었다.

승승장구하던 밀턴이 리트인크 요새를 공격하던 중에 크게 패배했다는 소식이었다.

“하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지.”

“운이 언제까지 따라주나 했소.”

“사실 이 정도면 나름 선전한 것 아니겠소? 비록 이전의 승리가 다 운이라고 해도 말이지.”

“하하하하하!”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프다가 그 땅 값이 폭락하니 행복해 하는 소인배.

딱 그 전형을 보여주는 4국 연합의 대표였다.

“놈의 실력이 드러났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 일에 집중하면 되겠군요.”

“그렇지요. 이제 그분의 연락만 온다면….”

“쉿, 조용히 합시다. 보안이 생명인 임무이니….”

“그렇군. 하지만 우리가 임무를 완수했을 때 참모부의 그 머저리가 어떤 얼굴을 할지는 몹시 궁금합니다.”

“하하하하! 화가라도 하나 고용해 놔야겠소.”

“화가? 왜 말입니까?”

“그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둬야 하지 않겠소?”

“하하하하하하.”

도대체 뭘 믿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4국 연합군의 수뇌들은 몹시 행복한 상상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약 2주 후.

4국 연합군의 수뇌에게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러자 유하네스 후작은 다른 국가의 지휘권들을 불러서 말했다.

“드디어 때가 왔소.”

“지시가 떨어진 것이오?”

“그렇소. 당장 결행하라는 말이오.”

“후후후….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도록 하죠.”

그리고 4국 연합국은 갑자기 진로 방향을 틀었다.

북부 전선의 최전방.

그 최전방을 바로 뒤에서 받치는 2차 방어 라인의 진지에 한 무리의 군대가 다가왔다.

“정지. 어디의 누구냐?”

당연히 경계를 서던 병사가 검문을 했다.

그러자 상대편에서 지휘관이 나왔다.

“후방 보급 부대다. 그리고 본인은 발랑스 왕국의 게일 디오스 백작이다.”

북부 전선의 후방을 지키던 경계병은 창을 내리며 말했다.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잠시 후에 이 진지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나타났다.

“베이커 로스만 자작입니다. 실례지만 신분과 소속을 증명해 주시겠습니까?”

“흥. 불쾌하군.”

디오스 백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참모부에서 받은 서류를 보여 주었다.

‘보급 부대는 틀림없군. 그런데 이 들이 왜 여기에….’

로스만 자작은 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서라면 여기가 아니라 중앙 사령부로 가야 합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전방에 계신 맥카시 오브라이언 공작님에게 명령을 받고 극비리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예? 오브라이언 공작님의 직속 명령이라니? 그런 지시는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극비라 하지 않았나? 공작님이 일개 자작에게 그걸 알렸어야 했다는 건가?”

“…….”

로스만 자작은 망설였다.

원칙상으로는 여기서 이 부대를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극비 명령을 받고 왔다면?

그리고 그 명령이 자신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면?

‘오브라이언 공작님의 진노가 나에게 향할지도 모른다.’

로스만 자작은 덜컥 겁이 났다.

맥카시 오브라이언.

그는 스트라부스 왕국이 자랑하는 마스터인 동시에 기사나 귀족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공작이면서도 귀족들을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몰락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서 부유한 평민보다도 더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귀족다운 교육은 고사하고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란 것이다.

그런 그가 귀족 사회에 끼어들게 된 것은 당시 리어슨 백작가라는 가문과 연을 맺게 되면서 부터였다.

당시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지금 리어슨 백작가는 멸문을 당했기에 붙이는 말이다.

리어슨 백작가에는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 기사 교육을 시키는 과정에서 연습 상대로 또래의 아이를 구했다.

그렇다고 평민의 아이를 연습 상대로 가져다 놓는 것은 귀족의 명예에 어울리지 않았기에 몰락한 가문의 아이들을 찾아봤는데….

거기에 딱 맞는 조건을 가지고 있던 게 어린 시절의 맥카시 오브라이언이었다.

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을 귀족가에 보내면서 말했다.

명예로운 일이다.

귀족 사회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은 아들을 넘겨주며 금화 다섯 닢을 받았고, 다음날에는 그 도시를 떠났다.

사실상 그는 팔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몰락 귀족의 자제일 뿐이었던 맥카시 오브라이언은 기사로서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 과녁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절대 공격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연습 상대로서 그저 상대방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만 해야 했다.

거기다 너무 완벽하게 피하거나 막으면 안 되고 어느 정도 몸으로 때우면서 공격이 성공하는 느낌도 알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몰락 귀족의 아이를 고른 것이다.

여차하면 목검에 맞아서 죽거나 다쳐도 몇 푼 쥐어주고 쫓아낼 수 있는 상대로 말이다.

그러나 리어슨 백작가는 몰랐다.

자신들의 품속으로 들인 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흉폭한 새끼 호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검술 교육의 주 대상은 어디까지나 리어슨 백작가의 귀한 외동아들이었다.

맥카시를 비롯한 연습 상대들에게는 최소한의 기본만 가르쳐 준 후에 신경을 꺼 버렸다.

그저 실감나게 얻어맞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니 그 이상 지도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다만, 그저 기본자세와 기본 검세를 몇 가지 배운 것만으로도 맥카시는 상당히 강해졌다.

어깨 너머로 리어슨 백작가의 아들이 고전하는 연속 동작들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해보면 시시할 정도로 쉽게 되었다.

왜 이렇게 쉬운 걸 수백, 수천번씩 반복해도 똑바로 못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애당초 재능의 그릇 자체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맥카시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크게 다쳐서 쫓겨났지만 맥카시는 남았다.

맥카시보다 늦게 들어온 아이들이 망가져서 버려졌지만 맥카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정타를 맞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저 슬쩍 비껴가며 맞는 능력을 익힌 것이다.

그것은 그냥 완벽하게 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를 파악하다 못해 완전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수준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리어슨 백작가에서 맥카시라는 소년에 대한 평가는 그저 무식하게 맷집 좋고 말수가 없는 어린애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와 같은 훈련 중에 리어슨 백작가의 소가주의 짜증이 폭발했다.

“젠장! 똑바로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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