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21화 (121/257)

제121화

제롬의 경지를 숨기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꽤 답답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국면이 아니면 비장의 카드는 최대한 은밀하게 숨기는 것이 맞다.

실제로 제롬의 힘을 가장 극적인 순간에 활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적도 설마 포위망 안에 마스터의 존재가 있다는 것은 몰랐을 터.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이 국면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역할은 한정되어 있어. 우선은 동문의 거점을 틀어막고 성안으로 더 이상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밀턴은 바로 제롬에게 동문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제롬은 가장 선두에서 검을 들고 적을 막으며 외쳤다.

“동문은 내가 막겠다. 전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와아아아!!”

사기가 고양된 병사들은 공화국군을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작지만 희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동문의 거점이 밀리고 있다고? 마스터의 등장?”

전령의 보고를 받은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변수의 등장인가? 뭔가 숨겨둔 한 수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지크프리트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작전에 그가 들인 공은 상당했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상황을 한 박자 늦게 보고 받아서 서둘러 오고 싶었지만 그래도 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 수백 단위로 잘게 쪼개서 은밀하게 이동시켰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긴 상태로 작전을 짰다.

바이슨 중장이라는 노련한 장수 한 명을 제물로 희생시키고 리트인크 성이라는 중요한 방어 거점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면서 만든 함정이다.

이렇게 거창한 작전을 펼쳤는데 결국 실패?

그런 결과는 절대 피하고 싶었다.

“동문을 틀어막고 성안으로 계속 불화살을 날려라. 기름을 듬뿍 먹여 두었으니 금방 타오를 것이다.”

“옛!”

“그리고 다른 문을 지키고 있는 병력에 전해라. 적의 반격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옛!”

병사에게 지시를 내린 지크프리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리트인크 성을 바라봤다.

“마스터…. 마스터라….”

예상 밖의 변수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상황은 아군에게 유리하다.

흔들림 없이 포위망을 구성할 수만 있다면 적은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주군, 테이커 경이 동문을 탈환하고 공화국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거점을 만들었습니다.”

“좋았어!”

밀턴은 전령의 보고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전히 상황을 안 좋았지만 그래도 이 성안으로 공화국군의 공격이 추가되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오러 소드를 계속 사용하면 지치게 된다.

밀턴이 지크프리트라면 고스트를 이용해 돌아가며 파상 공격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제롬이 지치게 되면 다시 병력을 들이부어서 동문을 돌파할 테고 공화국군이 다시 이곳을 공격해 온다.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불길은 잡는 것은? 가능할 것 같은가?”

일부 병력을 동원해서 성안의 불길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하지만….

“성의 건물 대부분에 기름이 먹여져 있어서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벽 밖에서도 계속 불화살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어렵겠군.”

불길은 잡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빠르게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뭔가 계기…. 계기가 필요해.’

밀턴은 고심했다.

다른 성문을 열기 위해서 보낸 기사들이 탈출을 시도하면 아마 적의 주위도 분산될 것이다.

그때를 제롬이 만들어둔 동문의 거점으로 돌파를 시도하면 가능성은….

‘어려워. 그걸로는 부족해.’

상대가 평범한 상대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은 지크프리트.

아마 성 밖으로 빠져 나온 적을 섬멸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포위망이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뭔가…. 뭔가 한 가지 더….’

그때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불길이 가득한 이 화재 현장에 새가 스스로 날아들다니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 새는 정확하게 밀턴에게 도착했고 밀턴은 바로 알아차렸다.

‘비앙카의 패밀리어 마법. 그렇다면….’

새의 발목에는 작은 편지가 묶여 있었다.

밀턴이 즉시 편지를 풀자 거기에는 세비안 자작이 적은 간략한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 동문의 적진 후방에 바이올렛 공주.

급하게 쓴다고 핵심만 쓴 것 같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바로 깨달았다.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이제 최후의 희망에 도박을 걸어야 할 때다.

밀턴은 즉시 레너드의 등에 올라타며 즉시 남은 병력을 추슬러서 명령했다.

“전군은 성 밖으로 돌격할 준비를 하라.”

부하들에게 준비를 시켜 놓은 후에 밀턴은 성문에서 싸우고 있는 제롬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곧 적의 후방에 아군의 공격이 있을 것이다.”

“아군의 공격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플로렌스 공국의 병력이다.”

“아….”

제롬은 탄성을 질렀다.

틀림없이 플로렌스 공국의 병력은 보급을 위해서 후방에 대기시켜 놓았다.

바이올렛 공주의 성격을 제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작전이었기 때문에 슬그머니 뒤로 물려놓은 것이다.

“바이올렛 공주가 병력을 이끌고 적의 후방을 치겠지만 그 병력은 소수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적의 주의를 전방에 집중시켜 놔야 할 필요가 있다.”

밀턴의 말에 제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목숨을 걸고 수행하겠습니다.”

“나 역시 함께 간다.”

“주군께서는 후방에….”

“먹잇감이 크지 않으면 적의 의심을 살 수 있어. 내 존재는 필수다.”

밀턴의 말에 제롬은 검을 꽉 쥐고 각오가 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너를 믿겠다. 그럼….”

밀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정돈했다.

그리고 정신을 진정시킨 후에 크게 외쳤다.

“전군, 돌격!”

밀턴은 망설임 없이 말을 몰았고 그 옆에서 제롬도 바로 뒤를 받쳤다.

“주군의 뒤를 따르라! 포위망을 허문다!”

“와아아아아아!!”

이것이 유일한 활로라고 깨달은 병사들은 남은 힘을 다 쥐어짜서 달렸다.

퍼퍽! 퍽퍽퍽!

성을 돌파하고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주군을 지켜라! 기사단은 밀집 대형으로 뭉쳐라!”

제롬은 기사단에 지시를 내리고 가장 선두에서 달리며 포위망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죽기 싫으면 꺼져라!”

콰아앙!

마스터의 오러는 폭발적인 파괴력을 자랑한다.

장창을 세우고 견제하는 창병도, 밀집 대형으로 뭉쳐서 방패로 견제하는 중보병도 제롬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다만, 제롬의 공격을 막지 못하는 만큼 사방에서는 화살이 쏟아졌고, 하나의 포위망이 부서진다고 해도 다시 몇 겹의 포위망이 밀턴을 둘러싸고 있었다.

“역시….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해 놓았군.”

밀턴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방패로 막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이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생사의 기로다.

“전진! 앞으로 전진하라!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

밀턴은 그렇게 외치면서 스스로 레너드를 몰아서 거칠게 질주했다.

적의 목표는 자신이다.

목표인 자신이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포위망이 점점 두터워질 뿐이다.

그러니 위험하던 말던 밀턴은 무조건 움직여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렇게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밀턴에게 두 가지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는 밀턴이 타고 있는 레너드.

마갑을 걸쳤다고 하지만 전신을 보호해주는 것은 아니다.

레너드의 몸 여기저기에는 이미 수십 개의 화살이 꽂혀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너드는 쓰러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힘이 펄펄 넘친다는 듯이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발을 멈추면 바로 화살이 쏟아지는 지금 상황에서 레너드의 끝없는 체력과 질주력은 밀턴에게 있어서 귀중한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점.

그것은 바로 제롬의 존재였다.

“내가 있는 이상 주군에게는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한다!”

평소 제롬의 이미지는 진중하고 침착한 기사의 표본 같은 남자였다.

밀턴이 알고 있는 기사들 중에서 가장 꼬장꼬장한 샌슨 역시 제롬을 향해서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을 정도로 진중한 성격이었다.

그런 제롬이 이 순간 악귀가 되었다.

밀턴의 앞에서 먼저 달리면서 자신의 주군을 위협하는 것을 다 베어 버리고 있었다.

가로 막는 것이 기마병의 천적이라는 장창기병이든, 두터운 중장보병이든 간에 제롬의 오러 소드를 견디지는 못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이며 밀턴이 전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제롬의 모습은 눈밭을 가르며 지나가는 제설차 같았다.

그때 공화국군에서도 제롬의 발을 묶기 위해서 수를 쓰기 시작했다.

고스트가 제롬을 노리고 움직였다.

열 명의 고스트가 제롬의 앞을 가로 막았다.

“후우…. 후우…. 이름을 밝혀라.”

자신을 가로 막은 고스트를 향해서 제롬이 호흡을 정돈하며 말했다.

“…….”

하지만 고스트들은 기사의 예법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조장으로 보이는 이가 수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품에서 비약을 꺼내 마셨다.

그 광경을 보고 제롬은 눈살을 찌푸렸다.

“약에 의존해서 경지를 높이는 것이냐? 비열한 것들.”

제롬도 고스트에 대한 정보를 얼추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저 비약이 어떤 물건인지도 말이다.

생명력을 끌어올려서 일순간 힘을 증폭시키는 비약이라니?

제롬이 보기에 저건 사도의 극치였다.

전쟁터에서의 생사는 그저 결과일 뿐.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적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는 것이 기사의 도리다.

하지만 저런 사도들 따위한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로 말이다.

“와라. 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제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 명 전원이 검에 오러를 품고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밀턴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전원 무력 80이상. 가장 높은 놈은 87?’

위험하다.

저건 고스트 중에서도 상당한 정예임에 틀림없었다.

제롬이 마스터라는 것을 알면서도 달려드는 것을 봐서는 승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일 것이다.

“제롬! 조심….”

“아아아아앗!!”

콰콰쾅!

밀턴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제롬은 고스트와 부딪혔다.

그리고 그 첫 격돌에서 열 명의 고스트 중에 두 명이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하지만 그 두 명이 공격을 받는 사이에 다른 여덟 명은 재빨리 제롬을 둥글게 포위했다.

거기다 다른 두 명도 자세를 바로 하고 제롬의 전방에 자리를 잡자 순식간에 제롬은 열 명의 고스트에게 포위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고스트가 손을 들어서 말했다.

“사냥의 시간이다. 놓치지 마라.”

‘사냥이라고?’

그 말에 제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라!”

그리고 제롬의 눈부신 분전이 시작되었다.

쾅! 콰쾅!

오러가 굉음을 내며 부딪히고 검이 빛살이 되어서 공간을 갈랐다.

한순간만 방심해도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간 속에서 제롬은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마치 하이에나 무리에 포위된 사자가 날뛰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사자는 강했다.

일대일로 붙으면 하이에나 따위는 단번에 물어 죽일 것이다.

하지만 하이에나들이 교활하게 수적인 우세를 내세워서 달려든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조금씩이지만 사자의 몸에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큭….”

제롬은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가는 고스트의 공격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리고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한 개의 검격이 자기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걸 피해서 머리를 숙이니 어느새 옆구리에 한 칼이 스치고 지나갔다.

“크으윽….”

제롬은 비틀거리며 말에서 떨어질 뻔한 것을 필사적으로 다잡았다.

‘위험하다. 이놈들은 능숙해.’

비록 방법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하나하나가 상당히 강했다.

거기다 무려 열 명이 합공을 하면서도 혼란스러움이 전혀 없다.

마치 이런 연습을 실제로 많이 해봤다는 듯이 말이다.

명예도 승부욕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전장의 실리만 추구한 그런 합공을 완숙하게 펼쳤다.

‘위험하다.’

제롬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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