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폭주 LV.8 : 전투 중에 자신의 부상을 무시하고 싸울 수 있다. 단, 이성적인 판단이 크게 떨어진다.
분전 LV.8 : 위급한 상황이 되면 발동한다. 자기 실력의 최대 80% 이상의 실력을 보인다.
밀턴의 능력으로 확인한 그녀의 특성이 지금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는 그녀의 모습은 승냥이 때 사이에 던져진 암호랑이 같았다.
“저러고도 못 잡는다는 건가?”
후퇴하며 그 광경을 봤던 토리온 중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병들은 처참하게 유린당했고 이미 뒤에는 그녀의 기사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그중에 한 기사가 바이올렛 공주에게 다가가 상태를 묻자 바이올렛 공주는 그 기사를 향해서 고개를 휙 돌렸다.
“읍….”
핏발이 서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바이올렛 공주가 빠르게 말했다.
“너! 내려!”
“예?”
“내리라고!”
“예? 예. 알겠습니다.”
기사가 말에서 내리자 바이올렛 공주는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빠르게 전장을 살피고는….
“거기 서라!! 내가 딱 서라고 했다!! 이 새끼야!!”
다시 원래 목표였던 토리온 중위를 향해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적들은 다 베고 짓밟으면서 일직선으로 돌격하는 바이올렛 공주를 보며 토리온 중위는 말했다.
“너 같으면 서겠냐? 이 미친년아.”
이제까지 전쟁터에서 무수한 적과 싸워왔지만 이렇게 질리는 적은 처음이었다.
토리온 중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었다.
“서라! 서!! 서! 서! 서! 서라고! 이 XXX야!! 서어어어어어어!!”
그날 살아남은 공화국의 병사들은 악에 받친 공주의 목소리가 귀에서 맴돌아 공포에 벌벌 떨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바이올렛 공주의 대활약(?) 혹은 대폭주로 인해서 전과는 크게 확대되었다.
제롬이 간신히 따라잡아서 그녀를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세상 끝까지 쫓아갈 것 같았던 그녀와 보조를 맞추느라고 다른 기병들도 적을 꽤 멀리까지 추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로 인해서 밀턴은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저 여자 어떻게 써먹지?’
능력치를 보고 특성을 봤을 때 이런 성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조신한 공주님으로 보였고,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그녀가 보여준 태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침착하고 꼼꼼하게 군을 운용하며 일반 병사들에게도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이 정도의 광기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
“저기 바이올렛 공주님?”
“예. 부르셨나요?”
얼굴에 피를 닦고 나니 다시 원래의 청순한 미모를 되찾은 그녀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밀턴을 바라봤다.
“아니 저기 그….”
“……?”
“첫 전투 수고하셨습니다.”
밀턴이 그냥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보다는 기사와 병사들이 더 수고했죠. 부디 그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세요.”
“예. 뭐, 당연히 그럴 겁니다.”
실제 그녀의 뒤를 따라다닌 플로렌스 공국의 기사들을 보아하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전투였을 뿐인데 갑옷의 여기저기가 깨져 있고, 부상자도 좀 있었다.
무엇보다 전원의 얼굴에 극도의 피곤함이 드러났다.
‘다크서클이 이렇게 단시간에 생기는 건 처음 보네.’
밀턴은 그녀의 말대로 기사들을 살피다가 한 명을 지적했다.
“토마스 경.”
“예. 부르셨습니까? 포레스트 후작님.”
일전에 안면이 있던 칼 토마스라는 기사를 부른 밀턴은 그에게 말했다.
“잠시 얘기 좀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밀턴을 따라갔다.
그리고 밀턴은 잠시 군과 떨어져서 칼 토마스와 단둘이 되어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말씀하십시오.”
“바이올렛 공주는 원래 저런가? 아니면 오늘이 초전이라서 특별히 흥분한 건가?”
그런 밀턴의 말에 칼 토마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항상 저렇습니다.”
“항상 저렇다고? 아니 어떻게…. 평소에는….”
“예. 평소에는 얌전하고 우아한 공주님이시죠.”
“그런데 왜 전투 시에는….”
“전투가 벌어지면 미친ㄴ… 뭐, 좀 무엄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변하죠.”
차마 모시는 주군에게 할 말은 아니라서 멈춘 듯하지만 표정을 보니 팩트로 분류해도 될 듯한 말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저렇다고?”
“예. 그렇습니다.”
“내가 알기로 플로렌스 공국은 타국과 전쟁을 한 적도 없는 걸로 아는데? 일국의 공주님이 실제 전투를 많이 겪은 것처럼 말하는군.”
“…….”
곤란한 표정을 하고 침묵하는 칼 토마스를 보며 밀턴이 말했다.
“말해주게. 내가 앞으로 공주님과 그대들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밀턴의 말에 칼 토마스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사실 공주님은….”
바이올렛 공주는 플로렌스 공국의 세 번째 공주로 태어났다.
앞으로는 두 명의 오빠와 두 명의 언니들이 있다.
그런데 그녀의 경우 다른 형제들과 상황이 좀 달랐다.
대부분 왕자와 공주들은 유력 귀족이의 여인들이 낳은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바이올렛 공주의 어머니는 귀족은 고사하고 플로렌스 공국의 시녀였다.
현 공왕이 시녀였던 여성을 하룻밤 품었고, 그로 인해서 태어난 것이다.
일단 왕족은 왕족이지만 다른 형제자매와는 사정이 꽤 다른 왕족인 것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다.
그녀의 형제자매는 그녀가 자신들과 같은 왕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괴롭혔다.
그녀를 향한 괴롭힘은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바이올렛 공주의 어머니에게도 이어졌다.
공왕은 두 모녀를 향한 괴롭힘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하룻밤 불장난에서 생겨난 오점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챙겨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두 모녀는 왕족의 일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고, 그런 불우한 유년 시절 속에서 바이올렛 공주는 철저하게 자신을 숙이며 살아왔다.
조금이라도 맞서거나 반항을 하려고 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 특히 모친에게까지 피해가 갔기 때문이다.
자신 때문에 모친이 형제자매에게 몇 번이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고서는, 더 이상 그런 일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자신을 죽였다.
슬퍼도 웃고, 억울해도 웃고, 힘들어도 웃었다.
마치 인형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만큼 숨을 죽이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형제자매는 그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거슬렸던 모양이다.
특히,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빛을 발하는 그녀의 미모는 자매들에게 무척 거슬렸다.
어린 소녀였지만 드레스를 입고 연회장에 자리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모았다.
그러자 그녀의 언니 중에 한 명이 거의 명령에 가까운 억지를 부려서 그녀를 기사단의 견습생으로 집어넣었다.
고운 소녀가 험난한 훈련을 받고 흙투성이가 되어 구르는 모습을 보겠다는 음흉한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오산이 벌어졌다.
바이올렛 공주는 검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녀는 기사단의 수련을 시작하고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고, 불과 수련을 하고 2년 만에 익스퍼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소름끼치는 재능에 모든 이가 전율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13세.
대외적으로 그녀가 익스퍼트에 오른건 17세 때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그녀의 공적을 어떻게든 깎아내려는 형제자매의 결과물일 뿐이다.
사실 그것만 해도 충분한 천재였지만 비교적 평범한(?) 천재 축에 들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진상은 플로렌스 공국 역사상 최연소 익스퍼트가 바로 바이올렛 공주였던 것이다.
그녀의 형제자매는 바이올렛 공주의 재능을 시기했고 질투했고, 또 경계했다.
정작 국왕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다른 형제들은 그녀가 왕위를 넘보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손을 쓴 것이 그녀를 실전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플로렌스 공화국은 평화롭고 전쟁이 없는 나라였다.
처음에는 국내의 도적들을 토벌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은근한 방해를 해서 그녀가 현장에서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기서 두 번째 오산이 벌어졌다.
그녀는 검의 천재이기도 했지만 전쟁에서도 무척 용맹성을 떨친 것이다.
고작 열 명의 병력만 거느리고 백 명이 넘는 도적단을 토벌하라는 무모한 명령도 해냈다.
조각배 몇 척만 내어주고 해적의 근거지를 토벌하라는 명령도 수행해 냈다.
그녀는 뛰어난 지략으로 합리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지장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장에 뛰어드는 용장이었다.
그녀의 재능과 용맹함 앞에 도적들 따위는 감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 토벌전을 거치면서 그녀에게는 조금씩 자신의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주라고 해도 시녀의 자식인 그녀에게 귀족들의 지지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 대신, 평민 출신의 기사, 차별 받고 있던 용병, 출세가도에서 밀려난 귀족가의 서자.
그런 자들이 그녀의 곁에 몰려들었다.
다른 형제자매와 달리 바이올렛 공주는 출신 성분 따위는 따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능력과 충성심.
능력은 현장에서 판별하고 충성심은 현장에서 얻어냈다.
모든 전투에서 솔선해서 싸우는 그녀의 모습을 접하고 나면 열에 아홉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그런 자들이 바이올렛 공주에게 모여들었고, 그들은 바이올렛 공주를 따라다니며 실전에서 철저하게 담금질되었다.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은 신분도 낮았고 출세와도 거리가 멀었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로열 기사단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지금의 전쟁에 따라온 기사들이 대부분 그런 기사들인 것이다.
“과연, 그런 과거가 있었군.”
밀턴은 고개를 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공주님이 어째서 그렇게 강하고 전쟁에 익숙한지는 어느 정도 해답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데 지금의 설명을 들어도 바이올렛 공주의 그 성격은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건 거의 이중인격 수준이잖아?”
“거의가 아닙니다.”
“응?”
“공주님은 실제 이중인격이라고 판정을 받았습니다.”
“…·뭐?”
깜짝 놀란 밀턴에게 칼이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실전을 거치면서 바이올렛 공주는 점점 전장에 적응해 갔다.
대부분의 무장들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법인데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이 최전선에 서서 아군에게 등을 보여주며 돌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발전한 것은 환경적인 요인이 컸다.
우선 그녀의 주 상대가 도적들이었기 때문이다.
정규군과 달리 도적들의 경우 그렇게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전략 전술의 발전보다는 자신의 무위에 기대는 전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 때문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편을 얻은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기사들 한 명 한 명이 소중했다.
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더 가장 앞장서서 싸운 것이다.
언제나 가장 앞에서 용맹하게 말이다.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처럼 청순한 외모와 달리 가장 앞장서서 용맹하게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에 부하들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녀의 가녀린 등이 무척 든든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전투를 하면서 가끔 그녀가 미쳐 버리는 것이다.
어지간한 용병들 저리가라 할 정도의 욕설을 입에 담기도 하고 한 번 표적을 정하면 중간에 함정이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끝까지 추적했다.
처음에는 그냥 전쟁터에서 흥분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빈도가 더 많아지고, 정도도 더 심해지면서 주변 인물들도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휘하의 기사 한 명이 신관을 불러서 정신 감정을 받게 했다.
그 결과 그녀에게 또 하나의 인격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흔히 말하는 이중인격이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안색만 살피고 항상 죽어지내야 했던 그녀는 알게 모르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것을 타고난 성품과 엄격한 예절로 억눌러 왔지만 울화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내면에서 차곡차곡 쌓여왔다.
그리고 전쟁터라는 특수한 상황이 되자 그런 감정들이 화산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참을 필요도 없고 양보할 필요도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아군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가서 한 칼이라도 더 휘둘러야 했다.
정당한 명분을 얻은 분노가 그녀의 안에서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