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흐음….”
애매한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하지만 보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소속이 다른 작전 참모를 더 압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에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이 전쟁에 협력을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볼로나 후작은 밀턴을 향해서 부러움을 숨기지 못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포레스트 후작님은 실로 훌륭한 참모를 거느리고 계시군요.”
볼로나 후작으로서는 외국의 작전 참모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이었다.
“알아주셔서 감사하오.”
밀턴이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볼로나 후작이 말했다.
“코브르크 공화국 공격 작전.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하오. 우리 동부 전선의 전군이 협력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해서 동부 전선의 역공격이 결정되었다.
볼로나 후작과의 회담을 마치고 밀턴이 세비안 자작에게 말했다.
“수고 많았다. 말을 잘해준 덕분에 꽤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동맹국이라고 해도 지휘권이 분리되어 있는 동부국의 수뇌들을 작전에 끼어들게 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하지만 세비안 자작은 훌륭한 전략과 언변 덕분에 쓸데없는 기 싸움을 피하고 협력을 얻어낸 것이다.
밀턴의 칭찬에 세비안 자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맡은 역할을 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것이지.”
밀턴은 미소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보물을 주웠어. 이런 인재를 제대로 못 써먹은 1왕자라는 새끼는 멍청이지.’
밀턴에게 여러 인재들이 있었지만 무력을 담당하는 제롬과 지력을 담당하는 세비안 자작은 중요한 양 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비안 자작의 지력이 높고 전략 전술이 높다고 해도 밀턴이 그 말을 마냥 듣기만 하는 꼭두각시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주군, 굳이 세 번째 안배가 필요했을까요? 저는 솔직히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세비안 자작의 말에 밀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 번째 작전은 우리가 동부 전선을 뚫지 못하고 전선이 고착되었을 때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 작전을 구상한 건 자네이지 않나?”
“그거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비안 자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 작전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동부 전선을 뚫지 못한다는 가정하에서 만들어둔 보험과 같습니다. 동부 전선을 뚫을 수 있다면 그건 그냥… 생고생 아닙니까?”
“그렇다면 세비안, 자네가 생각하기에 그런 보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세비안 자작은 이 동부 전선의 공략에 자신이 있었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이 얼마나 악명 높은지도 잘 알고 있다.
군사 강국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트라부스 왕국에서도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을 100년 넘게 뚫지 못하고 있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적들도 북부 전선에 힘을 쏟느라고 힘이 좀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이 9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합류했다.
저울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하기에는 충분한 전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세비안 자작은 자신의 전략 전술과 밀턴이 공들여 키운 레스터 왕국군의 힘을 믿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세심하게 계산을 해 봐도 동부 전선을 돌파할 수 있는 확률은 90퍼센트를 넘었다.
그러나 밀턴은 동부 전선에서 적이 자신들의 공세를 막아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비안 자작에게 그때를 대비한 작전을 짜게 했다.
세 번째 안배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전이었다.
주군이 명령을 하니 만들기는 했지만 사실 작전을 세운 세비안 자작조차 그 작전의 필요성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부 전선의 전쟁에서 이긴다면 별 필요도 없는 보험일 뿐인데….’
그런 세비안 자작의 심정을 아는지 밀턴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동부 전선의 공격이 마냥 편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그 이유를 몇 번이고 물었지만 밀턴은 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는 이유를 들어야 했다.
밀턴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하면 이 동부 전선을 돌파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최소 80퍼센트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90퍼센트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겸손하게 10퍼센트 정도는 깎아서 말하는 세비안 자작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만약….”
“만약 뭡니까?”
“지크프리트가 직접 동부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
“그래도 80퍼센트의 가능성을 볼 수 있나?”
“그건…. 아니죠.”
세비안 자작 역시 지크프리트가 어떤 괴물인지는 알고 있었다.
밀턴이 수집한 정보는 당연히 참모인 그도 공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크프리트가 이 전쟁에 투입된다면…. 아마 우리 승산은 꽤 내려갈 것입니다. 놈이 어느 정도의 병력을 데리고 올지는 몰라도 어쩌면 50퍼센트 이하까지 내려갈 수도 있겠죠.”
세비안 자작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주군. 주력 전장인 북부 전선을 버리고 동부에 지크프리트가 나타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놈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밀턴은 세비안 자작의 말에 확신을 가지고 아니라고 말했다.
세비안 자작은 혹시 밀턴이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정보를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이유는….”
밀턴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냥 감이라고 해 두지.”
“주군….”
그냥 감이라니?
세비안 자작의 입장에서 이렇게 기운 빠지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밀턴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래도 진짜 올지도 몰라. 그러니 그 점도 유념해서 준비해 두게. 놈에 대한 정보는 머릿속에 잘 넣어 두었겠지?”
세비안 자작은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주군인 밀턴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그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알겠습니다. 그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작전을 짜겠습니다.”
“음. 수고하게.”
세비안 자작에게 지시를 내리고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놈은 나타날 거야. 왜냐하면….’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직감 이상의 근거는 분명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서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밀턴은 직감을 넘어서 확신이 들었다.
이번 전쟁에서 지크프리트와 자신은 반드시 만날 것이라고 말이다.
***
전쟁터와 한참 떨어진 레스터 왕국의 북부 전선.
페일런 공작이 철통같이 틀어막고 있는 이곳에 두 명의 기사가 은밀한 명령을 받았다.
“토미, 주군에게서 명령이 내려왔다고?”
“그래. 비밀리에 수행해야 할 명령이다. 그 악마…. 가 아니라 스승님에게 허락도 받았다.”
“뭐? 그럼 악마… 가 아니라 스승님의 마수를 피해서 우리도 전쟁터로 갈 수 있는 거야?”
“그래. 드디어….”
“크으…. 드디어….”
‘그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그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릭과 토미는 서로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같은 생각을 했다.
왜 이 둘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면….
레스터 왕국의 북부 국경 지대의 상황을 조금 알아야 한다.
페일런 공작은 이 북부 국경에 두 가지 명령을 받고 배임했다.
하나는 당연히 국경을 지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젊은 기사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레이라 여왕에게 받은 이 두 가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페일런 공작은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국경의 방비는 사실 전시 상황이 아닌 이상 그가 직접 나설 일이 많지 않았다.
요새를 보강하고 국경 지대의 순찰병을 배치하고, 일반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일.
이런 일은 페일런 공작보다 휘하의 참모진과 기사단이 더 잘하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페일런 공작은 젊은 기사들을 갈구는, 혹은 단련시키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릭과 토미를 비롯해서 레스터 왕국의 귀족가에서 수많은 젊은 기사들이 북부 기사단에 배치되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페일런 공작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기사들에게 큰 영광이었기에 꽤 많은 지원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원한 것을 금방 후회하게 되었다.
페일런 공작은 생각했다.
왜 레스터 왕국의 기사들은 수준이 떨어지고 스트라부스 왕국이나 공화국의 장교들이 더 강한 걸까?
‘차이점은 실전이구나.’
실전을 거쳐서 치열하게 단련된 기사들과 얌전하게 온실 속 화초처럼 검술 수련만 한 기사들.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나태함으로 인해서 기사의 수준이 형편없다는 레스터 왕국의 오명을 벗기 위해 페일런 공작은 결심했다.
자신이 악마가 되기로 말이다.
강해지던가? 죽던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페일런 공작이 대놓고 한 이 말은 그냥 하는 으름장이나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죽어도 좋다는 서약서를 받은 다음에 훈련을 시켰다.
훈련이라고 해서 기상천외한 뭔가를 한 것은 아니고 기초 훈련 이외에는 전부 자신과의 대련을 시켰다.
즉, 실전을 대신하기 위해서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에 있는 자신이 직접 젊은 새싹들을 밟아 주기로 한 것이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밟고 또 밟자.
그러다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이렇게 마음을 먹은 페일런 공작은 진짜 독한 마음을 먹고 젊은 기사들을 밟았다.
그건 옆에서 보면 수련이라기보다는 그냥 수련을 빙자한 폭행으로 보일 정도였다.
“크아아악!”
“아악! 뼈… 뼈가….”
“잠…. 잠시만…. 크악!”
훈련중에 부상자가 안 나오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페일런 공작은 훈련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빡세게 밟아서 이 어린 화초들이 억센 잡초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아니면 죽던가?
훈련 중에 탈영하는 기사들이 나왔고 간도 크게 공작한테 하극상하며 개기는 기사들도 나왔다.
하지만 페일런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사뿐히 지르밟았다.
밟고 또 밟았다.
“억울하냐? 억울하면 강해져라. 나보다 강해지면 복수를 위해서 내 목을 날린다고 해도 봐준다.”
이 훈련으로 인해서 북부 기사단의 젊은 기사들에게 션 페일런 공작 = 악마라는 공식이 생겼다.
진짜 분하고 원통한 것은 이 훈련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북부 기사단에서 1년 만에 익스퍼트에 도달한 기사들이 열한 명이나 나왔다.
사실 경지에 이른 이들은 모두 유저 최상급의 경지였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뚜렷한 효과를 보인 것이다.
이런 성과가 나오자 페일런 공작은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거 봐라. 내 말이 맞지. 그러니까 얼마든지 심하게 해도 괜찮다, 라는 대의명분(?)을 얻은 것이다.
사실 탈락자는 서른 명이 나왔지만 그건 기억하지 않았다.
페일런 공작은 더 가열차게 젊은 기사들을 몰아붙였다.
“강해져라! 강해질 것 아니면 죽어라! 전쟁터에서 죽나 여기서 죽나 그게 그거다! 인생 뭐 있냐?”
그렇게 해서 페일런 공작은 기사들의 수준을 끌어올렸고, 릭과 토미는 그 지옥 같은 담금질 속에서 버텨냈다.
그리고 약 6개월 전에 둘은 익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했다.
검에서 피어난 오러를 보며 이 둘은 눈물이 나게 기뻤다.
“흐어엉…. 이제…. 이제 집으로 갈 수 있어.”
“진짜…. 진짜 X 같은 세월이었다.”
비록 그 감동은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것보다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이 더 컸지만 말이다.
그리고 둘은 이제 남부로 돌아가려고 했다.
했지만….
“릭, 토미. 너희들은 아직 돌아갈 수 없다.”
라는 페일런 공작의 말에 발목이 잡혔다.
“예?”
“예?”
둘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나는 아직 너희들을 한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반드시 한계까지 너희들을 단련시켜 주마.”
사실 페일런 공작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둘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 포레스트 후작이 이 나라에 해준 것이 얼마인데 이 정도로 돌려보낸단 말인가?’
페일런 공작에게 있어서도 릭과 토미는 특별했다.
그 밀턴 포레스트가 직접 맡긴 두 젊은이를 고작 익스퍼트 하급의 경지로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최소한 중급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막중한 혹은 쓸데없는 책임감을 느낀 것이다.
그로 인해서 릭과 토미는 더 격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제 둘은 익스퍼트고 나발이고 빨리 악마-페일런 공작-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밀턴이 이 둘에게 명령을 보낸 것이다.
“주군의 명령이라니? 그게 정말이냐?”
“그래. 전령이 비밀리에 와서 전해주고 갔다.”
토미의 말에 릭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전쟁터로 서둘러 합류하면 되는 거냐?”
릭이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흥분했다.
이제 더 나아진 실력으로 주군의 곁에서 함께 전쟁을 달리고 큰 공을 세운다는 기사의 로망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하지만….
“잠깐, 이건….”
밀턴에게서 내려온 명령서를 읽고 있던 토미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야? 왜 그래? 주군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어?”
“아니, 하지만 우리한테는 생길지 모르겠다.”
“뭐?”
“우리한테 내려진 명령서의 내용에 따르면….”
그리고 토미는 릭에게 밀턴이 내려준 명령을 설명했다.
그 설명을 다 듣고 릭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진짜 주군이 내린 명령 맞아?”
“맞다.”
“아니 명령이 명령 같아야지. 그게 무슨….”
“주군이 말씀하시기를 사전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페이지를 찢어 버리라고 하시는군. 그럼 할 수 있단다.”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을 해?”
릭에게 있어서 나폴레옹은 미친놈이 되었다.
“난들 아냐? 젠장….”
침착한 토미도 결국 욕이 튀어나왔다.
그 정도로 둘에게 내려진 명령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젠장, 잘 생각해봐. 어디 공화국의 스파이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명령서를 위조했을 가능성도 있어.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제발!”
“주군의 필적이 맞다.”
“필적은 위조가 가능하잖아?”
“편지에 인장도 찍혀 있다.”
“…….”
“그리고 명령서를 전해준 전령도 내가 아는 얼굴이다.”
“XX.”
갑자기 다 때려치우고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나 지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릭과 토미였다.
“응? 누가 나 욕했나?”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멀리 떨어져 있던 밀턴은 귀가 몹시 간지러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