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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16화 (116/257)

제116화

부하들이 화살로 비를 퍼붓는 역할이라면 트라이크의 역할은 그 빗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표적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거대한 장궁에 활을 메긴 트라이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 가라.”

동시에 화살 하나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트라이크의 활은 코브르크 공화국의 특수 석궁보다 더 빠르고 강하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성벽 사이의 요철을 지나서 지휘관의 목에 꽂혔다.

“반격을…. 커억!”

“프레지 준위님!”

“준위님이 화살에 맞았다. 어서 후송…. 컥….”

“돌라체 상사! 빌어먹을 이게…. 큭…. 끄르르르….”

성벽에서 현장을 지휘하던 장교들이 저마다 목에 화살을 맞고 죽어나갔다.

그중에는 익스퍼트도 있었지만 그들이 낌새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화살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리고, 지휘관들이 죽자 병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적…. 적이 올라옵니다!”

“화살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여기도 적이 올라…. 커억!”

가뜩이나 병사가 적은 상황에서 지휘관이 죽는다는 것은 사실상 군대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말이다.

성벽의 여기저기서 갈고리를 타고 연합군의 병사들이 올라왔다.

“성벽 위의 거점을 확보하라!”

“적은 소수다! 몰아쳐라!”

성벽 위에 올라온 병사들은 그대로 적을 몰아쳤고, 어느새 그들은 성벽을 넘어서 성문까지 점거했다.

그리고 성문이 열린 순간….

“돌격!”

“와아아아아!!”

제롬을 선두로 해서 기사단이 성안으로 돌입했다.

성을 넘어서 성문을 열고 기마대를 투입.

공성전의 정석 같은 전투였다.

적의 병력이 적다고 해도 벨스 성처럼 커다란 성을 하루 만에 떨어트린 것은 실로 대단한 전과였다.

“항복하라! 투항하면 목숨은 보장하겠다!”

제롬이 선두에서 큰 목소리로 항복을 권했고, 처음부터 절망적인 전투를 수행했던 공화국 병사들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고 손에서 무기를 놔 버렸다.

“대단해. 저렇게 커다란 성을 하루, 아니 반나절 만에 함락하다니?”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바이올렛 공주는 성벽위에 레스터 왕국군의 깃발이 걸리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그 옆에서 그녀의 측근 기사인 칼 토마스가 말했다.

“얘기로 듣던 것보다 레스터 왕국군의 강함이 더한 것 같습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바이올렛 공주의 표정에는 수심이 떠올랐다.

적대 국가는 아니지만 플로렌스 공국은 레스터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국가이다.

이웃 나라가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웃 나라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에 하나다.

그 나라도 함부로 덤빌 수 없는 수준까지 군사력을 증강시켜서 맞서거나?

혹은 외교적으로 동맹을 맺고 탄탄한 우호 관계를 만들거나?

그리고 플로렌스 공국의 국력을 생각할 때 군사력의 증강에는 한계가 있었다.

“레스터 왕국과 우리 공국의 관계를 좀 개선할 필요가 있겠군요.”

“어떤 방식으로 말씀입니까?”

“적어도 지금처럼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관계는 아니어야죠. 군사력 동맹 조약이나 경제적 무역 확대 등을 추진해야겠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죠.”

바이올렛 공주의 논리적인 말에 칼 토마스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아니… 아닙니다.”

‘우리 공주님 맞아?’

평소 정치적인 안목이 서툰 바이올렛 공주의 생각이 여기까지 뻗었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능하겠습니까?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공국 내에서 공주님의 발언은 그렇게 영향력이 강하지 않습니다. 공주님이 동맹의 필요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아마 국내의 동의는 얻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동의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견제하는 세력이 격렬하게 반대를 할 뿐이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해야 해요. 저 군대를 전장에서 적으로 만난다고 생각해 봐요. 얼마나 끔찍한지.”

그렇게 말한 바이올렛 공주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여차하면 내가…. 아니, 그건 아직 이른가?”

너무 작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주변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밀턴이 벨스 성을 하루 만에 점령하고 사흘 후에는 볼로나 후작이 호르니 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쯧, 늦어 그 아저씨.”

밀턴은 살짝 불평을 했지만 사실 볼로나 후작이 늦었다기보다는 밀턴이 빠른 것이었다.

“이제 두 개의 거점을 함락시켰다. 이제 리트인크 성까지 함락하면 이 동부 전선에서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력은 완전히 상실되는 거겠지?”

밀턴의 물음에 세비안 자작이 답했다.

“예. 이 방어 라인만 돌파하면 코브르크 공화국 내부는 얼마든지 휘저을 수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바로 군을 움직이지. 볼로나 후작에게도 연락해서 시기를 맞추도록 해.”

이제 하나 남은 리트인크 성을 공격할 차례였다.

본의 아니게 조금 시간을 끌고 말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빠른 편이었다.

‘지크프리트. 그놈이 아무리 전쟁의 천재여도 방어 거점이 모두 함락되면 수가 없겠지.’

거기까지만 가면 이 전쟁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밀턴은 그렇게 확신했다.

***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의 마지막 거점 리트인크 성.

그 성의 가장 높은 첨탑에 한 명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통 이 첨탑은 중죄인을 격리 조치하기 위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있는 남자는 이 성의 최고 책임자인 바이슨 중장이었다.

그가 스스로를 이 첨탑의 독방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이슨 중장의 앞에는 지크프리트가 냉정한 눈을 하고 서 있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할 말이 없다. 그냥 죽여라.”

지크프리트의 앞에 나선 바이슨 중장은 삶에 미련이 없었다.

그 스스로가 하찮은 질투심에 냉정을 잃고 국가에 큰 피해를 입혔다는 자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하나 죽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크프리트의 차가운 말에 바이슨 중장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패장은 죽음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죽음을 각오한 바이슨 중장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었다.

“놀고 있군.”

“…….”

“전쟁에서 승패는 그저 결과일 뿐이지. 그 결과 자체에 일일이 책임을 물었다간 공화국 장교의 90퍼센트는 목을 쳐야 할 거다.”

“…….”

“패장? 네놈은 패장조차 아니다. 중앙에서 내려온 군령을 어기고 멋대로 폭주한 결과 이 전쟁 전체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지. 그런데 마치 열심히 싸우고 패배한 것처럼 자신을 포장해? 주제를 알아라.”

모욕감, 치욕감이 휘몰아쳐서 바이슨 중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바이슨 중장에게 지크프리트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네놈은 패장이 아니다. 그냥 쓰레기일 뿐이야.”

“크윽….”

바이슨 중장은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무엇보다 분한 것은 지크프리트가 하는 모든 말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수십 년을 군에 종사하면서 나라를 지켜왔다.

그렇게 한평생 쌓아온 긍지와 명예가 한순간의 실수로 시궁창에 처박혔다.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이보다 분할 수 있을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바이슨 중장의 절망을 충분히 알았는지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만약….”

바이슨 중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쓰레기로 죽는 것이 싫다면 한 번은 기회를 줄 수 있다.”

“기회라고?”

“그렇다. 할 수 있겠나?”

“하겠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내 명예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겠다.”

바이슨 중장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고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지크프리트는 바이슨 중장에게 한 가지 작전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작전에서 바이슨 중장이 맡아야 할 역할까지 말이다.

“…네놈. 제정신이냐?”

바이슨 중장은 분명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바이슨 중장조차 지금 지크프리트의 말을 다 듣고 나니 망설임이 생겼다.

“왜 그러지? 뭐든지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목숨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망설이는 바이슨 중장에게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쓰레기로 죽을 것이냐? 아니면 나라를 지키고 공화국의 영웅으로 죽을 것이냐?”

바이슨 중장에게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악마로 보였다.

달콤한 대가를 제시하며 영혼을 거둬가는 악마 말이다.

그리고 절박한 인간일수록 악마의 유혹에는 쉽게 흔들리는 법이다.

“…하겠다.”

“현명한 선택이다.”

바이슨 중장을 간단하게 구워삶은 지크프리트는 첨탑을 내려가며 중얼 거렸다.

“밀턴 포레스트. 내 생각보다 더 거슬리는 놈이야.”

설마하니 그 탄탄하다는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무력화시킬 줄은 몰랐다.

역시 그때 전력으로 죽여 놓는 게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으로 든 생각은 아직 늦지 않았다, 라는 것이었다.

“이 땅에 네놈 묘지를 만들어 주마.”

지크프리트의 칼날이 밀턴을 향해서 겨누어졌다.

“어서 오시오. 포레스트 후작.”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오. 볼로나 후작.”

밀턴과 볼로나 후작은 리트인크 성 공략을 위해서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둘은 각각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왔는데 합쳐서 6만의 군세가 되었다.

이제 안정화되고 있는 후방의 다섯 요새와 벨스 성과 호르니 성에 주둔시킨 병력을 제외하고 가용 가능한 병력 전부를 움직인 것이다.

“사실 지금의 리트인크 성이라면 4만 정도로도 충분히 공략 가능하다고 보는데 말이오.”

군의 선두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볼로나 후작이 말했다.

‘호르니 성을 공략하는 데 사흘이나 걸린 인간이 말은….’

밀턴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래도 가능하면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군의 피해가 적은 법이죠.”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4만으로 공성을 하고 나머지 2만을 우회시켜서 코브르크 공화국의 본토를 뒤집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목적이었냐?’

방금 볼로나 후작의 말에서 밀턴은 본심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볼로나 후작은 밀턴에게 공성전을 맡기고 자신은 후방으로 가서 코브르크 공화국의 본토를 공격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고생은 밀턴이 하고 자신은 쉽게 큰 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밀턴은 피식 웃으며 볼로나 후작에게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오. 그렇다면….”

“후작님이 공성을 맡아 주신다면 제가 코브르크 공화국을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헤집어 놓겠습니다.”

밀턴의 말에 볼로나 후작의 얼굴이 벌레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그는 재빨리 표정을 되돌리고 태연하게 말했다.

“크흠…. 아니, 생각해 보니 우선은 공성전에 집중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국경선의 마지막 보루이니만큼 적도 결사적으로 반항하겠죠.”

“후작님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죠.”

밀턴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서 사람을 재주 부리는 곰 취급하려고 하고 있어?’

과거 서부 전선에서 스트라부스 왕국 소속으로 활동해본 밀턴은 알고 있었다.

이 나라의 무장들이 얼마나 전공에 목말라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밀턴도 당시 큰 공을 세우고 그 대부분을 상부에 빼앗겨야 했다.

다만, 이제는 밀턴도 직위와 권위가 생겼다.

예전처럼 순순히 공적을 양보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간단하게 보로나 후작의 수작질을 제거해버린 밀턴은 이제 공성에 집중하기로 했다.

“벨스 성과 호르니 성을 공략하면서 별로 손맛을 보지 못했다면, 역시 남은 병력은 리트인크 성에 집중되어 있다고 봐야겠군요.”

밀턴의 말에 볼로나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소?”

벨스 성과 호르니 성에 상주 중인 병력은 5,000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코브르크 공화국의 병력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해도 너무 적었다.

“세비안.”

“부르셨습니까? 주군.”

밀턴이 뒤쪽에 있는 세비안 자작을 불렀다.

“자네가 보기에 리트인크 성에 상주 중인 병력은 얼마라고 예상하나?”

세비안 자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는….

“아마, 2만에서 3만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2만에서 3만? 그 정도나 남았다고?”

“예. 벨스 성과 호르니 성의 공략이 쉽게 이뤄진 것은 그들이 두 개의 성을 거의 버리다시피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남은 병력 전부를 리트인크 요새에 집중시켰을 것입니다.”

“그래도 많지 않나? 계산상으로 이제 적들에게 남은 병력은 1만 정도여야 하잖나?”

“아마, 전방의 요새가 넘어갈 때 후퇴시킨 병력을 흡수했을 겁니다. 그리고 급하게 민간인 징병도 했겠죠. 수성전은 민간인도 충분히 거들 수 있는 전투니까요.”

“그렇기는 하지.”

밀턴은 전생의 역사에서 배운 행주산성의 전투가 기억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 전투는 권율의 지휘하에 관민(官民)이 하나가 되어서 적에게 맞서 싸운 수성전이라고 했다.

민간인이라고 해도 수성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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