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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26화 (126/257)

제126화

북부 전선.

그곳은 이 전쟁의 시발점이었고, 또한 가장 많은 병력이 부딪히고 있는 격전지였다.

처음에는 지크프리트의 뛰어난 용병술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이 다른 전선에서 지원군을 끌어모으고, 거기다 라이언 카텔 공작과 맥카시 오브라이언 공작이라는 두 명의 마스터까지 밀어 넣으면서 전황은 균형을 찾아갔다.

사실, 마스터 두 명에 군사력만 해도 15만 이상이 투입되었는데 균형을 찾는 것 정도에 그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순수하게 전력만 놓고 생각한다면 압도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상황을 점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지크프리트의 대응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거기다 공화국의 대부분의 전력이 여기에 투입된 것도 한몫을 했다.

특히 하노버슈 공화국의 마스터인 프랭크스 대장의 존재감도 대단했다.

공식적으로 공화국에 몇 없는 마스터인 그가 전장에 나와서 활발하게 활약을 한 덕분에 스트라부스 왕국의 두 마스터와도 균형의 추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장에 연합군 병력이 추가로 파병되었다.

밀턴과 헤어지고 유하네스 후작이 이끄는 지원 병력이었다.

네 개의 국가가 연합해서 만들어낸 총 병력 6만의 지원 병력이었다.

유하네스 후작은 이 정도 병력이면 팽팽한 전황에 충분한 결정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전장에 가면 충분한 대우를 받고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정치가의 사고방식이었다.

전쟁의 상황을 오로지 숫자로만 평가하는 정치가의 안이한 생각 말이다.

실제 전쟁터에서 싸우는 현장의 지휘관들은 자신들과 같은 동류가 아니면 아무리 많은 병력을 가지고 왔다고 해도 인정을 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 외국의 지원 병력에 관해서 텃새 심하기로 소문난 군사 강국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유하네스 후작이 이끌고 간 6만의 지휘 병력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참모부의 지시에 따라서 갈가리 흩어져서 배치되었다.

뭉쳐 놓으면 반항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아예 힘을 쓰지 못하도록 흩어 놓은 것이다.

당연히 유하네스 후작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참모부는 강제로 자신들의 명령을 집행했다.

정치가의 언변이 전쟁터에서 지휘관의 명령보다 우선될 리가 없었다.

유하네스 후작을 믿고 따라왔던 다른 연합국의 귀족들도 유하네스 후작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북부 전선의 참모부는 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전쟁을 수행했다.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초짜들에 제법 묵직한 군사를 지원했다.

초짜들에게 지휘권을 반강제로 빼앗은 참모부는 연합군을 막 굴리기 시작했다.

위험한 임무에 대거 투입했고, 전선의 가장 앞 열에 세웠다.

보통 지원군을 이렇게까지 험하게 다루는 일은 없지만 이번 경우에는 예외였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국왕이 은연중에 지시를 내린 것이다.

대군을 이끌고 온 레스터 왕국의 지원군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고, 겨우 생색만 낸 4개국의 군사는 최대한 험하게 부리라고 말이다.

그러니 북부 전선의 참모부는 일말의 부담감도 없이 연합군의 군사를 소모품처럼 막 굴린 것이다.

처음에 데리고 왔던 6만의 병력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절반 이하로 줄었다.

지휘권을 빼앗기고 눈 뜨고 자국의 병력이 갉아 먹히는 것을 본 지휘관들은 강력하게 참모부에 따졌다.

하지만, 참모부는 전쟁터에서 희생은 필요한 일이라며 무시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연합군의 병력을 최전선에 배치했다.

그러자 참다 참다 못한 연합군의 귀족들이 폭발했다.

“참모부의 책임자는 어디 있소!?”

거칠게 참모부를 방문한 유하네스 후작이 고성을 질렀다.

그러자 참모부의 상석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나를 찾는 것이오? 유하네스 후작.”

그 말에 유하네스 후작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그대의 작위와 이름을 밝히시오!”

짐짓 위엄을 담아서 외친 그 말에 상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북부 전선 참모부 수석 참모관, 그레이 셴버 백작이오.”

“고작 백작 주제에 지금….”

“이 전쟁에 참여한 지도 꽤 됐는데 수석 참모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

유하네스 후작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셴버 후작이 한마디를 하자 유하네스 후작은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자신이 이 전쟁에 아무런 생각 없이 임하는 멍청한 인간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실 유하네스 후작이 셴버 백작을 모르는 것은 참모부에서 이들을 노골적으로 따돌렸기 때문이다.

군사 회의에 부르지도 않고 전령을 보내서 결과만 통보하는 식으로 부렸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유하네스 후작은 강한 모독감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소.”

“그랬겠지. 아무 용무도 없이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야.”

“말을 조심….”

“용건이나 말하시오. 나는 바쁘오.”

유하네스 후작을 비롯한 연합군의 귀족들은 모독감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하지만 여기는 자국이 아니라 외국이다.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모독감을 참고 있었지만 얼굴 표정에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하네스 후작과 그 외 기타 등등을 보며 셴버 백작은 피식 웃었다.

‘하는 꼴들이 가관이군.’

보아하니 꼴에 후작이라고 백작인 자신에게 작위를 앞장세워서 뭔가 요구를 해 보려고 온 모양이다.

하지만 신경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원래 스트라부스 왕국에서는 전쟁터에서의 직함이 작위를 능가하는 것이 관례였다.

수석 참모관인 셴버 백작이 마음만 먹으면 후작이든 공작이든 벌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현실상 그런 경우는 잘 없다.

그랬다가는 전쟁이 끝나고의 후환이 상당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타국의 귀족, 심지어 국왕 공식의 미운털이 박힌 상대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쓸데없이 진상이라도 부리면 그대로 군법대로 처리할 용의가 얼마든지 있었다.

유하네스 후작의 경우 그런 자세한 군법 사항은 몰랐지만 정치판에서 다져진 눈치가 경고를 주었다.

‘함부로 나갔다가는 위험하다. 믿는 구석이 있는 이의 태도야.’

정치가로서의 촉이 왔고 유하네스 후작은 그 촉에 따라서 우선은 성질을 죽이고 침착하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데리고 온 병력이 반 이하로 줄었다는 보고를 들었소.”

“그렇군. 유감스러운 일이오.”

뻔뻔하게 대응하는 셴버 백작의 태도에 유하네스 후작을 비롯한 이들은 다시 한번 울컥했지만 유하네스 후작이 대표로 말했다.

“우리 병력의 손해가 너무 심하오. 그런데 또 우리 병사들을 최전선에 배치하다니? 너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오?”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군의 배치를 정한 것이오. 여기에 불만이 있다는 것이오?”

셴버 백작의 유들유들한 태도에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이가 나왔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나?!”

뒤편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디오스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이름이 뭐더라?”

“발랑스 왕국의 게일 디오스 백작이다!”

“별로 기억할 필요는 없겠군.”

“지금 뭐라고….”

“그보다 방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지금 참모부의 결정에 이의가 있다는 말인가?”

“이의를 넘어서 불만이 있다!”

“호오오…. 그래?”

셴버 백작은 흥미로운 미소를 짓고 상대를 바라봤다.

“이미 우리가 데리고 온 지원군이 반 이상 줄었다. 그런데 우리 병력을 여전히 최전선에 배치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셴버 백작에게 디오스 백작의 징징거림은 개가 짖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럼 어쩌라는 거지? 우리 참모부에서 내린 결정은 그것인데…. 싫으면 돌아가지 그러나?”

갈테면 가라는 식으로 말하는 셴버 백작의 말에 디오스 백작은 울컥하며 말했다.

“우리 군이 철수하면 이 전쟁이 멀쩡하게 돌아갈 것 같은가? 우리가 데리고 온 병력은 무려 6만이다.”

“이제 반으로 줄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해도….”

“딱 잘라 말해 두지.”

디오스 백작이 하는 개소리를 더 이상 들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셴버 백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참모부의 면밀한 검토로 결정한 병력 배치를 전쟁 초짜들의 징징거림에 바꿀 이유는 없다.”

노골적인 모독에 울컥한 디오스 백작이었지만 아직 셴버 백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들이 데리고 온 병력이 뭔가 대단한 구원군인 것처럼 여기나 본데? 내가 보기에는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약졸들일 뿐이오. 솔직히 축내는 군량이 아까울 정도지.”

“…….”

“갈 테면 가시오. 외부인인 그대들이 이 전쟁에서 발을 빼겠다면 우리도 굳이 붙잡을 이유는 없소. 이상이 우리 참모부의 공식적인 답변이오.”

셴버 백작의 말이 끝났을 때 디오스 백작뿐만 아니라 유하네스 후작도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상대해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어떤 요구를 해도 지휘권을 되찾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자유는 이대로 전쟁터에서 발을 빼는 것인데….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병력을 대거 잃고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후퇴하다니?’

‘그런 불명예를 떠안고 조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금 시점에서 이들이 전쟁을 이탈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병사들의 목숨과 자국의 전력을 우선적으로 보존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당연히 돌아가야겠지만 이들의 머릿속에 최우선 순위로 매겨져 있는 것은 이들 개개인의 명예였다.

원정군을 이끌고 전쟁터에 참전했는데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병사를 대거 잃고 돌아간다?

자기 경력에 그런 오점을 남기고 싶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이들은….

“알겠소. 참모부의 결정에 수긍하겠소.”

참모부의 결정에 굴복하는 것밖에 없었다.

유하네스 후작이 대표로 말을 했고 다른 이들도 거기에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렇군. 협조해 줘서 고맙소. 그럼 이만 돌아가 주시오.”

셴버 백작이 축객령을 내리자 연합군의 귀족들은 터덜터덜 자기 막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으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돌아가는 길에 엘리엇 백작이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차라리 뭐 말이오?”

디오스 백작의 날카로운 물음에 엘리엇 백작이 두리뭉실하게 말했다.

“아니 그…. 동부 전선은 상황이 좀 좋다고 하니 말이오.”

“지금 밀턴 포레스트 그 작자에게 빌붙겠다는 거요? 경은 자존심도 없소?”

“아니 누가 뭐라고 했소? 다만…. 에이, 말은 바른 말이라고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다면 나는 그쪽으로 갔을 것이오.”

“하! 이제야 본색을 밝히는군. 이 배신자!”

“배신? 누구더러 배신이라는 거요? 내가 공화국에 빌붙기라도 했소? 그저….”

“닥치시오. 그 작자가 우리한테 어떤 모독을 했는데 거기에 빌붙는단 말이오?”

“빌붙어? 지금 말 다했소?”

둘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서 결투를 할 것처럼 흥분했다.

그리고 유하네스 후작은 그런 이들을 보면서도 눈살만 찌푸릴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한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미 자신에 대한 이들의 믿음은 바닥으로 떨어졌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더럽게 꼬였군. 이럴 줄 알았으면 전쟁터 따위에는 오지 않는 것이었는데.’

유하네스 후작은 깊은 한숨만 나왔다.

그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자기 경력에 원정군 참전과 승전이라는 훈장을 더하기 위해서 참전한 곳이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정치적인 득실을 다 따져본 후에 결정했다.

연합군 안에서 타국의 귀족들을 설득해서 자기 세력을 만들었을 때만 해도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전쟁에 참여하자 그가 직접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적었다.

권력과 재력으로 싸우는 정치판과 달리 전쟁터에서는 실적과 능력이 있어야 대우받았다.

전쟁터에서 활동해본 적이 없는 유하네스 후작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얼마 전에는 자신과 갈라지고 동부 전선 쪽으로 간 밀턴 포레스트의 활약상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하네슬 후작과 그를 따라서 북부 전선에 참전한 귀족들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병사만 잃었는데 밀턴 포레스트는 독자적으로 싸우면서 커다란 공적을 올렸다.

이렇게 선명하게 명암이 드러나서야 본국에서의 추궁을 면할 길이 없었다.

‘뭔가…. 뭔가 기회만 있다면….’

유하네스 후작은 어떻게든 승리가 간절했다.

그런 유하네스 후작에게 손길을 내미는 인물이 나타났다.

“유하네스 후작님이시죠?”

그 인물은 전쟁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관의 여성이었다.

화려한 드레스, 헤어스타일과 액세서리의 세팅까지 심혈을 기울인 여성은 전쟁터보다는 연회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여인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 보기만 해도 눈을 뗄 수 없고, 계속 보다 보면 결국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그런 여인.

그녀가 나타나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클라우디아 바모스라고 합니다.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유하네스 후작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 물론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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