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22화 (122/257)

제122화

‘이놈들은 정말 위험해.’

위기감에 입 안이 까끌까끌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놈들은 위험하다.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놈들을….

“주군에게 보낼 성 싶으냐!?”

이미 상당한 오러를 소진했지만 그래도 심장을 태워서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 순간….

제롬의 정신력이 육체를 초월했다.

서걱!

‘위험….’

제1격.

생각하기 전에 팔이 먼저 움직였다.

가볍게 휘두른 참격에 측면에서 제롬의 빈틈을 노리던 놈의 허리를 갈랐다.

푹!

이어지는 2격.

아군의 배후에서 빈틈을 노리고 있던 적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리고 제롬은 검을 뒤로 휘둘렀다.

카앙!

“큭….”

후방에서 자신의 등을 노리던 적의 공격을 보지도 않고 쳐냈다.

퍼억!

그리고 제3격.

배후를 공격한 놈의 양손이 위로 올라간 틈을 놓치지 않고 제롬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콰직!

순식간에 열 명의 적들 중에 세 명을 죽였다.

“무슨…?”

“침착해라. 포위망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갑자기 동료가 세 명이나 어이 없이 죽었다.

감정이 없는 것 같던 고스트들 사이에서도 당황과 공포의 감정이 드러났다.

그리고 감정이 흔들리자 빈틈없던 고스트의 포위망에도 순간 구멍이 생겼다.

제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몰아서 포위망의 한쪽으로 빠져나갔다.

“놓치지 마라.”

“다시 가둬야 한다.”

고스트는 서둘러서 제롬을 추격했다.

그때 도망가는 듯하던 제롬이 순간적으로 말을 반전시켰다.

그러자….

“엇?”

“온…. 온다!”

제롬의 눈앞에는 적들이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

당황한 적들을 향해서 제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간다!’

적이 다시 포위망을 만들기 전에 제롬은 애마의 배를 차고 달려갔다.

‘남은 적은 일곱.’

터질 듯한 심장과 불에 타는 듯한 근육과 달리 머릿속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다.

이제부터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불가능하지 않다.

어렵지도 않다.

그냥 하면 된다.

제롬의 정신은 무심(無心)에 이르렀고 그의 검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4격, 5격, 6격, 7격….

제롬의 검이 끊어짐 없이 이어졌다.

그 검격은 너무나 깔끔하고 예리하고, 또 아름다웠다.

제롬의 검에 당하는 고스트들이 자기 목숨을 앗아가는 제롬의 공격에 마음이 빼앗길 정도였다.

그리고 제롬의 검이 마지막 10격의 휘두름을 끝냈을 때.

“괴…. 괴물….”

털썩.

열 명의 고스트 전원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후우…. 후우…. 후우우….”

제롬은 그제야 깊은 호흡을 거칠게 내쉬었다.

‘방금…. 뭐였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롬은 오히려 얼떨떨했다.

“제롬! 괜찮나? 제롬!”

그때 주군인 밀턴이 도착했다.

제롬이 포위망에 가둬지는 것을 보고 서둘러 가세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적의 방해가 너무 거세서 쉽지 않았고 점점 위기에 몰리는 제롬을 보고 초조함이 극에 달했었다.

이판사판으로 닥치고 돌격을 감행하려고 하는 그때 밀턴은 봤다.

제롬의 상태창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말이다.

[가신 제롬 테이커가 각성했습니다. 자신의 추구해야 할 무(武)의 방향성이 깨어납니다.]

[새로운 특성 몰아(沒我)의 경지가 생겼습니다.]

[몰아의 경지 LV.1 : 정신이 육체를 초월한 경지. 무인으로서의 궁극적인 도달점 중에 하나이며 최종적으로는 검혼일체(劍魂一體)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밀턴은 깜짝 놀랐다.

‘제롬, 너는 이 상황에서….’

기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롬 테이커가 또 발전했다는 것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제롬의 경지가 한 차원 높아진 것에 관해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제롬, 움직일 수 있나?”

“예. 물론입니다.”

제롬의 대답을 듣고 밀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마까지는 가능하겠군. 하지만 이 이상의 전투는 무리야.’

이미 제롬은 오러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한 번 빼앗겼던 동문을 탈환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성 밖을 나온 후에는 가장 선두에서 적진을 누비며 활약했고, 거기다 범상치 않은 실력의 익스퍼트 열 명을 혼자서 베어 넘겼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오러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는 법.

밀턴은 이 이상 제롬에게 전투를 맡길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충분하다.’

밀턴이 미끼 역할을 하는 동안 제롬은 거의 혼자서 돌격하며 적의 포위망을 7할 이상 꿰뚫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전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밀턴은 직접 최선두에 서서 기사단을 이끌었다.

제롬의 전율적인 활약을 보고 가장 흥분한 것은 밀턴도 아니고, 포위망을 지휘하고 있던 지크프리트도 아니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인물은 커다란 거구에 등에는 대형 투핸드 소드를 매고 있는 남자.

“참아라. 제이크.”

바로 제이크였다.

지크프리트가 가지고 있는 비장의 한 수.

특수 부대 고스트의 대장.

공화국의 숨겨진 소드 마스터.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이크는 그 존재감을 숨기고 항상 지크프리트의 배후에 대기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어디까지나 얌전한 장식으로 존재했기에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가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말을 몰고 전쟁터에 뛰어들었을 정도로 크게 흥분해 있었다.

그를 그렇게 흥분시킨 원인은 바로 제롬이었다.

“지크프리트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놈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드물게도 제이크가 먼저 지크프리트에게 간청을 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그런 제이크의 바람을 가볍게 묵살했다.

“안 된다. 너라는 전력은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겨두는 편이 좋다.”

비장의 조커는 공개했을 때보다 손안에 쥐고 있을 때가 더 든든한 법이다.

실제 밀턴이 제롬을 그렇게 사용했지 않은가?

지크프리트로서는 이미 이기고 있는 전황에 제이크라는 비장의 조커를 내밀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다시 한번 간청했다.

“부탁드립니다. 저 남자와 꼭 검을 마주해보고 싶습니다.”

한 번 거부했으니 두 번 청해봐야 허락해 줄 확률은 백에 하나도 있을까 말까 하다.

그런 지크프리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이크는 다시 간청했다.

그만큼 애가 단 것이다.

포위망을 누비며 단기로 저돌적으로 돌파할 때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예전에 상대했던 데릭 브란스 공작과 비슷한 수준.

딱 그 정도의 평가였기에 그렇게 관심은 없었다.

거기다 지크프리트가 고스트 6조를 보냈을 때는 제롬의 최후를 확신하기도 했다.

고스트 안에서도 6조는 포위 합격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킨 조다.

그것도 여러 명이서 마스터 한 명을 포위해서 상대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말이다.

자신이나 지크프리트가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스터를 잡아내기 위해 만들어둔 전력이었다.

그 실력은 직접 훈련을 시킨 제이크가 잘 알고 있었다.

6조의 합격에 익숙한 자신이라고 해도 열 번 싸우면 한 번은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6조가 나섰으니 저 제롬이라는 기사는 틀림없이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였다.

처음에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싶었지만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제롬의 변화였다.

마치 번데기가 나비로 우화하듯이 싸우는 도중에 제롬의 경지가 확연하게 변했다.

힘이 올라간 것도 아니고 검이 빨라진 것도 아니다.

아마 오러의 총량이 올라간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제롬은 훨씬 더 강해졌다.

어떻게?

굳이 말로 하자면 검이 보다 선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무엇을 하면 되는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실하게 알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이 정립되는 깨달음.

제이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거친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호승심이 가슴에서 불처럼 끓어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경지에 있는 무인과 겨룰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다.

이제까지 그의 검을 전부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지크프리트뿐이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어디까지나 제이크의 주군이다.

목숨보다 더 우선시해야 하고 영원한 충성을 바쳐야 할 자신의 주인이다.

그런 지크프리트에게 작정하고 살기를 담은 검을 휘두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제이크의 눈앞에 ‘적’이 나타난 것이다.

싸우고 싶다.

정면에서 일대일로 당당하게 말이다.

저 남자와 검을 마주하고 사선을 넘는다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무인으로서의 열망을 채우기에는 전쟁터라는 배경이 썩 좋지 않았다.

“네가 나서지 않아도 적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너라는 전력을 함부로 노출시킬 수는 없다.”

지크프리트는 단호하게 제이크의 열망을 꺾어 버렸다.

“하지만 지크프리트 님….”

“내 말을 거역할 셈이냐?”

지크프리트가 표정을 굳히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제이크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 있어서 지크프리트는 절대자이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준 인물이 지크프리트였고, 그를 평생 따라가며 보필하겠다고 맹세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제이크는 그렇게 한숨을 물러났다.

그리고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바랐다.

밀턴 포레스트는 몰라도 저 제롬이라는 기사는 부디 이 전장을 무사히 탈출하기를….

그리고 언젠가 전쟁터에서 조우할 수 있기를 말이다.

“제법 잘 싸우고 있지만, 결국 적은 쓰러지게 되어 있다.”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말하며 전황을 내려다봤다.

제롬이라는 기사가 탈진한 지금 군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것은 밀턴이었다.

아직 마스터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밀턴이었지만 선두에서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며 적을 돌파하는 것이 제법 강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지.”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었다.

적이 포위망을 쉽게 깨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애당초 포위망을 그렇게 구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포위망을 단단하게 짜 놓은 것이 아니라 얇게 여러 겹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 겹을 돌파한다고 해도 빠르게 다음 포위망이 적의 발목을 잡고, 그걸 돌파하고 나면 또 다음 포위망이 있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 보면 선두의 추진력이 떨어지고 후위의 병력이 적에게 포위당해서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그 광경이 지금 지크프리트의 눈에 고스란히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꽤 애먹였지만, 여기서 끝이다. 밀턴 포레스트.”

지크프리트가 승리의 미소를 머금은 그때….

“돌격!”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포위망의 후미에서 적의 급습이 벌어진 것이다.

‘왔구나!’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던 밀턴의 눈이 반짝였다.

적의 후미에서 나타난 군대가 무엇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플로렌스 공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그 선두에는 한 명의 여기사가 신들린 듯이 날뛰고 있었다.

세비안 자작이 보낸 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밀턴은 크게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지금이다! 전군은 나를 따르라!”

“와아아아아아아!!”

밀턴은 지원군이 온 쪽으로 남은 전 병력을 이끌었고, 병사들 역시 찬스가 왔다는 것을 깨닫고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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