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20화 (120/257)

제120화

“큭…. 결국은 안 되는 것인가?”

가장 마지막에 남은 바이슨 중장은 먼저 쓰러진 부하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손으로 저 밀턴 포레스트라는 거물의 목을 베어가고 싶었다.

그때 바이슨 중장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훗, 거물이라….’

이 전쟁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밀턴을 애송이로 취급했던 바이슨 중장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오산이었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만이었던가?

대륙의 서부 지역 약소국인 레스터 왕국에서 터무니없는 거물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걸 몰라본 죄로 자신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는지를 생각하면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행인건, 우리 공화국 쪽에도 그에 못지않은 괴물이 있다는 거지.’

바이슨 중장은 지크프리트를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있는 이상 여기서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공화국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이제 망설일 필요는 없다.’

생각을 정리하고 미련을 버린 바이슨 중장이 앞으로 말을 달려가며 외쳤다.

“내가 코브르크 공화국의 바이슨이다!”

바이슨 중장.

수십 년 동안 코브르크 공화국의 국경을 지켜온 뛰어난 장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경력은 좋게 남지 않는다.

말년에 밀턴 포레스트라는 거물과 마주한 것이 불운이었다.

그는 밀턴 포레스트에게 패배하고 공화국에 커다란 위기를 초래한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본인은 최후의 순간까지 도망가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용맹하게 싸우고 순사(殉死)하였고, 그로 인해서 마지막 명예는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바이슨 중장은 용감하게 돌격했지만 밀턴을 상대로 10합도 버티지 못하고 목이 날아갔다.

하지만 적의 총사령관의 수급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밀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이군.”

결국 바이슨 중장과 그 부관들은 최소한의 목적을 이뤘다.

그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성안에 불길은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밀턴은 이 불길 속에서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는 군대를 지휘하며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제롬.”

“예. 주군.”

“전군 반전해서 후퇴한다. 우리가 뚫고 들어온 동문으로 빠진다.”

“예. 알겠습니다.”

어렵다고 포기할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움직여야 살릴 수 있는 병력이 늘어난다.

‘동문으로 진입하면서 제롬이 문의 개폐 장치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렇다면 후퇴로 자체는 살아 있다는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밀턴은 말을 달려 동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서 밀턴이 본 것은….

“이럴 수가?”

성문 밖에서 역으로 안쪽을 공격해 오고 있는 공화국군이었다.

“와아아아!!”

“공격! 멈추지 말고 공격하라! 적은 독 안에 든 쥐다!”

“아군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마라!”

공화국군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퇴각로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밀턴은 그 공화국의 선두에 있는 정예병들을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고스트?”

검은색 해골 투구에 검은색 갑옷.

저건 틀림없는 고스트다.

지크프리트 직속의 정예 병력.

그리고 비앙카의 정보에 의하면 비약을 복용함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익스퍼트 수준의 강함을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병력이었다.

아직 저놈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것이 지크프리트의 직속 병력이라는 것이다.

그런 고스트가 눈에 보인다는 것은….

“왔구나. 지크프리트.”

밀턴은 이를 악물었다.

총사령관이 직접 자기 몸을 미끼로 쓰는 대범한 유인책.

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방어 거점인 리트인크 성을 통째로 태워서 희생 시키는 공성책.

생각해 보면 바이슨 중장 같은 노회한 장수에게서 이렇게 대범한 책략이 나왔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고스트를 보니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틀림없다.

이 모든 작전은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지크프리트….”

밀턴은 이를 갈면서 지크프리트의 이름을 되새겼다.

“지금쯤이면 내가 개입했다는 것을 깨달았겠군.”

지크프리트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리트인크 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유능한 장수와 중요한 거점 하나까지 희생양으로 써버렸군. 그 대신 네 목숨은 반드시 받아 가야겠다. 밀턴 포레스트.”

지크프리트는 확신이 있었다.

이 함정으로 밀턴 포레스트를 죽일 수 있는 확신 말이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밀턴은 주먹을 불끈 쥐고 고심에 빠졌다.

이미 성안은 불길에 휩싸였고, 유일한 탈출구는 공화국군이 틀어막고 있다.

거기다 지크프리트 직속의 정예 병력이 고스트가 성내로 들어와서 아군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크아악!”

“물러서지 마…. 큭….”

“이 공화국의 개…. 커억….”

여기저기서 아군의 병력이 줄어들고 있다.

병사와 기사들은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명령이 전달되지도 않았다.

명령체계가 마비된 군은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어디서 어떻게 손을 써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안 돼. 어떻게 해도 이건….’

절망감.

이제까지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이어가고만 있던 밀턴으로서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때 밀턴의 곁에 다가온 제롬이 큰 소리로 외쳤다.

“주군! 서둘러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런 제롬에게 밀턴이 살짝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어디로 탈출한단 말이냐? 유일한 탈출구를 공화국이 점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탈출….”

짝!

밀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감촉이 밀턴의 양 뺨에 와 닿았다.

제롬이 자기 양손으로 밀턴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쥔 것이다.

“주군,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주군이 패닉에 빠지면 모든 게 끝입니다.”

“…….”

“아직 살아 있습니다. 주군도! 저도!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도 모두 살아 있습니다. 주군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어서 지휘를 내려 주십시오!”

제롬의 간절한 말에 밀턴의 흐리던 눈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뺨에 와 닿은 건틀릿의 차가운 감촉.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제롬의 표정.

주변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며 싸우고 있는 기사들.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흐으으읍…. 후우우우우우….”

밀턴은 호흡을 최대한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래.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이상 포기하기는 일러.’

위기다. 그것도 대위기다.

적의 책략에 당해서 완전히 포위당해 버렸다.

하지만 지휘관인 자신이 망설여서는 계속해서 아군의 피해가 커지기만 할 뿐이다.

‘원론적으로 생각하자.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뭐지?’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탈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적이 단단히 틀어막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둘 중에 하나다.

저 탈출구로 돌격해서 적 포위망을 정면으로 뚫거나, 혹은 다른 탈출구를 만드는 것.

밀턴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제롬!”

“예. 주군.”

“너하고 나, 그리고 나머지 기사단은 동문으로 들어오는 공화국군을 막는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옛!”

“그리고 나머지 기사단은 병사들을 이끌고 흩어져라. 다른 곳의 성문을 열고 탈출한다. 밖에는 적의 포위망이 있겠지만 무조건 뚫어야 한다.”

“옛! 알겠습니다.”

밀턴의 지시에 기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추스르며 밀턴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죽도록 훈련시킨 보람은 있군.’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 군은 다시 추슬러서 움직인다는 것은 이 군이 엄하게 단련된 정예병이라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밀턴이 제롬과 함께 동문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는 사이에 다른 탈출구가 생긴다면 공화국군도 포위망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를 노려서 성 밖으로 나가서 탈출을 시도한다.

이게 밀턴이 생각한 방법이었다.

쉽지 않은 건 안다.

작전이 잘되어도 아마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 밀턴은 비장의 카드를 하나 풀기로 했다.

“제롬!”

“예. 주군!”

“전력을 다해도 좋다.”

밀턴의 명령에 제롬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확인을 받았다.

“괜찮겠습니까?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네 힘이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밀턴의 허락을 받은 제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롬은 가장 선두로 달려가며 크게 외쳤다.

“내가 제롬 테이커다! 죽고 싶은 놈들은 모두 나와라!”

제롬의 말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해골 갑옷을 입은 고스트가 제롬에게 달려들었다.

그 숫자는 다섯.

전원의 검에 선명하게 오러가 서려 있는 것을 봐서는 이미 비약도 복용한 듯했다.

심지어 그중에 두 명은 원래 꽤 실력자인 듯 중급 이상의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다.

“테이커 경!”

“위험합니다. 뒤로….”

그 광경을 보고 다른 기사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하지만 밀턴은 그저 담담하게 중얼 거릴 뿐이었다.

“보여줘라.”

그 다음 순간….

“아아아앗!!”

콰콰콰콰쾅!!

제롬의 검이 수평으로 휘둘러지면서 다섯 명의 고스트를 모두 쳐내 버렸다.

그 일격으로 다섯 명 중에 두 명이 죽었고 나머지 세 명도 크게 다쳤는지 입에서 피를 토했다.

단 일격에 다섯 명의 고스트를 떨쳐낸 제롬은 선두에서 당당하게 외쳤다.

“오늘 네놈들을 진짜 해골로 만들어 주마.”

그런 제롬의 검에는 마스터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드가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마…. 마스터?”

“테이커 경이 마스터라고?”

“오…. 오오오오!!”

“우오오오오!!”

병사들은 목이 찢어질 정도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 거렸다.

“가능하면 제롬의 경지는 비밀로 숨겨두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며 밀턴은 다시 한번 제롬의 상태창을 확인해봤다.

[제롬 테이커]

기사 LV.7

무력 - 93 통솔 - 80

지력 - 42 정치 - 25

충성 - 95

특성 - 용맹, 돌파, 냉철, 단결

용맹 LV.7 :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력이 올라가며 자기 지휘하에 있는 병력의 사기를 상승시킨다.

돌파 LV.8 : 기마대를 이끌고 적의 진형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레벨이 높을수록 더 강한 돌파력을 발휘한다.

냉철 LV.5 : 전투 중에 전황 전체를 보는 안목이 높아진다. 현장 지휘관으로서의 유연함을 발휘해서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단결 LV.3 : 위기 상황에도 부하들을 흐트러짐 없이 통솔할 수 있다. 매복이나 야습 같은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다.

정치를 제외한 모든 능력이 상승했다.

특히 무력 93이라는 숫자는 제롬이 마스터에 오른 시간이 제법 되었다는 말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제롬이 마스터에 오른 것은 1년 전의 일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제롬을 보고 밀턴은 놀라지 않았다.

제롬의 성장세를 봐서 그 정도는 당연히 예정된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나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이 더 놀라웠다.

보통 마스터, 아니 익스퍼트의 경지에만 올라도 충성심이 약간 내려가는 기사들이 많았다.

자신의 능력이 상승하는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 모시는 주군이 그런 욕심을 적절하게 만족시켜 주지 않을 때는 모시는 주군, 심할 때는 나라를 바꾸는 기사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제롬은 마스터라는 지고의 경지를 이룩하고 나서도 충성심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티끌만한 사심도 없는 그의 충성심에 밀턴은 감탄했고, 그런 제롬을 믿었기에 다소 무리한 부탁을 했다.

경지를 숨기고 있어달라는 부탁 말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무리한 것을 넘어서 일견 가혹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부탁이었다.

기사라면 누구나 명예를 바란다.

그리고 마스터의 경지라는 것은 기사들에게 있어서 지고의 명예 그 자체였다.

찬란하게 빛내고 그 위광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명예욕이 제롬이라고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밀턴은 제롬의 전력을 비장의 카드로 숨겨두기 위해서 경지를 숨기라는 부탁을 했다.

제롬은 이 부탁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순순히 그러겠다고 응했다.

고맙고 미안한 감정을 동시에 느낀 밀턴이 말했다.

[제롬 테이커, 너는 나에게 과분한 존재다.]

실질적으로는 별 보상도 없는 그 단순한 말 한마디만으로도 제롬의 충성심이 더 올랐다.

그 정도로 제롬은 우직하고 강직한 기사였던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