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당당한 밀턴과 달리 카본 백작은 말문이 막혔다.
실제 이들 중에서 본국에서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밀턴뿐이었다.
밀턴은 레스터 왕국에서 구국의 영웅이고 백성들에게도 열성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거기다 이 전쟁에 나오기 전에 레이라 여왕과의 약혼도 하고 왔다.
막상 할 때는 사망 플래그 만드는 것 같아서 꺼려졌지만 지금에 와서는 정치적인 협상에서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이 전쟁이 끝나고 여왕의 남편이 되기로 내정된 사람이 본국의 눈치를 살필까?
그제야 이 짐덩어리들은 깨달았다.
‘빌어먹을….’
‘일단 지금은 숙여야 하는 건가?’
애당초 자신과 밀턴은 입장 자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지금이라도 숙이고 들어가면 밀턴이 자신들을 용서할까?
자신들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한 사령관에게 밉보인 채로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밀턴이 작정하고 사지로 밀어 넣는 명령을 내려도 무조건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처한 이들을 보고 밀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치겠지? 돌겠지? 환장하겠지? 그럼 이쯤에서 샛길을 제시해 볼까?’
충분히 궁지로 몰아넣었다.
여기서 밀턴은 본래의 의도를 꺼냈다.
“만약, 당신들이 내 지휘에 의문이 있다면 나도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들과 전쟁을 수행할 생각은 없다.”
“우리한테 군을 떠나서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이오.”
“아니, 나에게 그럴 권한은 없다. 그 대신….”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군을 분리시키고 지휘권을 인정해 줄 테니 내 군에서 떠나라는 말이다.”
밀턴의 말에 유하네스 후작과 다른 귀족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밀턴의 입에서 나온 용건이 생각보다 후했기 때문이다.
“지금 진심이오?”
“그렇다. 나는 군의 내부에 무능한 불안 요소를 품고 전쟁에 임하고 싶지 않다.”
무능한 불안 요소라는 말에 디오스 백작이 울컥하며 말했다.
“우리를 모독하지 마시오.”
“사실을 말하는 게 모독이 된다고 생각하나?”
“지금 그게 말이라고….”
“앞서 말했지만 불만 있으면 말로 하지 말고 덤벼라.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
“…….”
밀턴의 말에 디오스 백작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밀턴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장갑을 던져서 결투를 청할 배짱은 없었다.
그는 대신 이를 갈면서 밀턴에게 말했다.
“고작 변방의 작은 전쟁에서 조금 이름을 날렸다고 오만하기 짝이 없군.”
“전쟁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애송이가 입만 살았군.”
“하! 내가 마음먹으면 그대보다 훨씬 더 큰 공을 세울 수 있소.”
디오스 백작의 말에 밀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됐군. 그렇다면 어디 이번 전쟁에서 한번 능력을 보여 봐라. 어차피 불가능하겠지만 말이야.”
밀턴의 도발에 디오스 백작은 씩씩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뒤를 따라서 유하네스 후작, 카본 백작, 타우로스 백작 등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의 분란을 초래한 것은 후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우리 스트라빈 왕국군은 이 전쟁을 따로 수행하겠소.”
카본 백작과 타우로스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자 유하네스 후작이 밀턴에게 말했다.
“우리의 지휘권을 인정해 준다는 말은 정말이오?”
“물론, 서면으로 남겨 드리지.”
“그렇다면 사양 않겠소.”
그리고 유하네스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런 유하네스 후작의 뒷모습을 보고 밀턴은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휘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전쟁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진다는 말이지. 뭐, 한번 해보면 알 거야.”
그리고 그들이 모두 막사를 나가자….
“어쨌든, 이제야 좀 살겠네.”
밀턴은 진심으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개운한 표정이었다.
그날 중으로 연합군은 둘로 갈라졌다.
유하네스 후작이 이끄는 4국 연합군과 밀턴이 이끄는 2국 연합군으로 말이다.
4국 연합군에는 발랑스 왕국, 글로스터 왕국, 스트라빈 왕국, 헤리퍼드 왕국이 힘을 합쳐서 총 병력 8만을 만들었다.
그리고 밀턴이 이끄는 2국 연합국은 레스터 왕국과 플로렌스 공국군이 더해져서 9만의 병력이 되었다.
대외적으로 군을 분류한 것은 전력의 다양화를 위해서 군의 부대를 분리했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휘부의 트러블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군이 갈라지는 날 밀턴은 바이올렛 공주와 말을 나란히 하고 행군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유하네스 후작이 뭐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군이 갈라지면서 바이올렛 공주는 밀턴을 택했다.
하지만 아무런 회유가 없었을 리는 없었다.
그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하네스 후작은 그저 한두 번 제의를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디오스 백작이…. 그거 뭐랄까? 꽤 끈질기더군요.”
“끈질기다고요?”
“예. 자신 쪽으로 오면 보다 안전하게 지켜 주겠다고 하던가? 그리고 뭐…. 약간 청혼 비슷한 것도 했던 것 같아요.”
“하아…. 그 얼간이가.”
밀턴은 기가 찼다.
‘누가 누굴 지켜?’
밀턴이 기억하기로 디오스 백작의 무력은 6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무력 88의 바이올렛 공주를 지켜준다?
멍청한 것도 이쯤 되면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이 전쟁이 다 끝났을 때 그 멍청이의 표정이 궁금해지는군. 뭐, 그러자면 일단 이겨야겠지.’
“이제 방해되는 것은 다 없어졌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 겁니다. 각오는 되어 있겠죠?”
“물론입니다.”
“좋아요. 그럼 서두릅시다.”
밀턴은 9만의 연합군을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이동을 서둘렀다.
동부 전선.
스트라부스 왕국의 세 전선 중에서도 동부 전선은 코브르크 공화국과 마주하고 있다.
대부분이 산악 지역인 힐데스 공화국과 달리 평지가 많았고, 양국은 여러 개의 요새를 지어 놓고 국경 지대에서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서부 전선이나 북부 전선과 달리 이 동부 전선은 항상 팽팽한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상황이 좀 변했다.
“볼로나 후작님. 호른 성에서 원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후작님. 카르노 성에서도 원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틀 안에 보낼 수 없다면 후퇴를 허가 바란다는 서신이 왔습니다.”
콰앙!!
전령의 보고를 받은 볼로나 후작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외쳤다.
“도대체가! 어디 한 군데 좋은 소식이라고는 들려오지를 않는단 말이냐!?”
루크 볼로나 후작.
스트라부스 왕국의 후작이며 동부 전선의 최고 책임자인 남자다.
그리고 그는 최근 들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하고 동부 전선의 상황이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데마르 성에 있는 예비대는 얼마나 남았는가?”
“예. 이제 1만 정도라고 합니다.”
“1만? 빌어먹을….”
원군을 요청한 호른 성과 카르노 성은 둘 다 동부 전선의 요충지다.
무조건 살려야 하는 곳인데 양쪽 모두에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남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하지? 갈라서 5,000씩 보내야 하나? 아니야. 그러면 양쪽 모두 잃는다. 최소한 한 군데는 남겨야 해.’
괴로운 선택을 하며 볼로나 후작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이게 다 북부 전선의 멍청이들 때문이야.”
얘기해 봤자 상황이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만이 없을 수가 없는 볼로나 후작이었다.
그가 애꿎은(?) 북부 전선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근거가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적의 병력은 북부 전선에 거의 다 집중되었다.
동부와 서부에도 평소보다는 적극적인 공격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견제의 의미 정도였다.
실제로 공화국의 전력 중 8할은 북부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북부 전선에서 전투가 점점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벌써 몇 개의 요새와 성이 함락당했고 공화국은 야금야금 북부를 넘보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스트라부스 왕국에서도 당연히 힘을 북부에 집중시켰다.
미리 예비대로 준비했던 라이언 카텔 공작과 맥카시 오브라이언 공작의 예비대도 북부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동부와 서부의 예비 병력마저 북부에 지원을 해야 했다.
험난한 지형 때문에 대규모 전투가 적은 서부 전선에 비해 동부 전선은 공성전과 평야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전투가 많았다.
병력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전장이라는 말이다.
북부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서 병력이 줄어든 동부 전선은 조금씩 전선이 밀리기 시작했고, 적들은 기가 살아 더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그런 열세가 이어지다 보니 결국 상당히 위태로워져 버린 것이다.
동부 전선의 총사령관인 루크 볼로나 후작으로서는 북부 전선을 욕하는 게 당연했다.
이쪽의 예비대를 다 빨아들여서 운용하면서도 북부 전선의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그 여파가 자신들에게도 미치고 있는 게 아닌가?
“빌어먹을…. 병력이 부족해. 병력이….”
볼로나 후작이 이를 갈면서 치열한 갈등을 하고 있는 그때….
“후작님. 급보입니다.”
또 한 명의 전령이 급하게 문을 열고 나타났다.
“뭐냐? 또 무슨 일이 생긴 거냐?”
‘설마 어디가 함락된 건가?’
불안해하는 볼로나 후작에게 전령이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 호른 성을 공격 중이던 공화국군이 퇴각했습니다.”
“뭐라고?”
“포레스트 후작이 이끄는 연합군이 나타나서 공화국군을 격퇴하고 호른 성을 구원했습니다. 그리고 추격전에서 최소 5,000 이상의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합니다.”
“포레스트 후작? …아! 그 레스터 왕국의?”
볼로나 후작은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드디어…. 드디어 원군이 왔구나.’
길고 긴 절망 끝에 희망이 찾아온 느낌이었다.
“포레스트 후작이라.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예뻐 죽겠군.”
눈앞에 있으면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인 볼로나 후작이었다.
“우와…. 끔찍하네.”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상상 이상이군요.”
그 옆에서 세비안 자작 역시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내보다 성깔 드러븐 기집아는 처음 본 데이.”
심지어 비앙카 역시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세 명의 시선을 동시에 받고 있는 것은 제롬과 함께 귀환하고 있는 플로렌스 공주였다.
“포레스트 후작님! 어떠신가요?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가요?”
그녀는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몹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상황은 이렇다.
동부 전선에 온 밀턴은 사령부로 가기 전에 전선으로 먼저 달려갔다.
비앙카가 마법으로 정찰해서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현장의 상황이 꽤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호른 성이라고 했나? 여가 간당간당하네. 오늘 내일 안에 떨어지것다.”
한 번 성을 잃으면 그걸 되찾기 위해서 공성까지 해야 하니 두 배로 힘들다.
그러니 무조건 그 전에 지키는 것이 좋았다.
밀턴은 즉시 군을 진격시켰고 호른 성을 공격 중이던 공화국군의 허를 찔렀다.
“공격하라!”
한창 공성 중이던 적의 허를 찌른 상황에 전력도 자신들이 압도적이다.
후속 부대를 제외하고 선두에 도착한 병력만 해도 5만에 도달했으니 밀턴은 망설이지 말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와아아아아아!!”
“전군 돌격하라!”
그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은 레스터 왕국의 정예 군사들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이며 적을 공격했다.
“적이다! 즉시 대응…. 커억!”
“크아악!”
“우측…. 우측에 적이…. 컥….”
공화국군은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나마 적들의 지휘관이 상황 판단이 빨랐는지 전열이 무너지고 1분도 되지 않아서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후퇴! 후퇴한다!”
“소른 성까지 후퇴한다! 각 소대장은 병력을 이끌고 전선을 이탈하라!”
공화국군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밀턴은 즉시 제롬을 불렀다.
“제롬, 기사들과 함께 기마대를 이끌고 적의 뒤를 쳐라. 전과를 최대한 극대화한다.”
“옛. 주군!”
제롬이 듬직한 대답을 하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다.
그때 밀턴의 옆에 있던 바이올렛 공주가 말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저와 제 기사단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