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밀턴에게 바우첸 국왕이 말했다.
“후작도 알겠지만, 이 대륙에서 북부의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와 귀국인 레스터 왕국 정도네.”
“예. 알고 있습니다.”
“즉, 다른 나라에서는 공화주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공화국의 위험이 어떤 것인지 직접 피부로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스트라부스 왕국이 공화국의 공세를 모두 감당해 주었으니 말이야.”
바우첸 국왕의 말에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대가로 당신들은 주변 국가에서 군사적 원조를 받았잖아?’
입 밖으로 낼 얘기는 아니었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이 공화국을 전담 마크하다시피 막은 것은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지 다른 나라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어쨌든 밀턴은 바우첸 국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까? 이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공화주의에 대한 위기감이 사라진 모양일세.”
밀턴은 이해가 갔다.
레스터 왕국 역시 이전의 전쟁 전까지만 해도 평화가 지나쳐서 국가의 지도층들이 나태함에 젖어 있었다.
지금이야 상황이 나아졌다.
평화의 이면에 있는 위기를 깨달았고 밀턴의 주도하에 국방의 경계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지난 전쟁에서 뼈아픈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국토의 반 이상이 유린당했고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사망했고, 수도도 불타올랐다.
레이라 공주의 즉위하에 부흥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해도 그때의 상처와 공포는 아직 국민들에게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이 전쟁에 큰 힘을 쏟을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까?”
밀턴의 확인하는 말에 바우첸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적당히 생색만 내고 기다리면 우리나라가 공화주의자들을 물리쳐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생색내기.
바우첸 국왕의 말대로 다른 나라에서 보낸 원군의 규모는 정말 딱 그 정도였다.
밀턴이 데리고 온 레스터 왕국의 8만 병력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서 보낸 병력을 다 합해도 9만이다.
적은 병력은 결코 아니지만 다섯 개나 되는 나라에서 모은 연합군의 규모로는 확실히 초라했다.
공화국에서는 세 개의 나라가 힘을 합쳐서 25만의 군세를 만들었는데 말이다.
애당초 이건 입장의 차이였다.
공화국과 실제 국경을 마주하고 그들의 위협을 피부로 실감하는 스트라부스 왕국과 레스터 왕국에 비해서 다른 나라들에게 있어서 공화국은 위험한 존재긴 해도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한국에서 IS 같은 테러 단체를 대하는 개념하고 비슷한 것일까?’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짜증나는군.’
밀턴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문득 놓친 것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제국에서의 원군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입니까?”
제국에서 원군을 보낸다면 병력은 훨씬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최후의 희망으로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밀턴에게 바우첸 국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국에서는 원군을 파병하지 않기로 결정했네.”
“그게 정말입니까?”
순간 밀턴은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우첸 국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이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원군의 파병 숫자가 적은 것에도 제국의 입김이 있을 가능성이 크네.”
글로스터 왕국과 스트라빈 왕국, 그리고 헤리퍼드 왕국은 앤드루스 제국의 그늘 아래에 있는 제후국이다.
앤드루스 제국에서 입김을 불어넣었다면 아마 영향이 적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문제는 왜 앤드루스 제국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에 원군 파병을 거절했느냐인데….
여기에는 굉장히 복잡한 정치적 관계가 엮여 있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군사력만 놓고 보면 이 대륙에서 2위 국가다.
2위라는 순위는 언제든지 1위를 넘볼 수 있는 자리라는 말이다.
앤드루스 제국의 입장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은 공화국의 침략을 막아주는 유용한 방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강력해져서는 곤란한 잠재적 경쟁자이기도 했다.
북방의 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스트라부스 왕국은 군사력을 마음껏 증강시킬 수 있었다.
그것도 주변 국가의 견제는 고사하고 오히려 지원을 받으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앤드루스 제국 역시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위기감을 느끼는 여론이 생겨났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군사력에 들이는 예산과 편성 인력을 봤을 때 이미 군사력은 제국의 아래가 아닐지도 모른다, 라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물론 아직은 소수파의 의견이다.
앤드루스 제국은 이 대륙에 유일한 제국이었고 제국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위광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사력이 계속 커지는 것을 지켜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는 대다수가 공감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을 관리해야 한다.]
딱히 공식적인 의견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황제가 사석에서 몇 마디를 하고 제국의 귀족들이 거기에 찬동을 하자 묵시적인 동의가 이뤄졌다.
문제는 스트라부스 왕국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라는 것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앤드루스 제국의 제후국이 아니다.
조공의 양을 늘리거나 교류를 명목으로 왕족을 인질로 잡아두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무역이나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도 어려웠다.
앤드루스 제국와 스트라부스 왕국의 사이에는 발랑스 왕국과 레스터 왕국이 끼어 있다.
직접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제재를 가할 수도 없었다.
결국, 앤드루스 제국이 선택한 유일한 방법은 외교적인 압박이었다.
[전 대륙의 왕국이 스트라부스 왕국에 군사적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은 아직도 북부의 공화주의자들을 토벌하지 못하고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다. 우리 제국으로서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북부에 정치적으로 필요한 적을 만들어서 왕국의 지원을 무한정 받아들이고 있는 현 상황에 책임을 느끼고 행동하기 바란다.]
축약하자면….
너희들이 전 대륙에 군사 지원비로 받고 있는 돈이 얼마인데 아직까지 공화국에 밍기적거리는 것이냐?
혹시 공화국을 토벌할 수 있는데 그냥 살려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
그게 아니라면 공화국을 토벌하거나 무제한적인 군사력 증강을 자제해라, 라는 내용의 압박이었다.
이런 앤드루스 제국의 압박은 효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엄청난 반작용을 불러왔다.
“제국 놈들은 미쳤답니까?”
“아니, 우리가 공화주의자들을 철두철미하게 막아주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정치적 이용이라고?”
“우리나라가 제 놈들의 제후국도 아닌데 무슨 권리로 이런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제국의 오만함과 무례함을 성토했다.
자신들이 북부의 공화국을 막아주는 것에 고마움은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책임을 묻는 제국의 행동이 스트라부스 왕국으로서는 괘씸할 만도 했다.
그래도 상대가 제국은 제국인지라 스트라부스 왕국에서는 공식적인 대응 자체를 하지 않고 그냥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는데….
이게 국민들의 자존심을 더 자극했다.
“아니, 우리가 왜 제국한테 이런 말을 들어야 해.”
“꼬우면 지들이 막든가?”
“내 말이. 국왕 전하도 제국의 황제한테 그냥 그렇게 말하면 안 되나?”
“XX…. 제국이 무서운가 보지.”
“무서울 게 뭐 있어? 막말로 우리가 제국한테 뭐가 꿀려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안에 있는 반앤드루스 제국 정서는 귀족 사회를 넘어서 일반 백성들에게도 전염되었다.
그때까지 앤드루스 제국과 스트라부스 왕국의 사이는….
먼 나라 안 이웃 나라.
딱 이 정도였다.
서로 관여할 일도 없다고 생각한 두 나라였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사이가 확연하게 나빠졌다.
앤드루스 제국에서는 스트라부스 왕국을 길들이지 않으면 주인을 물 수 있는 개라고 불렀고….
스트라부스 왕국은 앤드루스 제국을 고마움도 모르는 야만적인 국가라고 불렀다.
그게 대략 30년 전의 일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나라의 국민감정은 악화일로를 걸어온 것이다.
밀턴도 스트라부스 왕국과 앤드루스 제국의 대략적인 이해관계는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교양 시간에 실패한 외교적 대응 사례 중에 하나로 교육할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발 떨어져 있는 외국인의 입장이었기 때문일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공화국과의 전면전에 원군 파병을 금지할 정도였다니….’
아마, 제국에서는 이 전쟁에서 자신들이 원군을 보내지 않아도 스트라부스 왕국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단, 이겨도 그냥 이겨서는 곤란하고, 공화국을 상대로 충분히 힘을 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번에 침공한 공화국군의 규모는 25만에서 30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침공 소식을 듣고 앤드루스 제국은 이번 기회에 스트라부스 왕국을 제대로 길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제국의 원군은 없다 이건가? 그렇다면 원군은 17만. 스트라부스의 전력이 대략 30~40만이라고 하니까….’
밀턴이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굴렸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부족해. 이러면 내 예상하고는 다르잖아?’
인상을 찌푸린 밀턴에게 바우첸 국왕이 말했다.
“사실 나는 레스터 왕국의 원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네. 하지만…. 역시 입장이 같으니 다르긴 다르군. 8만이라는 대병력에 레스터 왕국 최고의 명장이라는 포레스트 후작이 직접 와주다니.”
바우첸 국왕은 왕좌에서 일어나더니 밀턴의 앞에 내려와서 직접 밀턴을 일으키더니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국왕으로서 나 바우첸 프라이베르크 스트라부스는 레스터 왕국이 오늘 보여준 헌신과 우정에 깊은 감사를 표하네.”
일국의 국왕이 직접 대전으로 내려와서 손을 잡아주며 감사를 표했다.
전쟁 중에 원군을 이끌고 온 사신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스트라부스 왕국과 레스터 왕국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지금 바우첸 국왕의 행동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보통 한 국가의 군주에게 이런 대우를 받으면 가문 대대로 전승할 수 있는 영광이었다.
하지만 밀턴은 이 상황에서 그저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X됐다.’
바우첸 국왕과의 독대 이후 밀턴은 왕궁의 별궁으로 안내되었다.
사자의 궁이라는 별궁으로 타국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왕족이 태어나서 자라는 궁전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나고 자란 밀턴이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별궁에 안내받은 밀턴은 시중을 들겠다는 아름다운 여성들도 모두 물렸다.
아름다운 미인과 향기로운 미주가 밀턴을 유혹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홀로 남은 밀턴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진짜 꼬여도 더럽게 꼬였네.”
푸념을 한 밀턴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해봤다.
원래 밀턴의 계획은 이랬다.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은 엄청나게 심각한 전쟁이다.
전 대륙의 병력이 움직이고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정말로 공화주의가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르는 전쟁이다.
사실 밀턴이 보기에는 왕정이나 공화주의나 그게 그거였지만 자신이 왕정 국가에 태어난 이상 공화주의는 일단 적이다.
그러니 무조건 이겨야 하는 전쟁이다.
그러니 어여쁜 약혼녀를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놔두고 전쟁터로 참여한 것이다.
다행이도 아직까지 이 대륙에서 공화국보다는 왕국의 힘이 강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단독으로 상대하던 것과 달리 왕국의 힘이 집중되는 이번 전쟁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화국을 끝낼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이 전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밀턴뿐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원군을 자신의 반도 안 되게 가지고 왔고, 심지어 제국은 파병조차 하지 않았다.
국가 간의 감정을 개입시켜도 되는 국면이 있고 안 되는 국면이 있는데 말이다.
밀턴으로서는 시작부터 예상과 달라진 것이다.
원래는 진짜 압도적인 전력….
그러니까 100만 단위의 군대를 넓게 이용해서 공화국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려고 했다.
지크프리트가 아무리 전쟁의 귀재라고 해도 세 배 이상의 병력이 전방위적으로 날뛰면 무너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지구의 역사에서도 증명된 것이지만 덩치가 큰 상대가 작은 상대를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판을 크고 넓게 벌리는 것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국내 전쟁에만 국한하는 게 아니라 공화국으로 역공을 펼치는 것도 포함해서 전쟁의 범위를 넓게 벌리면 적은 전력을 잘게 나눠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물량의 차이가 드러나고 결국에는 덩치가 큰 쪽이 이기는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을 수 있는 필승법.
밀턴이 생각한 계획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설마 주변 국가들이 이렇게 비협조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