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25화 (125/257)

제125화

‘여기를? 여기가 어딘지 알고….’

‘미쳤어. 보이는 건 얼음밖에 없는 이곳을 행군하다니?’

‘우리가 백곰인 줄 알아?’

병사들의 사기가 낮은 것을 보고 토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좋아. 가뜩이나 어려운 임무인데 이렇게 사기가 낮아서야….’

본보기로 병사들 몇의 목이라도 쳐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군기를 휘어잡아 봤자 그건 일순간일 뿐이다.

이렇게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병력 전체가 하나로 단합해야 했는데….

‘이럴 때 주군이라면…. 아니 하다못해 테이커 경이라면 병사들을 고무시킬 수 있었을 텐데.’

토미는 새삼 자신의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죽도록 노력해서 익스퍼트가 되었지만 그게 군기를 하나로 집결시키는 카리스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애당초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뒤에서 묵묵하게 임무에만 집중하던 토미에게 누군가를 이끄는 역할은 어색했다.

그때, 토미의 옆에 있던 릭이 한발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얼굴들 펴라! 왜들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어? 엉?”

그런 릭의 말에 병사들 중에 한 명이 뭔가 말하려 했다.

“그거야….”

“응? 왜 그래? 할 말 있으면 시원하게 해봐.”

말을 하다가 마는 병사를 보고 릭이 말을 하라고 했다.

그걸 보고 토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멍청아. 그러지 마.’

척 봐도 불안감이 가득한 병사가 입을 열면 그 병사의 불안감이 다른 병사들에게 전염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진짜로 본보기로 몇 명 정도는 목을 쳐서 엄중하게 군기를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토미의 불안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락을 받은 병사는 입을 열었다.

“여기는…. 행군은 고사하고 생존도 불가능한 장소입니다. 여기로 군을 이동시킨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무리입니다.”

“기사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맞습니다.”

토미의 염려대로 병사 한 명의 불안감이 다른 병사들에게도 전염되었다.

한 명이 물꼬를 트자 다른 병사들도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이런이런…. 병사들이 흔들리네. 이러면 임무는 실패하겠는데?”

로빈은 배 위에서 병사들이 불만을 성토하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그가 밀턴에게 받은 명령은 선단을 몰고 가서 이 병력을 목적지에 내려주는 것뿐.

이들이 임무를 거부한다고 해도 다시 태워서 돌아가면 될 뿐이다.

즉….

‘내 책임은 없는 거지? 암 그게 가장 중요하고말고.’

동요하는 병사들을 보고 그는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했다.

그런데 그때….

“시끄러워!!”

쾅!!

커다란 고성과 함께 굉음이 울렸다.

릭이 고함을 치는 동시에 발길질로 지면을 강하게 박찬 것이다.

릭은 익스퍼트의 무위를 보이며 불만을 토하는 병사들을 침묵시켰다.

그리고는….

“어려운 일인 것 안다. 그걸 누가 몰라? 나도 이렇게 지랄 맞게 추운 장소는 처음이야. 너희들 같은 약골들을 데리고 여기를 행군하라는 명령을 생각해도 앞에 캄캄하다고. 하지만!”

릭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쉬운 일이 어디 있나? 목숨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장소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다른 장소에서는 우리들의 전우가 공화국군과 싸우고 있다. 쏟아지는 화살에 견디고 날카로운 창칼 사이로 돌격하며 싸우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고작 춥다고 징징거려?! 그러고도 너희들이 같은 레스터 왕국의 군인이라고 말할 수 있나?!”

릭은 달변인이 아니다.

하지만 가슴속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열정을 여과 없이 입으로 뱉을 수 있는 단순함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단순하고 명확한 말일수록 병사들의 가슴에는 확실하게 박히는 법이었다.

‘그래. 이건 전쟁이었지.’

‘후방에 빠졌다고 해서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어. 지금은 전시였는데….’

‘쪽팔리게시리….’

병사들의 표정에 각오가 살짝 서렸다.

그리고 릭은 그런 병사들에게 말했다.

“여기는 우리의 전장이다! 적은 빌어먹을 추운 이 대자연이다! 이 눈보라는 화살이고, 차가운 북풍은 적의 칼날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포기할 거냐? 겁쟁이처럼 도망 갈 것이냔 말이다?”

릭은 주먹을 불끈 쥐고 감정을 주체하지 않고 말했다.

“싸우자! 우리도 싸워서 이기자! 공화국 놈들과 싸우고 있는 전우들이 우리의 도움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릭의 단순한 연설은 두서가 없었고 그렇게 논리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싸우자! 이기자!”

“와아아아아아아!!”

“우오오오오오오!!”

그 뜨거움만큼은 병사들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토미는 곁에서 그런 릭을 보고 놀란 표정을 하고 생각했다.

‘이 녀석…. 이런 것도 가능했나?’

그저 단순하기만 한 줄 알았던 친우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토미였다.

별 계산 없이 그저 병사들에게 솔직한 속내를 보여줬을 뿐인데 거기에 동조된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올라갔다.

‘이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릭이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자 토미도 자신이 할 일을 했다.

“행군 준비를 한다! 물자를 실을 썰매를 만들어라! 식량과 방한 장비는 우리들의 생명줄이다. 엄중하게 보관하라. 그리고 병사들은 열 명이 한 명씩 되어 로프로 서로를 묶어라.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다!”

불같은 성질의 릭이 병사들을 고양시키고 차가운 물처럼 조용한 토미는 꼼꼼하게 현장 상황을 챙겼다.

밀턴의 말대로다.

확실히 이 둘은 좋은 콤비였다.

이 무모한 원정에 작은 희망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밀턴이 두 달 동안 공격을 하지 않고 수비에만 주력을 하자 지크프리트는 적의 속셈이 뭔지 알아챘다.

“일단 점령지를 안정시키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겠다는 거군.”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니, 현명한 선택이라고 봐야겠지.”

만약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공격을 시도했다면 그때는 확실하게 전멸시켜 버리기 위한 함정을 두 가지 정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공격 자체를 하지 않고 그저 웅크리고 있자 지크프리트의 준비는 허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대로 점령지를 안정화시키고 전선을 고착화시키면 지크프리트로서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북부에 힘을 집중시키고 있던 공화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애당초, 물량에서 밀리는 공화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전선을 확대하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래서 지크프리트 역시 전선을 북부 전선 하나에 집중시켰던 것이다.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지크프리트는 잠시 밀턴이 노릴 수 있는 다른 수를 생각해 봤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본 결과….

‘아니야. 여기서 다른 역습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해.’

라는 결론을 내렸다.

과거 레스터 왕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았을 때 밀턴이 선택했던 것은 과감한 역공이었다.

자신의 남부군이 국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위군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밀하게 이동시켜 그것으로 힐데스 공화국의 수도를 위협하는 대범한 수를 실행했다.

솔직히 그때는 지크프리트도 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수를 두 번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철저한 방비를 하고 왔다.

힐데스 공화국과 레스터 왕국의 국경선에 철저한 방어막을 완성시키고 나왔다.

애당초 힐데스 공화국은 험난한 산악 지역이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적은 병력으로 대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최적화된 지형이었다.

지크프리트는 이 전쟁에 앞서서 국경의 방비에 만전을 기했다.

만약 레스터 왕국의 마스터인 페일런 공작이 직접 군을 이끌고 진격한다고 해도 1년은 충분히 막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공을 받을 우려는 없었다.

‘점령지의 안정화, 그리고 전선의 확대. 이 두 가지가 놈의 노림수겠지.’

굳이 역습이 없다고 해도 이 두 가지가 적의 뜻대로 흘러간다면 지크프리트로서는 낭패였다.

‘슬슬 총통들도 이 전쟁의 결과를 보고 싶어 하니 말이야.’

지크프리트는 결론을 내리고 전령을 불렀다.

그리고는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극비 지령이다. 이것을 북부 전선의 사령부에 전하라.”

“예. 알겠습니다.”

전령을 보낸 후에 지크프리트가 말 했다.

“이쯤에서 멸망해 줘야겠다. 스트라부스 왕국.”

성의 보수와 병력의 배치를 꼼꼼하게 챙기며 수비에 주력하고 있던 밀턴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고자 세비안 자작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음, 세비안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최근 전선의 상황에 문제는 없나?”

“문제라면? 어떤 문제 말입니까?”

“말 그대로 문제 말이야.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말해 보게.”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보고했다.

“별문제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 없단 말이지.”

“왜 그러십니까?”

세비안 자작의 질문에 밀턴이 말했다.

“지금 이 동부 전선의 상황은 일단 우리가 이기고 있어.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을 거의 다 무너트렸고, 일대로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면 공화국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막기 위해서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야 하지? 내 말이 맞나?”

“예. 맞습니다. 그게 주군이 당초에 구상하셨던 물량의 우세를 이용한 전선의 확대였죠.”

“그래. 그렇게 되면 우리보다 병력이 적은 공화국은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어지지.”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걸 지크프리트가 모르고 있을까?”

“…….”

순조롭게 대답하던 세비안 자작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밀턴은 그런 세비안 자작을 향해서 계속 질문을 했다.

“만약 놈이 우리 의도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 소극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을 리가 없어. 어디선가 승부수를 던졌겠지.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 쪽 장단에 맞춰주고 있다는 것은….”

“놈도 노리는 수가 따로 있다는 것이겠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주군은 전략 전술에 관해서 자신보다 뛰어나지 않다.

세비안 자작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밀턴은 때때로 상황의 핵심을 찌르는 안목을 보여주고는 했다.

“이제 여기서부터가 핵심인데? 과연 놈이 노리는 것이 있다면 그게 뭘까?”

“…….”

세비안 자작은 침착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생각해 보자. 주군의 기대를 두 번이나 배신할 수는 없다. 천천히 처음부터 지크프리트의 행적을 되짚어 보자.’

세비안 자작은 지크프리트라는 존재를 가볍게 여기다가 밀턴에게 커다란 패배를 겪게 했다.

그런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할 수는 없었다.

전장의 현자 LV.1 : 전쟁터를 넓게 보는 전략과 전투에 활용되는 책략이 모두 달인의 경지에 이르며 적의 계획을 간파할 확률이 높다.

이 순간 세비안 자작의 새로운 특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직 레벨은 낮지만 전쟁터를 보는 안목이 훨씬 넓어졌고, 적의 계획을 간파할 확률도 크게 올라간 것이다.

‘만약 놈이 주군께서 경계하는 것…. 아니 그 이상의 존재라면…. 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가장 최악의 선택이 떠오른 세비안 자작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문을 열었다.

“북부 전선. 거기서 공화국의 대반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는 총 병력이 20만이 넘을 텐데? 지크프리트가 없는 이 상황에 거기가 무너진단 말인가?”

“가장 큰 힘이 뭉쳐 있는 곳이기에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수적 불리함을 한순간에 일소할 수 있죠.”

“그거야 가능할 때의 일이다만….”

‘아무리 지크프리트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게 가능할까?’

그때였다.

쾅!

문이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열고 볼로나 후작이 뛰어들었다.

파랗게 질려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밀턴은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북…. 북부 전선의 아군이 패배했소.”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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