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지크프리트의 반격.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던 코브르크 공화국으로서는 하늘의 도움이었다.
밀턴을 잡지 못해서 지크프리트 본인은 실망했지만 이 승리로 인해서 코브르크 공화국은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여전히 열세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귀재로 이름난 지크프리트라면 어떻게든 해 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그 기대감에 부응하는 활약을 펼쳐 주었다.
북부 전선에서 지크프리트가 이끌고 온 군사는 3만.
거기다 북부 전선에 남은 병사들을 샅샅이 끌어모아서 총 4만의 군사를 만들었다.
연합군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고, 이미 방어 라인이 거의 무너진 상황이라서 전황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4만의 병력은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며 연합군을 압도했다.
지크프리트는 벨스 성과 호르니 성을 각각 1만의 군세로 공격하며 우선 연합군의 발을 묶었다.
적극적인 공세는 아니었고 그저 감시를 겸해서 공격을 한다, 정도의 느낌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실제로 성 밖으로 나가서 반격을 하려고 하면 훌쩍 뒤로 물러나고 다시 공격하기를 반복하는 그런 공격이었다.
연합군은 이런 지크프리트의 견제성 공격에 마땅한 대응을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총 4만의 병력 중에서 2만의 병력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2만의 병력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밀턴은 전군에 수성에 주력할 것을 명령했고, 방어 라인이 거의 다 무너져 내린 코브르크 공화국은 지크프리트의 맹활약으로 한숨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몹시 못마땅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추태란 말이오?”
그게 바로 볼로나 후작이었다.
리트인크 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볼로나 후작은 밀턴과는 다른 경로로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북쪽 문을 열고 포위망을 뚫고 어찌어찌 탈출했지만 그는 상당한 병력을 잃었고 본인도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벨스 성에 합류한 후에도 최근까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제 간신히 거동을 하는가 싶더니 가장 먼저 한 일이 밀턴에게 찾아와서 거칠게 따지는 행위였다.
“추태라….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거요?”
밀턴의 말에 볼로나 후작이 낯빛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말했다.
“고작 4만이오. 변변한 방어적 거점도 없이 싸우고 있는 4만의 병력이 무서워서 지금 수세로 돌아서다니? 이래서야 당초 계획과 완전히 다르지 않소?”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을 무너트린 다음 곡창 지대를 공격해서 공화국의 식량 사정을 압박한다.
이게 당초의 계획이었다.
실제 방어 라인은 이제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방어적 거점인 리트인크 성은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불에 활활 타올랐기 때문에 제대로 된 방어적 거점으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턴은 전 병력에 수성에 주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크프리트의 등장으로 인해서 기존의 계획을 완전히 새로 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볼로나 후작이 답답해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침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최근 리크인트 성을 공격하며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우리도 일단 전세를 추슬러야 할 필요가 있소.”
밀턴의 말에 볼로나 후작이 더 화를 내며 말했다.
“그건 후작의 실수가 아니었소? 그런 뻔히 보이는 유인책에 말려들어서 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말았소!”
그 말에 밀턴은 순간 울컥했다.
‘뻔히 보이는 유인책? 그렇게 뻔히 보였다면 그때 같은 자리에 있던 네놈이 좀 말려주지 그랬어?’
생각 같아서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정하오. 그건 나의 불찰이었소.”
지금 밀턴이 볼로나 후작과 불화를 일으켜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밀턴이었기에 일단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게 밀턴이 사과를 하자 볼로나 후작이 기가 살아서 말했다.
“그렇다면 아직 늦지 않았소.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도 지금은 공세로 돌아서야 하오. 아직 우리가 남은 전 병력을 동원하면 적의 두 배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소. 그러니 당장이라도….”
“그건 안 되오.”
“어째서 안 된다는 말이오?”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오.”
“병력이 부족?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지금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병력은 총 8만 정도요.”
“나도 알고 있소.”
“그중에 우리 레스터 왕국군이 5만이고, 플로렌스 공국 병력이 1만, 그리고 스트라부스 왕국의 병력이 2만이오.”
“그 정도면 충분한 병력이오. 지금 당장 전군을 이끌고 진격해야 한다는 말이오.”
볼로나 후작의 말에 밀턴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리트인크 성에서 피해를 입기 전이었다면 그렇지?’
리트인크 성의 패전에서 발생한 피해는 무려 5만에 달했다.
그중에 3만이 레스터 왕국군이었고 2만이 스트라부스 왕국군이었다.
한 번의 전투에서 5만의 병력이 날아갔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볼로나 후작의 말대로 공격을 해도 충분하겠지만 지금은 절대 안 된다.
“총 병력은 8만이지만 그 병력 대부분을 점령지를 안정시키는 것에 사용하고 있소. 알고 있지 않소?”
지금 연합군의 8만 군세의 병력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벨스 성 - 2만 상주.
호르니 성 - 2만 상주.
리엔츠 요새 - 5,000 상주.
벨루노 요새 - 5,000 상주.
브루니코 요새 - 5,000 상주.
메라노 요새 - 5,000 상주.
볼차노 요새 - 5,000 상주.
주둔 병력만 6만 5천이었고 남은 1만 5천의 병력은 수비 거점의 정찰과 유격전을 위해서 평야에 대기 중이었다.
사실상 모든 병력을 점령지를 안정시키는 것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과하게 수비 병력을 치중하고 있는 것이오. 후방 요새에까지 그렇게 많은 병력을 배치할 필요는 없지 않소? 수비 병력을 줄이면 공격을 위한 여유 병력이 생길 터이오.”
“그러다가 역습을 당하면 우리가 방어 거점을 빼앗길 수 있소.”
“그렇다고 이대로 틀어박혀 있으란 말이오?”
“어디까지나 점령 지역을 안정시킬 때까지만이오. 코브르크 공화국이 다시 방어 거점을 함락하고 방어 라인을 가동하면 얼마나 어려워지는지 아시지 않소?”
“적에게 그럴 여력이 있다고 보시오? 한 번의 패배를 겪기는 했지만 지금 이기고 있는 것은 우리란 말이오?”
“그 말대로 우리가 이기고 있소. 그런데 어째서 조급함을 보일 필요가 있소?”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망설이는 게 답답하단 말이오!”
“지크프리트가 원군을 이끌고 왔다면 그만큼 북부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 우리가 여기서 점령지를 탄탄하게 지키며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이오.”
“그것만으로는 공적이 부족하오.”
“전쟁의 승리가 공적보다 우선이오!! 그것도 모르오!?”
“나를 공적에 눈이 먼 소인배로 취급하는 것인가?”
둘의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졌다.
밀턴은 최대한 참으려고 했지만 이건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전의 패배에서 밀턴과 레스터 왕국군의 한계를 봤다고 생각한 것일까?
볼로나 후작의 태도는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밀턴에게 협력적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전쟁을 수행하려고 했다.
이전에 밀턴에게 협조한 결과 좋은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의 커다란 실패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밀턴이 주도권을 내려놓고 자신이 이 전쟁을 주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 지금 볼로나 후작이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당연하지만 밀턴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전쟁터에서 지휘권이 여기저기로 휘청거리는 것은 최악의 우행이다.
무엇보다, 밀턴에게는 아직 숨겨둔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수비에 주력하며 전장을 안정시켜야 했다.
그러나 볼로나 후작과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밀턴은 자신이 양보할 수 있는 최후의 선을 그었다.
“두 달…. 딱 두 달만 기다려 주시오. 그렇게 하면 점령지를 안정시키고 적을 안정적으로 공격할 수 있소.”
밀턴이 두 달이라는 여유 기간을 주자 볼로나 후작도 조금이지만 호흡을 정돈하고 진정을 했다.
그리고는….
“그 두 달 동안 적은 전세를 추스르지 않을 거라고 보는 거요?”
“적은 북부 전선에도 신경을 써야 하오.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것을 믿어 주시오.”
“그건 그때가 되어보지 않으면 모르지 않소? 그렇게 지금의 기회를 놓쳤다가는….”
“두 달 후라면 후작에게 공격에 대한 독자적인 지휘권을 넘겨주겠소. 그러니 두 달만 참아 주시오.”
“으음….”
볼로나 후작은 가능하면 즉시 공격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밀턴은 그것만큼은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달…. 정확하게 60일 후요. 그 이상의 양보는 없을 것이오.”
“그렇게 하겠소.”
결국 밀턴은 어찌어찌 볼로나 후작을 달래서 두 달의 시간을 약속받았다.
상당한 양보를 해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 두 달은 참고 버티겠다고 약속을 받은 후에 볼로나 후작을 돌려보냈다.
“차라리 칼 들고 싸우는 게 낫지.”
볼로나 후작이 물러나고 한숨을 내쉬는 밀턴에게 세비안 자작이 다가와서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군.”
“수고했지. 진짜로 말이야.”
공적에 눈이 먼 볼로나 후작을 진정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귀족들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공적을 세우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세운다고 하지만 볼로나 후작은 특히 더 안달이 나 있었다.
하긴, 만약 이 코브르크 공화국 공략이 잘 흘러간다면 공작위도 바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공적이니 구미가 당길 만도 했다.
“어쨌든 두 달의 시간은 벌었다. 이 정도면 가능하겠지?”
“예. 제 예상이 맞다면…. 그때쯤에는 답이 나올 겁니다.”
“세 번째 안배가 말이지.”
“…….”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세비안 자작에게 밀턴이 말했다.
“왜 그러지? 작전에 자신이 없나?”
“아닙니다. 작전 그 자체에는 대단한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그럼 뭐가 문제지?”
“다만…. 역시 그 두 사람에게 너무 무리한 주문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있을 뿐입니다.”
“괜찮다. 아마 그 둘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둘이 함께 있으니까.”
“…예?”
“그 두 명은 자네 생각보다 굉장히 좋은 콤비거든. 하나하나를 떼어 놓으면 평범한 기사일 뿐이지만 둘이 함께 행동하면 생각보다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지.”
“…….”
“한번 그 둘을 믿어 봐.”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주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믿겠습니다.”
세비안 자작은 간절하게 세 번째 안배가 성공하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입안한 작전, 아니 그냥 보험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보험이 최고의 한 수가 되었다.
‘성공만 한다면 말이지.’
***
“여깁니다. 이제 내리십시오.”
“여기라고? 이 빌어먹을 정도로 추운 여기가 목적지란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진짜 여기란 말이지?”
“예. 그렇다니까요?”
“진짜 진짜 여기….”
“맞다니까요! 추우니까 빨리 내려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릭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은 로빈이었다.
밀턴이 거둬들인 전직 해적, 현직은 상인 겸, 선장 겸, 해군 사령관이기도 했다.
“제길…. 춥다. 빨리 내려 릭.”
“하지만 토미! 여기는…. 젠장 진짜 이게 행군 가능한 곳이야?”
봐도 봐도 보이는 것은 얼음뿐인 극한의 대지.
시야를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혹독한 눈보라.
릭과 토미는 5,000의 군대를 이끌고 이 얼어붙은 동토를 행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군의 명령이다.”
“…….”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단련했던 거냐?”
“젠장. 진지하게 말하기는, 나도 그냥 푸념 좀 한 것뿐이야.”
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릭과 토미를 선두로 해서 5,000의 병력도 배에서 내렸다.
방한 장비와 식량은 철저하게 챙겼다.
그게 이들의 생명줄이니 말이다.
병력이 전부 배에서 내리자 토미가 그들의 앞에 나서서 말했다.
“모두 들어라. 나는 밀턴 포레스트 후작님의 기사 토미 크로이다.”
“같은 소속의 기사 릭 토리스다.”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한 다음 토미는 병사들을 쭉 둘러보고 말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부터 이 얼어붙은 동토를 관통한다. 적과의 전투는 없겠지만 결코 방심하지 마라. 이 혹독한 대자연 전체가 우리의 적이다.”
토미의 말에 병사들은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오면서 대강의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현실을 직접 듣고 나니 절망감이 확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