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하지만 민간인 징병이 쉬울까? 잘못하면 악감정만 생기지 않을까?”
“여기는 공화국이잖습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 그렇군.”
공화주의라는 이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자, 라는 문화가 팽배한 것이 공화국이다.
만약 그런 분위기가 되었을 때 동참하지 않고 뒤로 빠지면 거의 인간 말종 취급하는 곳이 공화국이었다.
민중을 약간만 부추기면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처럼 쉽게 함락하지는 못하겠군.”
볼로나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래도 열흘 안에는 떨어트릴 겁니다.”
“열흘이라?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소?”
“전쟁이란 언제 어떤 변수가 개입할지 모르죠. 그러니 확실한 기회를 잡았을 때 그만큼의 성과를 내고 싶습니다.”
밀턴은 그렇게 말하며 세비안 자작을 바라봤다.
‘아직은 괜찮나?’
‘괜찮습니다.’
두 군신은 짧지만 빠르게 의견을 교환했다.
밀턴은 세비안 자작에게 지크프리트가 개입할 수 있으니 북부 전선의 동향을 계속 파악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리고 세비안 자작이 아직까지 별말이 없다는 것은 북부에서 원군이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리트인크 성의 공성에 집중하자.’
밀턴과 볼로나 후작이 이끄는 6만의 대군이 리트인크 성에 당도했다.
성을 눈앞에 둔 밀턴은 은은하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벨스 성과 호르니 성을 포기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성이군.”
직접 두 눈으로 본 리트인크 성은 굉장히 견고하고 완벽해 보였다.
성벽은 높고 튼튼했고 그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의 넓이도 5미터는 되었다.
성문은 도개교 형태이기 때문에 파성추를 이용해서 성문을 직접 두들기는 것은 불가능했고, 해자의 존재 때문에 사다리나 갈고리를 걸고 올라가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이제까지 여러 성을 공격해본 밀턴이었지만 그 모든 성들 중에서도 리트인크 성이 가장 튼튼하고 어려워 보였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국경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어쩌지? 이렇게 되면 열흘은 조금 힘들지도….’
밀턴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오면서 볼로나 후작이 말한 것처럼 일부 병력을 빼서 후방을 공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성벽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온 세비안 자작이 밀턴에게 말했다.
“주군, 공성을 위한 계책을 마련해 왔습니다.”
“가능할 것 같은가?”
“예. 꽤 어려운 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방법은 몇 가지 있을 듯합니다.”
“몇 가지….”
밀턴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보기만 해도 어려움을 느끼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세비안 자작은 이 성을 공격할 수가 몇 가지나 있다고 한다.
“일단 들어볼까?”
“예. 쓸 만한 방법은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주군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사흘 만에 이길 수 있지만 피해가 큰 작전과 보름은 걸리겠지만 피해가 적은 작전이 있습니다.”
“나에게 선택하라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세비안 자작의 말에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름은 길어. 길긴 한데….’
밀턴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흘짜리 작전을 하면 우리 피해가 얼마나 큰가?”
“최소 2만에서 4만 정도는 될 겁니다.”
“반 이상이 죽어나간다고?”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할 성입니다.”
밀턴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말을 이었다.
“보름짜리는?”
“5,000 이하. 어쩌면 2,000 이하일 수도 있습니다.”
“후우우….”
‘이걸 선택지라고 주다니?’
밀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면 빠르게 공략하고 싶었다.
북부 전선에서 적의 원군이 오기 전에 이곳의 전황을 결정짓고 싶었다.
하지만 두 작전에서 발생하는 전사자의 숫자 차이가 너무 컸다.
밀턴이 평범한 귀족이라면 병사들의 목숨보다 자신의 전공을 우선시했겠지만….
“어쩔 수 없지. 보름짜리로 가세.”
“알겠습니다. 주군.”
밀턴의 대답을 들었을 때 세비안 자작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주군의 성품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나오실 거라고 생각했지.’
지금 세비안 자작은 밀턴에게 이런 대답이 나오도록 일부러 유도를 한 것이다.
물론 그가 밀턴에게 한 보고에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다소의 과장은 있었다.
사흘 만에 공략한다는 것은 전면적인 총공세를 펼치겠다는 것인데….
사실 그렇게 해도 사상자는 1만 이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트인크 성이 튼튼하고 견고해 보이기는 했지만 이쪽에서도 몇 개의 숨겨진 카드가 있다.
처음부터 레스터 왕국군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이 전쟁이 자국의 전쟁이 아니라 타국에 원정을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정면으로 공성을 해서 순수하게 힘으로 리트인크 성을 공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비안 자작은 과장된 결과를 보고하며 밀턴의 선택을 유도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밀턴을 향한 충성심이 문제가 생겨서?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밀턴을 향한 세비안 자작의 충성심은 굳건하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밀턴이 이 전쟁을 잘못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였다.
‘주군은 지크프리트를 너무 의식하신다. 이 전쟁은 차분하게 진행해도 충분한 전쟁인데 과하게 전력을 쏟고 있어.’
세비안 자작은 생각했다.
때로는 주군을 위해서 맞서는 것도 책사인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이다.
그는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다독이며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사실, 세비안 자작도 성격상 이런 행동은 내키지 않았다.
세비안 자작의 성격상 주군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그냥 직설적으로 지적을 하는 게 좋았다.
괜히 말을 돌리고 유도하는 것은 그의 성격상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세비안 자작에게는 과거 스카이트 1왕자의 군에 소속되었을 때의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쟁.
세비안 자작에게 있어서는 실전에 투입된 첫 전쟁이었고, 또 무참하게 패배한 전쟁이기도 했다.
그때 세비안 자작은 과감하고 직설적으로 1왕자에게 직언을 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스카이트 1왕자 그 머저리가 폭주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차기 국왕이건 뭐건 간에 세비안 자작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독한 쓴소리를 했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1왕자는 세비안 자작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지어 참모진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결국 1왕자의 군은 처참하게 패배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 전쟁은 세비안 자작의 기억 속에서 나름 트라우마로 남았다.
비록 자신이 완전히 배제되기는 했지만 자신이 속한 군이 그렇게 처참한 패배를 했다.
심지어 그것이 처음으로 참여한 전쟁이었던 만큼 세비안 자작의 기억에는 더욱더 선명하게 남았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스승 트라우스 후작이 한 말도 기억에 남았다.
[쯧, 같은 말이라고 해도 가려서 하는 방법이 있지 않느냐? 스카이트 왕자 전하의 성품을 알고 있으면서 어찌 물러날 줄을 몰라.]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스승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 말을 곱씹다 보니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재능을 과신했다.
그저 옳은 말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상대가 다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왜? 자신의 생각이 옳으니까.
명백한 오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때 1왕자군의 처참한 패배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 세비안 자작의 사고는 너무 멀리 간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세비안 자작은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으며, 그 재능을 자각하는 만큼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때때로 유능한 인재의 사고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에 빠지고는 한다.
지금 세비안 자작의 경우가 딱 이렇다.
밀턴에게 직언을 했다가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괜히 밀턴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유도했다.
주군인 밀턴의 전쟁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한 일이긴 하지만 3년 전의 세비안 자작이라면 절대 생각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애당초 결과를 유도한다는 것은 주군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잠재적 의식이 깔려 있기에 나오는 판단이다.
아주 작은….
밀턴이 이끄는 군세에 정말 아주 작은 균열이 발생했다.
밀턴에게 허락을 받은 세비안 자작은 우선 리트인크 성을 빈틈없이 포위했다.
그리고 밀턴과 볼로나 후작에게 자신의 작전을 설명했다.
“적을 포위해서 고사시킬 생각입니다.”
간단하게 목적을 말한 세비안 자작에게 밀턴이 말했다.
“리트인크 성은 평소에 많은 물자를 비축한다고 하던데? 과연 고립 작전이 의미가 있겠나?”
성을 철저하게 포위해서 고립시킴으로 인해서 적을 말라 죽게 하는 방법도 있기는 있다.
다만, 그 작전이 효과를 보려면 두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
1. 고립시키는 성에 군량이 충분하지 않을 것.
2. 고립되는 기간 동안 적의 원군이 오지 않을 것.
이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적을 효과적으로 고사시킬 수 있다.
하지만 밀턴이 알기로 리트인크 성은 원래 물자를 비축하고 전방의 요새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던 성이다.
고작 보름 만에 식량 사정이 나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주군께서 염려하는 대로, 적의 식량은 아마 충분할 것입니다. 아마 반년은 너끈하게 버티겠지요.”
“그렇다면 고립 작전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지 않나?”
볼로나 후작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웃으면서 말했다.
“식량도 절박하겠지만…. 제가 노리는 것은 인간에게 보다 절실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절실한? 그게 뭔가?”
의문스러운 볼로나 후작과 달리 밀턴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물, 식수를 건드릴 생각인가?”
“예. 바로 그겁니다. 인간은 물 없이는 사흘도 버티지 못하는 법이죠.”
세비안 자작의 말에 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적의 식수원을 끊을 수만 있다면 확실히 상책 중에 대상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라는 것이다.
“성내의 우물이 몰래 접근해서 독을 풀면 되겠군. 그렇다면 우선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결사대를 모집해야겠어.”
볼로나 후작 역시 좋은 생각이라고 느꼈는지 한 목소리를 거들었다.
하지만….
“볼로나 후작님. 제 첩보에 의하면 리트인크 성내의 우물은 여덟 개가 있다고 합니다.”
“으음…. 좀 많군.”
“성내에 결사대를 침입시켜서 우물 여덟 개를 못 쓰게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차라리 성문을 열겠죠.”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의 식수원을 끊겠다는 건가?”
“간단합니다. 우물에 직접 손을 쓰는 게 아니라, 우물에 물이 흐르는 지하 수맥 자체를 손 볼 것입니다.”
“지하 수맥이라고?”
밀턴은 깜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좋은 생각이었다.
만약 잘해서 지하 수원을 끊을 수만 있다면 적의 식수원을 완벽하게 고갈시킬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저렇게 거대한 성에 물을 공급해주는 지하 수맥을 어떻게 찾지? 그리고 찾는다고 해도 수맥을 건드리려면 대규모 공사가 필요할 것인데?”
“잊으셨습니까? 주군. 우리 군에는 수맥 탐사와 건축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전문가?”
밀턴은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약혼녀인 소피아가 가장 그쪽으로 접근해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이 전쟁에 그녀를 데려 오지는 않았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밀턴의 질문에 세비안 자작은 은근히 눈치를 주며 말했다.
“이런, 잊으셨습니까? 그 비앙카 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아. 과연, 그렇군.”
이제야 기억이 났다.
군에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는 극비였기 때문에 볼로나 후작의 앞에서 알려줄 수는 없었지만 비앙카라면 수맥을 탐사하는 것도, 그 수맥에 손을 쓰는 것도 가능했다.
과거에 영지 개발을 하는 과정에 소피아가 지하수로 인한 지반 침하를 고민하고 있을 때 실제 비앙카가 나서서 해결해 준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