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전멸(全滅).
성벽 위에서 아군 기마대가 무참하게 괴멸당하는 것을 보고 볼로나 후작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한 명도 못 돌아오는 건가?”
‘멍청한 놈의 폭주 하나 때문에 아까운 기마 병력만 잃었군.’
볼로나 후작은 험악한 얼굴을 하고 전령에게 말했다.
“전령!”
“옛! 부르셨습니까?”
“내 허가 없이 요새의 문을 열어준 자를 참수하고 그 목을 장대에 높게 걸어라!”
“옛.”
“그리고 전군에 다시 한번 고한다. 내 명령이 있기 전에는 절대 요새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이를 어기면 전사 후에도 가문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옛. 즉시 전하겠습니다.”
볼로나 후작의 서슬이 퍼런 명령에 전령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볼로나 후작은 요새 밖을 쳐다보며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앞으로 사흘. 딱 사흘만 기다리면 백배로 갚아줄 수 있다.”
“마치 거북이를 상대하는 것 같군.”
바이슨 중장은 사흘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적을 공격했다.
메라노 요새뿐만 아니라 볼차노 요새까지 오가면서 쉬지 않고 적을 괴롭혔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적의 요새에 화살을 퍼부었다.
소요새의 성벽은 낮게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특수 석궁의 사거리라면 충분히 안전한 거리에서 요새의 안쪽에 주둔 중인 병력까지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공격을 하고 있음에도 적들의 반응은 첫날에 기마대 하나가 튀어나온 것 말고는 없었다.
‘이상하군. 보통 이 정도로 두들기면 참지 못하고 요새를 버리고 후퇴할 텐데? 어째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만 있는 거지?’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는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슨 중장의 안에서는 이유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첩보에 의하면 지금 메라노 요새를 점령하고 있는 게 볼로나 후작이라고 했었나?”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상해. 이렇게 무능한 인간은 아니었는데?”
이 전선에서 오랜 시간 동안 싸워온 적인 만큼 바이슨 중장은 볼로나 후작을 어느 정도 알았다.
그렇게 큰 전과는 없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동부 전선의 방어를 맡길 정도의 능력은 있는 남자였다.
적이긴 해도, 아니 오히려 적이기에 능력만큼은 더 인정했던 상대였다.
그런데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이라니?
“이상해. 너무 이상해.”
바이슨 중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옆에서 작전 참모가 말했다.
“이번 전쟁의 주도권은 볼로나 후작이 아니라 밀턴 포레스트라는 애송이가 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소국의 애송이가?”
“어쨌든 그 애송이가 대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니까요.”
“일리가 있군.”
적의 대응법이 달라진 것은 사령부의 교체가 원인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이상한 상황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는 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 애송이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나?”
“밀턴 포레스트는 병력 5,000을 가지고 브루니코 요새를 공격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브루니코 요새의 상황은?”
“여전히 2입니다.”
“훗, 원군조차 필요 없다는 건가?”
“예. 적이 방벽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분 좋은 보고에 바이슨 중장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역시 애송이였군.”
코브르크 왕국의 석궁은 유격 부대로 활동할 때도 강하지만 수성을 할 때도 유리하다.
방벽의 높이를 낮게 설계한 소요새는 방어력이 낮지만 그 벽 위에 특수 석궁병을 배치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수성전에서도 특수 석궁은 훌륭한 전력이 된다.
정상적인 공성전이라면 2,000의 병력으로 그 다섯 배가 넘는 적을 막아낼 수도 있다.
그걸 모르고 무작정 공성을 해봐야 아까운 병력만 말아먹을 뿐이다.
‘그런 애송이한테 지다니…. 역시 지크프리트라는 놈도 별것 아니었어.’
이대로 가면 이 전쟁은 이겼다.
볼로나 후작과 달리 밀턴 포레스트라는 애송이는 자신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애송이일 뿐이다.
그러니 이기는 것이 당연했다.
불안감이 사라지고 승리를 확신하는 바이슨 중장에게 전령이 다가왔다.
“바이슨 중장님. 화살의 예비량이 10분의 1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벌써? 하긴… 매일같이 퍼붓고 있으니 당연하군.”
사흘 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적을 공격했다.
화살의 소비량이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까운 리엔츠 요새에서 보급을 받는다. 즉시 전령을 보내도록.”
“옛. 알겠습니다.”
그때 바이슨 중장은 자신의 막사 한쪽에 쥐 한 마리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봤다.
‘무슨 쥐가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는군.’
별난 광경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움직인데이.”
“방향은 어디입니까?”
“리엔츠 요새란다.”
“예. 알겠습니다.”
비앙카의 말 한마디에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은 전서구를 여기저기로 날렸다.
그리고 그것이 반격의 신호탄이었다.
“드디어인가?”
전서구로 연락을 받은 볼로나 후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문을 열어라! 그리고 준비한 병력을 출진시켜라!”
“옛! 알겠습니다.”
그리고 메라노 요새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참고 참았던 스트라부스 왕국군이 나왔다.
“전군 돌격하라!!”
“와아아아!!”
“사악한 공화주의자들을 죽여라!”
요새 밖으로 튀어나온 스트라부스 왕국 군은 넓게 퍼져서 석궁 기병을 향해서 달렸다.
“갑자기 공격이라니?”
이제 슬슬 화살의 보급을 위해서 잠시 물러날 생각이었던 바이슨 중장으로서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은 화살은?”
“예비량의 10분의 1입니다. 공격 횟수로 치면 20~30회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딱 전투 1회분 정도인가?”
나쁘지 않았다.
산개해서 몰려오는 적들을 보며 바이슨 중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이대로 그냥 후퇴한다고 해도 충분한 전과를 올렸다.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적을 두들겼으니 적들도 상당한 피해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움츠리고 있던 거북이가 드디어 껍질 밖으로 고개를 내민 상황이 아닌가?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1회분의 전투는 수행할 만큼 화살이 남았고…. 좋아. 마지막으로 한 건 하고 가도록 하자.’
결심을 굳힌 바이슨 중장이 명령했다.
“전원 승마 상태로 조준하라! 사거리 안에 들어온 적부터 순차적으로 섬멸한다!”
바이슨 중장의 명령에 따라서 석궁기병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명령에 신속하게 반응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그 모습은 실로 정예병다운 모습이었다.
“쏴라!”
그리고 화살이 하늘을 날아올라 적에게 쏟아졌다.
“산개! 산개하라!”
“뭉치지 마라!”
“보병은 정면! 기병은 측면으로 달려라! 포위망을 만들어라!”
적의 공격에 스트라부스 왕국의 장교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병사들을 산개시켰다.
그러면서 내구력이 좋은 중장 보병에게 정면으로 내밀며 기병을 신속하게 우회 기동시켰다.
그 결과 정면으로 달려오는 보병들이 약간의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큭…. 으윽….”
“돌격! 발을 멈추지 마라!”
병사들을 독려하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지휘관들을 보며 바이슨 중장은 혀를 찼다.
“쯧, 역시 익숙한 상대다 보니 생각보다는 성과가 없군.”
지금 스트라부스 왕국군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코브르크 공화국의 석궁기마대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가장 근접 답안이었다.
석궁 기마대의 장점은 두 배에 달하는 사거리와 빠른 발이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전투력은 크게 반감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트라부스 왕국군이 만들어낸 대응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보병을 정면으로 밀고, 발이 빠른 기병을 넓게 우회시켜서 포위망을 구성하는 것이다.
물론 실피드종을 타고 있는 코브르크 공화국의 석궁기마대를 포위망 안에 가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운 좋게 일단 가둘 수만 있다면 적을 확실하게 물리칠 수 있었다.
실제 몇 번인가 미숙한 지휘관이 운용하는 석궁기마대가 포위망에 갇혀서 전멸한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휘관이 미숙할 경우에나 벌어지는 요행수다.”
바이슨 중장은 빠르게 전장을 살폈다.
그리고 즉시 활로를 찾고 지시를 내렸다.
“오른쪽의 기마대를 먼저 조준한다! 포위망을 구성하게 하지 마라!”
“옛!”
스트라부스 왕국군의 이 작전은 전방에 중장보병을 진격시키며 그사이에 기마대로 포위망을 구성해야 성립된다.
그러니 정면의 중장보병은 무시하고 우선은 좌우에 펼치고 있는 기마대의 날개를 꺾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전투에서 지휘관들이 실수하는 이유는 정면에서 좋은 표적이 되어주는 중장보병을 공격하느라고 좌우의 기마대를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바이슨 중장의 경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쏴라!”
정확한 지휘관의 지시에 오른쪽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기마대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크악!”
“끄아악!”
무장이 무거운 중장보병과 달리 포위망 구성을 위해서 달려간 기마대는 경기병이었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석궁에 그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으며 고꾸라졌다.
“활로가 열렸다! 전군 나를 따르라!”
바이슨 중장은 직접 선두에 서서 퇴각의 방향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지시를 내려 스트라부스 왕국군의 병력에 계속해서 피해를 입혔다.
“큭….”
“으윽….”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쓰러졌고, 볼로나 후작은 큰 목소리로 아군을 독려했다.
“겁먹지 마라! 기마대는 산개하라! 포위망을 다시 구성해라. 적의 발을 멈출 수 있다면 그때가 우리의 승기다!”
거기에지지 않고 바이슨 중장도 목소리를 높였다.
“겁먹을 것 없다. 굼벵이 같은 적 기마대는 우리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자율적으로 기동 사격하며 적을 섬멸하라!”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지휘관들이 전쟁에서 만났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아군을 지휘했다.
그 결과….
“쯧, 생각보다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군.”
“역시 못 잡는 건가? 망할 실피드종 같으니라고.”
서로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바이슨 중장은 원하는 만큼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볼로나 후작은 전군을 동원하고도 적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득실을 논하라면 이 전투에서 얻은 것이 있는 사람은 바이슨 중장이었다.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피해를 입혔다.
‘슬슬 화살도 떨어져 가고….’
전쟁에서는 물러나야 할 시기를 잘 알아야 하는 법.
그는 미련 없이 명령했다.
“전선을 이탈한다! 전군 전속력으로 내 뒤를 따르라!”
그리고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있는 힘껏 달려갔다.
실피드종의 말들이 본격적으로 전력 질주를 하자 놀라운 속도가 나왔다.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힘의 낭비 없이 빠르게 달려가는 그 모습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들은 바람처럼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후작님. 적이 이탈합니다. 즉시 추격을….
“아니, 그만둬라.”
볼로나 후작은 알고 있었다.
석궁기마대가 작정하고 달리면 아군의 기마대로는 절대 따라갈 수가 없다.
추적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다.”
굳이 ㅤㅉㅗㅈ아갈 필요도 없었다.
적을 놓쳤지만 볼로나 후작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전선을 이탈한 바이슨 중장은 군의 전열을 확인했다.
“군의 상황은?”
“건재합니다. 희생자는 100명 이하입니다.”
전령의 보고에 바이슨 중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래야 최강의 유격 부대지.”
사흘 내내 적을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군의 피해는 1퍼센트 이하다.
이런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석궁기병대의 특수함과 그 특수함을 완벽하게 살려내는 자신의 지휘 능력 덕분이다.
“다만 화살의 보급은 정말 시급합니다. 이제 전체 사격은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다. 그럼 바로 보급을 위해서 이동하지. 리엔츠 요새에는 연락해 두었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서두르지. 보급이 최우선이야.”
“옛!”
그리고 바이슨 중장은 최단거리로 리엔츠 요새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