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후방에서 바이올렛 공주의 원군이 나타나고 밀턴이 그쪽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본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
다 잡았다고 생각했다.
포위망 안에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적을 보면서도 그저 최후의 발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자포자기의 발악이 아니었다.
적들은 명백한 목표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성 밖에 나와서 포위망에 부딪힌 것이다.
포위망에 전면에 집중되면 적의 후방에 원군이 도착했을 때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실제 그 효과는 지금 여실하게 드러났다.
포위망의 후방에서 바이올렛 공주가 날뛰기 시작하고 거기에 맞춰서 밀턴이 내부에서 호응하자 포위망이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주군 지금이라도 제가 가겠습니다.”
아군의 포위망이 점점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제이크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늦어. 너를 투입하려면 진작 해야 했다. 지금에 와서는 무리다.”
“하지만….”
제이크가 그래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는 그때….
“뚫었다!”
“지금이다! 전군 탈출하라!”
“와아아아아아!!”
막힌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지크프리트가 만들어둔 포위망이 무너졌고 그 사이로 밀턴이 기마대를 이끌고 빠져나왔다.
“빨라. 어찌 이런 단시간에….”
그 광경을 보고 제이크는 경악했고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적이 후방에 나타난 순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떻게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적이 빠르게 포위망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말이다.
제롬의 활약과 밀턴의 분전으로 인해서 이미 포위망은 70퍼센트 이상 돌파를 당한 상태였다.
그런데 후방에서 갑자기 등장한 지원군을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그 지원군의 선두에서 활약하는 기사단의 수준은 척 봐도 상당했다.
선두의 여기사 한 명이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녀를 보필하는 다른 기사들도 수준이 높아 보였다.
저런 강적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흩어놓지 말고 한곳에 집중시켜 놨어야 했다.
결국, 적은 포위망을 허물고 빠져나갔다.
그럼 여기서 지크프리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이 시점에서 저 포위망을 재건해서 적을 다시 잡는 건 무리다.
여기가 힐데스 공화국이라면 지형의 이점을 살려 산악병을 지휘해서 적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무리다.
“달려라! 전군은 현장을 이탈하라!”
“와아아아아아!!”
적은 포위망을 허물자마자 그대로 질주하며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추격은 무리겠군. 그 트라이크라는 궁수가 안 보여. 아마 우리가 무리한 추격을 하면 받아치기 위해서 남겨둔 거겠지?’
밀턴이 지크프리트에 대해서 조사를 한 것처럼 지크프리트 역시 밀턴에 관해서 상당한 조사를 했다.
제롬이나 세비안 자작과 달리 대외적으로는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인 트라이크의 존재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트라이크가 지휘하는 궁병대는 전차를 타고 이동한다고 알고 있다.
만약 자신들이 억지로 추적하려고 한다면 매복해 있다가 강하게 받아치고 전차의 기동력을 살려서 빠르게 후퇴할 것이다.
그리고 적이 그렇게 나왔을 때 자신들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없었다.
“빌어먹을, 결국 놓쳤나?”
지크프리트는 결과를 인정했다.
결과에 따라 태세 전환이 빠른 것도 그의 장점이었다.
현실을 빠르게 파악한 지크프리트가 새로운 마음으로 전군에 지시를 내렸다.
“포위망 안에 있는 적을 완전 섬멸하라. 전과를 최대한 확대한다!”
“예. 알겠습니다.”
바라던 월척은 놓쳤다.
하지만 이 작전에 들인 공이 아까워서라도 전과는 톡톡히 올려야 손익 계산이 맞았다.
‘포위망 밖으로 나가지 못한 적들은 전부 전멸시켜 주지.’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밀턴을 놓쳤다고 해도 자신이 이 전장에 온 이상 지금처럼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패배.
전쟁에서 승패라는 것은 둘 다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겪어보는 패배는 역시 컸다.
“얼마나 남았지?”
“1만 5,000 정도입니다.”
밀턴의 말에 제롬이 보고했다.
그리고 보고를 들은 밀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포위망 안에서 탈출하지 못한 병력은 전멸인가?’
“제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가 갈렸다.
어째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적의 유인책에 넘어갔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지크프리트가 이 전쟁에 투입된 것을 늦게 깨달은 것도 문제였다.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자신도 모르게 방심이 깊어졌고, 그 방심의 대가가 이렇게 처절하게 다가왔다.
패잔병과 낙오된 병력을 다 수습해 봐야 알겠지만 이 전투에서 잃은 병력은 2만에서 3만은 될 것이다.
밀턴으로서는 뼈아픈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괜찮나요? 포레스트 후작?”
밀턴의 옆에서 바이올렛 공주가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의 원군 덕분에 살았습니다.”
밀턴은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작전의 성격상 맞지 않아서 후방에 남겨둔 바이올렛 공주였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결정적이 한 수가 되었다.
그녀가 포위망의 후방을 빠르게 무너트렸기 때문에 밀턴은 보다 많은 아군을 살릴 수 있었다.
“동맹국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고개를 들어 주세요.”
전투 중이 아닐 때는 얌전하고 상냥한 성격인 바이올렛 공주는 겸손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진 빚은 잊지 않고 반드시 갚겠습니다.”
밀턴은 바이올렛 공주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 생각에 잠겼다.
‘피해가 커도 너무 커.’
이만한 정예 병력을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이번 원정에 데리고 온 정예 병력은 지난 2년 동안 밀턴이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기울여서 육성한 주요 전력이었다.
그것을 잃었다는 것은 정말 큰 손해다.
그리고 전력적인 손실 면을 떠나서 이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아버지고 아들일 터이다.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게 전쟁이다.
전쟁터에 나온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미 전쟁터를 몇 번이고 누볐고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XX….”
이렇게 가슴 깊이 실감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첫 패배에서 밀턴은 어깨를 짓누르는 막중한 책임감을 실감했다.
그리고 밀턴 이상으로 이번 패배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 지금 오고 있었다.
“주군, 세비안 자작과 트라이크가 이끄는 병력이 합류했습니다.”
지크프리트의 추적을 대비해서 후방에 매복 중이던 트라이크의 궁전차 부대가 복귀했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후미에 남아 있던 세비안 자작 역시 복귀를 했다.
세비안 자작은 군에 합류하자마자 만사 제치고 바로 밀턴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털썩.
“죄송합니다. 주군. 죽여 주십시오.”
말 위에서 내리더니 바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
밀턴은 그런 세비안 자작을 씁쓸한 눈으로 내려다 봤다.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밀턴이 몇 번이고 지크프리트의 행적을 놓치지 말라고 말했지만 결국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질책은 당연했다.
하지만 밀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어나라.”
“면목이 없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일어나라. 명령이다.”
“…….”
밀턴의 반복된 말에 고개를 든 세비안 자작의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밀턴은 직접 말에서 내려 그런 세비안 자작의 얼굴에 묻은 흙과 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아니면, 죽음으로 도망갈 생각인가? 아직 한참 남은 이 어려운 전쟁에 나를 남겨두고? 나를 향한 자네의 충성심은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아…. 아닙니다.”
그제야 입을 여는 세비안 자작을 보고 밀턴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를 믿는다. 세비안.”
“…주군.”
자존심이 강한 세비안 자작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큰 패배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세비안 자작에게 있어서 밀턴의 이 한마디는 가슴에 사무치는 것이었다.
그런 세비안 자작에게 밀턴이 말했다.
“우선은 벨스 성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거기서 군을 재정비해서 다시 반격한다. 할 수 있겠지?”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밀턴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너를 믿고 맡기겠다.”
“옛….”
세비안 자작은 젖어 있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때 밀턴은 세비안 자작의 충성심이 100에 도달하는 것을 봤다.
충성 수치가 100에 도달하는 것은 처음 봤다.
그리고 그때 밀턴에게 한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란돌 세비안의 충성심이 일시적으로 100을 넘었습니다.]
[능력치가 성장합니다.]
[전략과 전술 특성이 합쳐지며 새로운 특성, 전장의 현자 특성이 생겼습니다.]
“아….”
밀턴은 깜짝 놀랐다.
제롬이 최근에 새로운 벽을 넘어서더니 이제는 세비안 자작도 한 차원 높은 진화를 달성한 것이다.
즉시 상태창을 확인해 봤다.
거기에는….
[란돌 세비안]
대군사 LV.7
무력 - 12 통솔 - 85
지력 - 97 정치 - 89
충성 - 100
특성 - 전장의 현자, 육감, 냉철, 언변.
전장의 현자 LV.1 : 전쟁을 넓게 보는 전략과 전투에 활용되는 책략이 모두 달인의 경지에 이르며 적의 계획을 간파할 확률이 높다. 경지가 극에 달하면 전 세상의 모든 전쟁에 영향력을 끼치는 안목과 수완을 갖추게 된다.
육감 LV.7 : 자신이 지휘하는 군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치는 것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
냉철 LV.8 : 유혹이나 매수 등에 저항력이 높으며 죽음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초연할 수 있다.
언변 LV.7 : 대화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 혹은 굴복시킬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한 상대에게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확인한 상태창에는 완전히 새롭게 변한 세비안 자작이 있었다.
‘대단해. 클래스 자체가 대군사로 변했어. 지략이 드디어 97? 거기다 전장의 현자라니?’
단순한 참모를 넘어서 이건 한 차원 높은 존재로 진화를 한 듯했다.
사실 밀턴은 이번에 세비안 자작을 마냥 용서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지시를 지키지 못했고, 그 결과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패배로 내쳐버릴 만큼 란돌 세비안이라는 남자의 가치는 낮지 않았다.
무엇보다 밀턴의 앞에 나타난 세비안 자작은 이미 강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과거 1왕자군의 패배는 세비안 자작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패전에 나름의 트라우마를 짊어진 세비안 자작이었다.
천재일수록 자신의 능력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보통 사람 이상으로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전쟁은 명백하게 세비안 자작의 잘못으로 진 전쟁이다.
차라리 밀턴이 원했던 대로 빠르게 리트인크 성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작전을 짰다면 이런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고 멋대로 주군을 조종해서 장기전을 계획한 결과가 이거라니….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넝마가 된 천재의 모습이 밀턴에게는 빤히 보였다.
이래서는 곤란했다.
자신감을 잃은 천재라는 것은 이빨이 빠진 맹수와 같다.
그래서 밀턴은 일부러 더 부드러운 태도로 세비안 자작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패전을 겪었다고 해도 밀턴의 휘하에 있는 인물 중에 세비안 자작을 능가할 참모는 없었다.
그런 밀턴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맞았다.
자신감을 잃었던 세비안 자작은 밀턴의 위로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고, 그 감동이 충성심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한 번 실패한 자신을 용서해 주고 다시 중임을 맡기는 주군.
이런 주군에게 더 이상의 패배를 안겨줄 수는 없다, 라는 책임감이 세비안 자작의 안에 있던 오만함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제롬이 그랬던 것처럼 세비안 자작은 자신의 한계를 넘었다.
한계에 달했던 전략 전술이 진화하면서 전장의 현자라는 새로운 특성이 생겼다.
그리고 클래스도 달라졌다.
단순한 책사에서 지금의 세비안 자작은 대군사가 되었다.
일국이 명운을 걸고 전쟁을 맡겨 볼 만한 존재가 된 것이다.
처음으로 커다란 패배를 겪은 밀턴이었지만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전쟁은 이제부터다.’
밀턴은 강하게 마음을 고쳐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