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연회가 끝나고 밀턴은 피곤함에 지쳐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괜찮으십니까? 주군.”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런 밀턴을 보필하는 세비안 자작과 제롬의 말에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아…. 차라리 전쟁터에서 싸우는 게 속 편하겠어.”
절대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무의미한 개소리를 웃으면서 들어주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연회에서 쏙 빠진 비앙카가 부러울 뿐이었다.
‘난 진짜 정치가 타입은 아닌가 봐.’
이런 건 밀턴보다 레이라 여왕이 잘하는 것이다.
그녀라면 아마 연회장 분위기를 한 손에 휘어잡고, 판을 자기 좋을 대로 흔들었을 것이다.
밀턴은 정신적으로 지쳐서 이제 그만 침대로 다이빙해서 기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포레스트 후작님이 맞으십니까?”
밀턴의 방으로 가는 골목에 한 남자가 나타나서 말했다.
‘빌어먹을….’
짜증이 왈칵 치솟는 밀턴에게 세비안 자작이 헛기침을 하며 신호를 주었다.
“크흐흠…. 주군.”
‘알아. 안다고….’
여기는 남의 집이다.
나는 화를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똑똑한 세비안 자작이 화내지 말고 웃으라고 했으니까.
자신을 납득시킨 밀턴은 웃으며 말했다.
“맞소. 내가 밀턴 포레스트요.”
그러자 상대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플로렌스 공국에서 온 칼 토마스라고 합니다.”
‘플로렌스 공국?’
그러고 보니 이번 연회에서 플로렌스 공국의 인물은 만나보지 못했다.
이번 원정의 책임자인 공주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나오지 못했다고 들었다.
“플로렌스 공국의 인물이 여기는 어쩐 일이오?”
“저희 공주님께서 후작님을 꼭 뵙고자 합니다. 괜찮으시면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밀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볼일 있으면 자기가 올 것이지.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야? 지가 공주면 다야?’
공주라고 하면 레이라 여왕의 공주 시절 정도밖에 모르는 밀턴이었다.
그래서인지 딱히 공주라고 해서 가녀리고 지켜줘야 할 그런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전하기 위해서 찾아온 남자의 태도가 무척 정중했고, 또 이 정중한 태도의 남자의 기세가 제법이라는 것이 밀턴의 마음을 흔들었다.
“칼 토마스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익스퍼트로군. 그것도 최소 중급 이상.”
밀턴이 정확하게 자신의 경지를 짚어내자 칼이라는 남자는 살짝 놀란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안목이 좋으시군요.”
“그런 편이지.”
사실 안목 보다는 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칼 토마스]
기사 LV.5
무력 - 85 통솔 - 70
지력 - 35 정치 - 32
충성 - 00
특성 - 호위, 분전, 수성.
호위 LV.5 : 충성을 바친 상대를 호위 할 때 전반적인 능력치가 상승한다.
분전 LV.5 : 위급한 상황이 되면 발동한다. 자기 실력의 최대 50퍼센트 이상의 실력을 보인다.
수성 LV.3 : 수성전에서 아군의 사기를 상승시키고 본인의 지휘력이 상승한다.
이 정도면 상당한 인재였다.
무력 수치 85만 해도 상당한데 특성도 꽤 매력적이었다.
‘호위, 분전, 수성이라. 좀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네.’
좀 전에 연회장에서 거들먹거리던 유하네스 후작과 그 외 기타 등등에 비하면 훨씬 더 전쟁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남자였다.
그리고 이 정도의 남자를 휘하에 두고 있다면 플로렌스 공국의 공주님이라는 사람에게도 흥미가 생겼다.
“안내해주게.”
“알겠습니다.”
밀턴은 안내를 받아서 플로렌스 공국의 공주가 머물고 있는 궁으로 안내받았다.
“여기에 머물고 계신가?”
“예. 그렇습니다.”
안내를 받은 곳은 밀턴이 머물고 있는 곳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별궁이었다.
그냥 일반 사신들이 머물다 가기에 적합하게 만들어 놓은 소박한 별궁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공주가 찾아왔는데 이런 대우를 하는 것을 보면 플로렌스 공국의 위치가 대륙에서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었다.
“공주님. 포레스트 후작을 모셔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와요.”
칼이라는 남자가 말을 하자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밀턴이 안에 들어가자….
“어서 오세요. 포레스트 후작. 제가 바이올렛 론 플로렌스입니다.”
거기에는 척 봐도 가녀린 체구의 공주님이 있었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플로렌스 왕가의 상징인 검은색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트리고 다갈색의 눈동자가 맑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청순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가녀린 체형과 어우러지니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매력을 발휘했다.
밖에 내 놓으면 바람에 훅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로 가녀린 여성의 모습이었다.
밀턴은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밀턴 포레스트라고 합니다.”
약소국의 공주라고 해도 절대 깔보지 않고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하는 인사였다.
공주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만남을 청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긴히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만남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예의바른 바이올렛 공주의 말을 들으며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게 공주지.’
누구 덕분에 공주라는 신분에 강력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밀턴에게 있어서 바이올렛 공주는 편견을 고쳐줄 좋은 대상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 상태창 한번 볼…. 이게 뭐야?’
그녀의 상태창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바이올렛 론 플로렌스]
공주 기사 LV.5
무력 - 88 통솔 - 85
지력 - 25 정치 - 20
충성 - 00
특성 - 폭주, 분전, 특공, 육감,
폭주 LV.8 : 전투 중에 자신의 부상을 무시하고 싸울 수 있다. 단, 이성적인 판단이 크게 떨어진다.
분전 LV.8 : 위급한 상황이 되면 발동한다. 자기 실력의 최대 80퍼센트 이상의 실력을 보인다.
특공 LV.9(MAX) : 다수의 적을 상대로 단신으로 파고들어서 날뛴다. 높은 확률로 상대방의 전열을 무너트릴 수 있다. 적의 사기를 감소시킨다.
육감 LV.5 : 자신이 지휘하는 군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치는 것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
‘…어? 이상하다. 능력이 고장 났나?’
왜 공주에게 능력을 사용했는데 뜨는 상태창은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하게 하는 능력치가 나온 것일까?
밀턴은 다시 한번 눈을 뜨고 바이올렛 공주님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뜨는 능력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 공주를 다시 봤다.
‘음…. 변함없는데?’
눈앞에 있는 건 전쟁은 고사하고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할 것처럼 가녀리고 청순한 여자였다.
전쟁?
검보다는 바늘을 들고 얌전하게 수를 놓는 것이 그녀에게 어울릴 듯했다.
그런데 능력치는 무슨 전설의 광전사 같은 느낌이었다.
특공 특성의 레벨이 MAX인 건 처음 봤다.
그 겁 없던 릭에게도 특공 특성의 레벨은 4였는데 말이다.
거기다 폭주?
이런 특성은 진짜 처음이었다.
전투 중에 부상을 신경 쓰지 않고 싸울 수 있다. 그런데 이성적인 판단은 크게 떨어진다.
아무리 봐도 이런 특성은 가녀리고 청순한 공주님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광전사에게 붙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공주는 또 뭐지?’
이때 밀턴은 확신했다.
타입은 다르지만 이 공주 역시 정상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 밀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이올렛 공주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포레스트 후작님.”
겉모습만 보면 아름다운 공주의 칭찬이었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밀턴은 그녀의 칭찬이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그리 대단한 명성이라고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밀턴이 겸양을 하자 바이올렛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설마요. 공화국의 침공에서 레스터 왕국을 구하신 구국의 영웅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후작님의 명성은 우리 공국에서도 유명하답니다.”
바이올렛 공주의 목소리가 살짝 흥분되었다.
그런 공주를 보며 밀턴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플로렌스 공국은 우리나라의 바로 남쪽에 있었지.’
만약 레스터 왕국이 공화국에 밀렸다면 그 다음은 바로 플로렌스 공국의 차례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플로렌스 공국 역시 당시 레스터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그 전쟁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등극한 밀턴에 대한 관심 역시 높은 것이 당연했다.
바이올렛 공주는 그 후에도 밀턴이 전쟁터에서 활약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이어 갔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설마 그 상황에 오히려 힐데스 공화국의 국내로 군을 진군시키다니. 그 작전을 듣고 저는 감탄에 전율이 일어났답니다.”
“아…. 그런가요?”
‘그거 세비안 자작의 작전이었는데.’
“더구나 그 지크프리트를 상대하며 유일하게 승전을 거두기도 하셨죠? 정말 대단합니다. 지크프리트라고 하면 그 데릭 브란스 공작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강적. 그런 강적을 당당하게 정면에서 격퇴하시다니.”
바이올렛 공주는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점점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눈동자도 초롱초롱해지고 밀턴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이 마치….
‘빠순이?’
그렇다.
마치 아이돌을 영접하신 사생팬의 모습과 같았다.
‘어쨌든 적의는 없어 보이네.’
밀턴은 살짝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로서 그녀에게 자신을 향한 적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레이라 여왕에 버금가는 요물이긴 한데 그녀의 지력은 25였고, 정치는 20이었다.
결코 요물 수준의 연기를 보일 수는 없는 수치였다.
그러니 밀턴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밀턴에 대한 찬양을 하던 바이올렛 공주는 정신을 차리고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포레스트 후작님. 이렇게 따로 만남을 청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 하시죠.”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밀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저희 플로렌스 공국에 선봉을 맡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선봉을 맡겨 달라는 말입니까?”
밀턴의 반문에 바이올렛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큰 공을 세워야 합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밀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밀턴의 모습이 망설임이라고 생각한 바이올렛 공주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후작님이 보기에는 제가 미덥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후작님이 보시는 것보다 더 강합니다.”
바이올렛 공주는 꽤 망설이며 말을 했다.
사실 여자인 자신이 이런 말을 한다고 과연 믿어줄지 의문이었다.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이 강해봤자 한계가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익스퍼트 상급, 거의 최상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강자죠.”
밀턴은 너무나 선선하게 바이올렛 공주의 강함을 인정했다.
“…….”
그런 밀턴의 태도에 오히려 그녀는 어리둥절해져 버렸다.
그녀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대우였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더해져 높은 경지에 이른 그녀였지만 보통 남자들은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은 연무장에서 자신의 검에 직접 무릎을 꿇은 남자들뿐이었다.
그 남자들 중에서도 반 이상은 여자한테 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않고 오히려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인간들이 태반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밀턴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실력을 인정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경지도 완벽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힘은…. 충분히 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바이올렛 공주는 진심으로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