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그게 전쟁터에서 내가 본 모습이라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칼의 설명을 듣고 밀턴도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불우한 어린 시절이 만들어낸 어두운 일면이라… 이거 꽤 심각한 것 아닌가?’
솔직히 바이올렛 공주에게 동정이 가는 밀턴이었다.
레이라 여왕의 경우를 봐도 알고 있었지만 왕실에서 태어나는 것이 반드시 행운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밀턴은 칼에게 말했다.
“토마스 경.”
“말씀하시죠.”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말대로라면 바이올렛 공주는 정신적으로… 음, 장애가 있다고 해야 할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 자를 주군으로 모시고 끝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는 뭔가?”
밀턴의 말에 칼은 순간이지만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실수했나?’
모독감을 느낀 칼은 이를 악물고 밀턴에게 말했다.
“신분에 차별받고, 핏줄에 버림받고, 권력에 짓밟히고 있던 저희들에게 손을 내밀어준 것은 바이올렛 공주님입니다.”
그리고 칼은 밀턴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설령 세상 전부가 공주님을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그분을 배신하는 자들은 제 동료 중에 없습니다.”
“그래. 그랬군. 자네들의 충성심을 의심해서 미안하네. 내 사과하지.”
직위는 아득하게 높은 밀턴이었지만 그래도 상대방의 역린을 만졌을 때는 사과할 정도의 개념은 가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밀턴의 사과에 칼도 조금은 마음이 풀렸는지 사과를 받아들였다.
어쨌든 이제 의문을 풀렸다.
문제는….
‘이 공주님을 문제점을 알고도 어떻게 써먹느냐? 라는 것이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세비안 자작과 의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호른 성을 구원한 밀턴은 현장 지휘관에게 크게 감사를 받았다.
거의 끝장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서 나타난 원군이었으니 수성을 담당하는 지휘관 입장에서는 부모가 무덤에서 살아난 것만큼 기뻤으리라.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연회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수성 지휘관의 말에 밀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시에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연회는 이 전쟁이 승전으로 끝날 때 까지 미루도록 합시다.”
“아…. 예. 알겠습니다.”
밀턴이 연회를 거절하자 수성 지휘관은 크게 감동한 표정을 했다.
보통 동맹국으로 참전한 지휘관은 보통 잔뜩 생색을 내면서 이것저것 요구하기 마련이다.
자국이 주도하는 전쟁과 달리 토지도 작위도 얻기 어려운 만큼 참전한 나라에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차피 남의 나라 재정이니 마음껏 갉아먹는 게 이득이라는 마음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밀턴처럼 담백한 태도를 보이는 원정군은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그보다, 이 동부 전선의 최고 책임자를 만나고 싶소.”
“최고 책임자라면 루크 볼로나 후작님이십니다. 후방에 있는 루체른 성에 계십니다.”
“그렇군. 지금 즉시 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성의 수비를 위해서 1만의 병력을 상주시켜 두겠소.”
그렇게 호른 성의 상황을 진정시킨 밀턴은 바로 루체른 성으로 이동했다.
세비안 자작의 전략에 의하면, 이제 동부 전선의 협조가 필요한 시점이다.
***
루체른 성에 도착한 밀턴은 빠르게 볼로나 후작을 만났다.
“루크 볼로나라 하오.”
“밀턴 포레스트라고 하오.”
둘은 서로의 가신을 거느리고 루체른 성내에서 만났다.
두 남자는 손을 잡고 굳은 표정으로 서로 인사를 하며 서로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얕잡아 보이기 싫다는 마음과 기선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의 태도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밀턴은 바로 볼로나 후작의 상태를 살폈다.
[루크 볼로나]
기사 LV.7
무력 - 77 통솔 - 98
지략 - 80 정치 - 72
충성 - 00
특성 - 수성, 공성, 신중, 야습
수성 LV.8 : 수성전에서 아군의 사기를 상승시키고 본인의 지휘력이 상승한다.
공성 LV.6 : 공성전에서 아군의 지휘력이 올라간다. 병사들의 피로 소모도가 줄어든다.
신중 LV.6 : 적의 매복이나 함정을 알아챌 확률이 높아진다.
야습 LV.5 : 야간 공격 때 아군의 혼돈을 억제하고 적의 혼란을 극대화시켜서 전과를 올린다.
‘호오…. 이거 꽤?’
밀턴은 상당히 감탄했다.
과연 군사 강국인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전선의 총사령관을 맡길 만한 인재였다.
전체적인 수치가 모두 높았지만 특히 통솔력 98이 대단했다.
그리고 전쟁의 경험이 많아서인지 수성과 공성 모두에 능했고, 평범한 야전에서 쓸 법한 전략도 능숙한 듯했다.
‘나이는 40대 중반이고…. 그야말로 무장으로서의 기량이 절정기에 이른 장수라는 건가?’
꾸준한 단련으로 신체의 기능이 아직 쇠하지 않았고, 경험과 지혜가 절정에 달한 상태인 듯했다.
볼로나 후작의 뒤편에 있는 가신들도 제법 나쁘지 않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좋은 일이지. 잘됐어.’
동맹의 상대가 이렇게 유능하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듯했다.
밀턴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볼로나 후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호른 성이 위급한 상황에서 구해 주셨다고 들었소. 감사를 표하오.”
“동맹국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그래도 감사하는 바이오.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호른 성은 적에게 넘어갔을 지도 모르오.”
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사실상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밀턴은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저는 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부디 동부 전선의 최고 사령관이신 볼로나 후작님은 허락을 해 주시겠습니까?”
원정군으로서 온다는데 사양할 리가 없지만 그래도 굳이 허락을 구하는 밀턴이었다.
그런 밀턴에게 볼로나 후작은 의아한 듯이 말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말씀 하시오.”
“지금 이 전쟁의 최고 격전지는 북부 전선이오. 양쪽 모두 거기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중이오.”
“알고 있소.”
“후작도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자 했다면 북부 전선에서 용맹을 떨쳐야 하지 않소? 어째서 우리 동부로 온 것이오?”
‘역시 물어보는 건가?’
밀턴은 볼로나 후작의 말에 예상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대답해 줄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은 나의 참모이니 더 잘 설명할 것 같소.”
그리고 밀턴이 자신의 뒤편에 있는 세비안 자작을 소개했다.
“우리 군의 수석 참모를 맡고 있는 세비안 자작이오.”
“란돌 세비안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볼로나 후작님.”
“뻔한 예의는 되었소. 그보다 귀군이 동부에 온 이유를 듣고 싶소.”
볼로나 후작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지도 한 장을 가져와서 펼치며 말했다.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모두가 알다시피 이 전쟁은 공화국 3국이 힘을 합쳐서 스트라부스 왕국을 공격하고 있는 전쟁입니다. 하지만, 공화국의 대부분의 전력은 북부 전선에 집중되어 있죠.”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왜 그들이 전력을 한군데에 집중시킬까요?”
“우문이군. 힘을 하나로 집중시켜서 적을 공격하는 건 정석 중에 정석이 아니오?”
볼로나 후작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정석이죠. 하지만 이유는 또 있습니다. 공화국 입장에서는 힘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죠.”
“어째서요?”
“왜냐하면 힘을 분산시키면 결국 전황이 유리한 것은 병력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는 왕국 연합군 쪽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죠.”
밀턴이 애당초 하려고 했던 작전이 바로 이것이었다.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앞장세워서 모든 전선에서 격렬한 공세를 펼쳐서 공화국의 전력을 집중시킬 수 없게 하는 것.
다만 밀턴이 구상한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적어도 50만 이상의 병력이 필요했다.
동맹국이 병력을 적게 보내면서 그 작전은 물 건너 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세비안 자작은 말했다.
전선을 무한정 넓히는 것은 무리라도 양쪽으로 분산시키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이다.
“전략의 기본은 아군에게 유리하고 적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부 전선에서 역공을 펼침으로 인해서 공화국이 더 이상 북부에 힘을 집중시킬 수 없게 하려고 합니다.”
세비안 자작의 말에 볼로나 후작은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었다.
“세비안 자작이라고 했나?”
“말씀하십시오.”
“그대의 말은 알겠네. 하지만 어째서 동부 전선인가? 서부 전선이 아니라 동부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반항심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에서 나온 볼로나 후작의 질문에 세비안 자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히 동부 전선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있습니다.”
“들어보지.”
“첫째, 서부는 안 됩니다. 서부 전선은 대부분이 산악 지역입니다. 대군을 이끌고 험난한 회색 산맥을 넘어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세비안 자작의 말에 밀턴은 피식 웃으며 동감했다.
‘그 지랄 맞은 산맥을 대군을 이끌고 넘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지.’
서부 전선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밀턴이었기에 이 설명은 굉장히 공감이 갔다.
“사실 우리 왕국의 북부 국경 지역을 맡고 있는 페일런 공작님에게 공격 신호를 보낼 것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힐데스 공화국이 철두철미한 준비를 해둔 덕분에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건 유감이군.”
볼로나 후작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세비안 자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두 번째 이유, 설령 회색 산맥을 넘어서 힐데스 공화국의 본토를 침공한다고 해도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이유는?”
“힐데스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산악 지역이 많아서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방어하며 시간을 끄는 작전에 굉장히 능숙합니다. 또한, 최악의 경우 공화국에서 힐데스 공화국의 손해를 무릅쓰고 공격에만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이미 한 번 그렇게 했었던 전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볼로나 후작을 비롯해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인물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서부 전선에서 힐데스 공화국에 대흉년이 들어 전력이 떨어진 시점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은 대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그때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힐데스 공화국은 철저한 청야 전술로 시간을 끌었고, 오히려 공화국의 연합군에 북부 전선을 공격했다.
그때의 전쟁에서 적을 간신히 물리치기는 했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이 입었던 피해는 엄청났다.
“그렇다면 동부는 다르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동부 전선을 넘어서 우리가 코브르크 공화국을 공격하면 적들은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코브르크 공화국은 공화국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식량 창고이기 때문이죠.”
힐데스 공화국이 광산을 기점으로 해서 대량의 철광석을 생산하는 무기고라면 코브르크 공화국은 상업과 식량 생산을 담당하는 왕국이다.
물론 하노버슈 공화국 역시 식량 생산량이 뒤지지 않지만 원래 공화국의 식량 사정은 코브르크 공화국과 하노버슈 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80%를 담당한다고 봐야 했다.
“지금의 시기는 한여름입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농사에 손을 놓을 수 없는 시기죠. 우리가 군을 진격시켜서 코브르크 공화국의 곡창 지대를 불태운다면….”
“공화국의 식량 생산량에 커다란 타격이 오겠군. 당연히 놈들은….”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비안 자작의 말에 볼로나 후작은 크게 감탄했다.
‘대단해. 만약 성공한다면 이 전쟁… 아니 공화국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
전쟁을 보는 시야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가에 따라서 시도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진다.
이제까지 동부 전선을 지킨다는 임무에만 충실해왔던 볼로나 후작은 이 기회에 자신들이 역공의 주역이 된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다.
“그럼 세 번째 이유는 뭔가?”
기대감을 가지고 물어보는 볼로나 후작에게 세비안 자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세번째 이유는….”
이제 볼로나 후작뿐만 아니라 스트라부스 왕국의 인물들 모두가 세비안 자작을 주목했다.
그들 모두가 어느새 세비안 자작의 계획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 세비안 자작은 그들을 향해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보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서 함부로 말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아니 그건….”
“너무하지 않은가?”
안타까워하는 볼로나 후작과 그의 참모진들을 향해서 세비안 자작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세 번째 이유는 정말 보안이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다만….”
“다만 뭔가?”
“만약. 우리가 동부 전선에서 적의 국경을 뚫고 들어가서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때를 대비한 세 번째 안배가 있다. 라는 것까지만 밝혀 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