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기운을 완벽하게 정돈한 상태였는데 경지에 눈에 훤히 보였다는 것은 상대의 경지가 자신보다 더 높다는 말이었다.
“설마…. 후작께서는 경지에 이르신 것입니까?”
바이올렛 공주의 떨리는 목소리에 옆에서 듣고 있던 칼이라는 기사가 오히려 깜짝 놀랐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경지가 어떤 의미를 뜻하는 것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밀턴은 그런 바이올렛 공주에게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어떻게 보이나요?”
“그건….”
짐작은 가지만 차마 말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눈앞에 두고도 경지를 정확하게 못 읽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자신과 동급이라는 것이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설마?
설마 그 경지까지?
밀턴은 이제 20대 중반의 나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이로 벌써 경지에 이른다?
바이올렛 공주 본인도 충분히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어쩌면 상대는 자신 이상의 천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점을 깨닫자….
“후작님. 부디, 부디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저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공을 세워야 합니다.”
그녀는 밀턴에게 간절하게 매달렸다.
여차하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밀턴에게 선봉의 역할을 따낼 생각이었던 그녀다.
그런데 실력 면에서 상대가 자신보다 앞선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큰 공을 세워야 하는 입장에 있는 그녀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밀턴은 그런 그녀를 보고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바이올렛 공주님은 어째서 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신 겁니까? 거기다 그렇게 애타게 공적을 바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밀턴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참을 고심하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밀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말해 줄 수 없다라…. 그렇군요.”
밀턴이 거절할 것처럼 말하자 바이올렛 공주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저희 공국 내부의 사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딱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이올렛 공주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그…. 무엇이든지.”
바이올렛 공주가 다급하게 말을 하자 옆에서 칼이라는 기사가 말했다.
“공주님,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토마스 경. 조용히 하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퇴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주님.”
“조용히 하세요.”
그리고 바이올렛 공주는 밀턴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말 절박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리고 밀턴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
“예?”
“저는 그저 이유를 물었을 뿐이고,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는다면 그건 공주님의 자유의사지 전쟁의 수행 그 자체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밀턴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밀턴을 바이올렛 공주를 향해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공주님의 능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상 그 실력에 부합하는 자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말은…. 저에게 공을 세울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인가요?”
“충분히 말이죠.”
밀턴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여자라는 이유로 이번 전쟁에 따돌림 당해서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험 부담을 알면서도 선봉이라는 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승리할 수만 있다면 공적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자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밀턴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차별할 이유가 없었다.
능력치만 보면 그녀는 출중한 기사다.
후퇴할 때 협소한 길목 하나 혼자서 막으라고 해도 어쩐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인재인 것이다.
이런 인재를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협조해 주지 않는다면 아쉬울 정도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갈 것은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명심해 주십시오.”
“말씀하시죠.”
“제가 이 전쟁의 지휘권을 잡고 있는 이상, 공주님과 그 휘하의 병력은 반드시 제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밀턴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후작님의 명령에 따라서 싸우겠습니다. 이는 플로렌스 공국의 왕실을 대표해서 제가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밀턴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럼,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바이올렛 공주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개똥같은 인간들만 가득하다고 생각한 연합군 속에서 밀턴은 굉장히 쓸 만한 인재를 손에 넣었다.
연회가 끝나고 연합군은 정식으로 출범되었다.
수도 템플리체에서 떠나는 연합군은 이제 완벽하게 밀턴의 통제하에 들어왔고, 전쟁터로 행군을 시작했다.
그런데….
“북부 전선으로 가지 않는다니? 어째서 그런 결정을 독단으로 내리시는 겁니까?”
밀턴이 북부 전선에 합류하는 게 아니라 동쪽의 동부 전선으로 군의 진로를 잡자 다른 나라의 지휘관들이 즉시 반발했다.
특히, 디오스 백작은 거의 부모 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격분해서 따지고 들었다.
“우리한테 말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군의 진로를 결정하다니?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오!?”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디오스 백작의 태도에 밀턴은 오랜만에 한국 생각이 났다.
‘그저 목소리 크면 장땡이다 이거지?’
그리고 디오스 백작의 뒤편에는 직접 나서지만 않을 뿐이지 다른 이들도 동감한다는 듯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이올렛 공주를 제외하고 다른 네 개 국가의 지휘관들이 한꺼번에 따지는 것을 보고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예상대로군.’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지만 막상 대놓고 개기는 모습을 보니 살짝 기분은 안 좋았다.
그래서 밀턴은 진심 반, 연기 반의 감정을 실어서 최대한 오만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나는 연합군에 관한 전권을 위임 받았지. 군의 진로를 잡는 것도 당연히 나의 결정권이고, 여기에 당신의 허락이 필요하다 이건가?”
“당연하지 않소?”
“허어어…. 당연하다고?”
“그렇소. 우리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군의 진로를 결정하다니.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오?”
“그래.”
“그렇다면…. 뭐? 지금 뭐라고?”
“무시하는 것 맞다.”
“…….”
“그래서 뭔 문제라도 있나? 애송이.”
밀턴의 말에 디오스 백작은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한 박자 늦게 말의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이건 심각한 모독이요.”
“그래서?”
“이익…. 귀족의 명예를 걸고 사과를 요구하오! 그렇지 않으면….”
디오스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허리에 있는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걸 보고 밀턴은 싸늘한 눈을 하고 말했다.
“미쳤군.”
“지금 뭐라고….”
당황한 디오스 백작에게 밀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전시 상황에 지휘관을 향한 하극상. 아니 이건 군사 반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밀턴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을 손에 들자 디오스 백작은 오히려 당황했다.
‘이…. 이게 아닌데?’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간 것은 일종의 어필이고 위협이었다.
나 지금 화났다.
그러니 나를 무시하지 마라.
이제까지의 경험상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한 발짝 물러나며 양보를 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밀턴은 오히려 하극상 운운하며 정면으로 치고 들어왔다.
이대로 결투를 하면 누가 이길지는 뻔했다.
디오스 백작은 불같은 성미에 비해서 그 성미를 받쳐줄 정도의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밀턴과 결투를 하면 누구 목이 날아갈지는 뻔한 것이다.
그때 디오스 백작을 구해준 것은 그의 뒤에 있던 유하네스 후작이었다.
“하하하…. 진정하게. 포레스트 후작. 디오스 백작도 조금 말이 과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지 않는가?”
유하네스 후작이 나서서 중재를 했지만 밀턴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전시에 지휘관에게 반란 의사를 보였습니다. 군법대로라면 목을 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그거야….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가? 서로 국가도 다르고,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군법을 적용 시켜야겠는가?”
“예. 그래야겠습니다.”
“이보게 포레스트 후작….”
“군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나라가 다르다고 해서 군법을 적용시키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특례를 적용시키면 군기가 무너집니다.”
밀턴은 유하네스 후작의 말을 끊은 다음에 짜증난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고 전쟁에 나왔습니까? 젠장, 이래서 초심자들은….”
뒤에 말은 그냥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지만 유하네스 후작과 그 뒤에 있는 인간들의 귀에도 뚜렷하게 들렸다.
그러자 유하네스 후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까지 예의는 아니라도 최소한의 나이대접은 해준다는 느낌의 밀턴이었는데 태도가 싹 변한 것을 느낀 것이다.
‘이놈이….’
유하네스 후작은 이게 밀턴이 지휘관으로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여기서 밀려서는 계속 질질 끌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너무하는군.”
“뭐가 너무하다는 말입니까?”
“우리도 이 전쟁을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네. 말하지만 동등한 입장이라는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우리 모두를 무시하기만 하는군.”
“동등? 하아…. 고작 2만 언저리 군사를 이끌고 와서 동등이라….”
“…….”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른 나라의 지휘관들은 밀턴의 말에서 ‘나는 너희를 존중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라는 의사를 느꼈다.
그리고 그게 밀턴의 본래 의도이기도 했다.
저쪽이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예상했고, 그 시비를 곱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핸디캡을 지고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야.’
밀턴은 애당초 눈앞에 있는 인간들을 전력이 아니라 짐덩어리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턴은 작정하고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짐덩어리들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꼭 나와야 할 대사를 유도하기 위해서 말이다.
“후작이 이렇게 독단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이 전쟁에 협조할 수 없네.”
‘좋았어.’
바로 이 말이다.
자발적으로 전쟁에 협조할 수 없다는 유하네스 후작의 말에 밀턴은 속을 쾌재를 불렀다.
이제부터는 정해진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서 목적을 이루면 된다.
밀턴은 침착하게 유하네스 후작에게 말했다.
“전쟁에 협조할 수 없다면? 뭘 어쩌겠다는 것이오?”
“그건….”
유하네스 후작의 말문이 막혔다.
협조할 수 없다고 한다고 해도 막상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밀턴의 명령에 계속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군법을 거스르는 것이다.
밀턴이 정말로 군법으로 자신들을 처벌할지 안 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디 한번 해보라고 하기에는 군법이 부담되었다.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합법적인 수단으로 밀턴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사령관의 독단이 지나쳐서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면 우리는 원군을 물리고 본국으로 돌아가겠소.”
유하네스 후작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연합군의 테두리 안에서 반항할 방법이 없다면 그냥 이 테두리를 나가 버리면 된다.
이들이 합법적인 수단으로 밀턴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세비안 자작은 이걸 예상하고 밀턴에게 대응 방법을 알려 주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포레스트 후작! 진심이오?”
“그렇소. 지휘 체계를 방해하는 아군은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지. 나는 당신들이 필요 없소.”
밀턴이 산뜻하게 갈 테면 가라는 식으로 말하자 유하네스 후작과 다른 귀족들은 크게 당황했다.
‘진심인가? 아니 허풍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하지만 진심이라면 어떻게 하지?’
사실 이들이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다.
한 번의 전투도 없이 그저 지휘관과 트러블을 일으켜서 본국으로 돌아간다?
커리어에 있어서 이렇게 심각한 오점을 남기고 싶은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애당초, 이들은 자국 안에서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게 아니다.
이 전쟁 자체를 생색내기 정도로만 생각하고 원군을 파병한 왕국들이다.
군사를 인솔하는 사령관도 그저 그런 인물을 보냈을 뿐이다.
즉, 문제를 일으키고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추궁이 들어오면 그걸 커버할 수 있는 힘 있는 인물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한 명은 있다.
“후작, 우리가 이대로 돌아가면 후작도 본국에서 추궁이 들어올 것 아니오”
글로스터 왕국의 조쉬 카본 백작이 말했다.
그러자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내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위치인지 모르오?”
“그건….”
“나는 당신들과 다르게 본국에서 책임을 물을 사람이 아무도 없소.”
‘내 요물 약혼녀 빼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