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99화 (99/257)

제99화

백성들이 자신을 열광적으로 좋아해준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쑥스럽기도 한 밀턴이었다.

“어쨌든 후작이 이 나라에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백성들은 큰 안도감을 가질 수 있네. 그러니 후작이 직접 나서는 것은 좋지 않아.”

레이라 여왕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밀턴도 살짝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나라고 좋아서 전쟁터에 나가는 전쟁광은 아닌데….’

하지만 자신이 없다면 누가 나간단 말인가?

밀턴은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 레이라 여왕에게 말했다.

“출정을 허가해 주십시오. 역시 제가 가야 합니다.”

“고집이 황소고집이군.”

거듭해서 전쟁터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밀턴을 보며 레이라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조건부로 후작의 출전을 수락하겠네.”

“조건이라니요?”

“나와의 결혼. 그것이 후작의 출전을 수락하는 조건 중에 하나요.”

레이라 여왕의 말에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또냐?’

그동안 레이라 여왕은 몇 번이고 밀턴에게 결혼을 권했다.

가장 심했던 것은 그녀가 여왕으로 등극하면서였다.

국혼과 즉위식을 동시에 진행하는 편이 좋다고 하면서 밀턴을 압박했다.

그때마다 밀턴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결혼을 피했다.

사실 이건 밀턴에게도 미묘한 문제였다.

솔직히 싫지는 않다.

레이라 여왕의 요기(?)에는 나름 내성이 생겼다.

권력의 소용돌이에 뛰어드는 꼴이 되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조용한 은수저 라이프는 이제 글렀다.

그러니 레이라 여왕과의 결혼도 마냥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마 결혼을 한다고 하면 그럭저럭 합을 맞춰가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피아가 마음에 걸려.’

그렇다.

밀턴이 레이라 여왕과 결혼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소피아의 존재 때문이다.

밀턴에게 있어서 레이라 여왕이 요물이었다면 소피아는 귀여운 여동생 같은 존재다.

같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그런 상대 말이다.

상으로 보석이나 꽃이 아니라 신축 허가서를 줬을 때 더 기뻐한다는 것은 조금 특이했지만 그녀는 밀턴에게 몹시 순종적이었다.

그런 소피아의 모습에 정이 붙었고, 언제부터인가 정을 넘어서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 밀턴은 소피아에게 청혼을 하지 않았을까?

이미 포레스트가의 가신들 사이에서는 소피아가 밀턴의 내연녀 같은 이미지로 새겨져 있었다.

소피아의 부친인 필리노버 남작 역시 비슷한 오해를 하고 있었고 말이다.

사실, 이쯤 되면 다른 곳에 시집가기 힘들어서라도 밀턴이 책임져야 했다.

밀턴도 몇 번이고 청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때는 또 반대로 레이라 여왕이 마음에 걸렸다.

레이라 여왕의 미모는 그야말로 절세의 미녀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미모였다.

어떤 남자라도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하면 평생 기억에서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눈이 부셨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과의 결혼에 혹하지 않을 만큼 밀턴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즉, 소피아와 결혼하자고 하면 레이라 여왕이 마음에 걸리고, 레이라 여왕과 결혼하려고 하면 소피아가 마음에 걸렸다.

‘나 진짜 쓰레기구나.’

그렇다.

결국 밀턴이 자기 마음을 하나로 정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우물쭈물 하는 밀턴을 보고 레이라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눈치 100단인 그녀가 밀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요물의 촉과 여자로서의 감이 진작 답을 주었던 것이다.

다만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은 여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레이라 여왕은 자신의 미모를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미소만 한 번 지어줘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은 남자들도 질리도록 봐왔다.

그런데 자신과의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가 다른 여자 때문이라니?

자존심이 안 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잃고 오로지 복수만을 위한 왕도를 걸어왔던 그녀에게 여자로서의 자존심 같은 사사로운 감정이 남아 있다니 말이다.

‘내가 독기가 빠진 걸까? 아니면 그만큼 집착이 가는 걸까?’

레이라 여왕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밀턴과의 결혼은 어디까지나 정략적인 선택지 중에서 베스트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뭐랄까?

조금 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애당초 정략만을 위해서였다면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권력을 이용해서 소피아를 다른 남자와 반강제로 결혼시키면 자동적으로 목적은 이룰 수 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레이라 여왕이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생각을 했다고 해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을 했다가 밀턴에게 들킨다면 어떻게 될까?

경멸? 매도? 실망?

뭐가 됐든 호의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정략적인 동맹 관계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속으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밀턴 포레스트라는 한 남자에게는 그렇게 생각되고 싶지 않았다.

‘뭐, 이미 내가 썩 좋은 이미지로 새겨져 있는 건 아닌 듯하지만 말이야.’

밀턴의 머릿속에 레이라=요물이라는 공식이 들어있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 오해(?)를 풀기가 어렵다는 것도 같이 알고 있기에 별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어쩔 수 없지. 그냥 내 이미지를 바꿔 준다고 생각하고 내가 양보하자.’

결국 레이라 여왕은 큰 결심을 굳혔다.

“포레스트 후작.”

“말씀하십시오.”

“나와의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에 소피아 필리노버 영애가 포함되어 있는 것 맞소?”

“…….”

이 시점에서 침묵은 긍정이다.

밀턴의 침묵에 레이라 여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약 내가 여왕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나를 본처로 받아들이고 필리노버 영애를 후처로 받아들였겠지.”

만약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본처인 것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 레이라 여왕이었다.

어쨌든 이제까지 모른 척해 온 문제를 자기 입으로 꺼낸 것은 막연하게 화풀이나 잔소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스스로 나서서 매듭을 풀려고 하는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여왕인 나와 결혼을 한다면 그대는 대공의 직위를 받겠지. 하지만 왕의 부군이 된 자는 첩을 들일 수 없소.”

“알고 있습니다.”

귀족에게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세계이긴 하지만 예외는 있다.

여왕의 남편이 바로 그런 예외 중에 하나였다.

딱히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여왕이라는 전례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지 당연한 상식 같은 것이었다.

만약 여왕이 남편을 들여서 둘 사이에 아이가 나오면 그 아이는 당연히 다음 왕위 후계자가 된다.

그런데 만약 여왕의 남편이 첩을 들여서 아이를 낳으면?

이건 입장이 엄청나게 애매해지는 것이다.

가족 관계를 보면 그 아이는 여왕을 어머니를 두고 있다.

비록 친모는 아닐지라도 가족의 족보상으로 해석하면 그렇다.

다만, 그 아이에게는 왕족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그 아이의 존재 자체가 굉장히 애매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원래 왕국에서 왕족의 혈통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 여왕의 남편들은 평생 여왕 하나만을 보고 살았다.

뭐,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종의 불문율.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레이라 여왕은 그 부분을 파고들어서 해답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밀턴에게 큰 양보를 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후작이 원한다면 대공위를 받고 필리노버 영애를 후처로 들여도 좋소.”

“…예?”

밀턴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라 여왕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단, 후계자 문제는 확실하게 분리하겠소.”

“분리하신다는 말씀은?”

“내가 낳은 아이는 왕족으로서 다음 왕위를 이을 것이고, 필리노버 영애가 낳은 아이는 포레스트 가문을 이어 받을 것이라는 말이오.”

“아아….”

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후계자의 분리.

가장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고 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어차피 밀턴이 레이라 여왕과 결혼을 하면 아이는 왕족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 말은 포레스트 가문의 혈통이 왕족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게 당연한 것이고 혈통이 왕족의 계보에 흡수되는 것은 귀족들에게도 별 거부감 없는 일이다.

오히려 일종의 영광이라고 여기지.

그런데 레이라 여왕이 포레스트 가문을 분리해서 따로 이어받게 한다, 라는 편법을 제시하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듯했다.

“귀족들의 반발은 괜찮겠습니까?”

전례가 없는 만큼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레이라 여왕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 나하고 후작이 한 목소리를 내는 일에 반대할 사람이 있을 것 같소?”

“…·없겠군요.”

내일부터 숫자를 거꾸로 표기하자는 억지 법안을 발표해도 밀턴과 레이라 여왕의 목소리가 합쳐지면 반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권력을 100으로 나눈다면 그중에 95정도는 밀턴과 레이라 여왕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감히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자, 이제 문제는 해결되었군. 다시 한번 말하지. 나와 결혼해 주겠소?”

레이라 여왕의 말에 밀턴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후작,”

레이라 여왕은 단호하게 밀턴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밀턴에게 한 걸음씩 걸어갔다.

“나는 여자로서, 그리고 왕족으로서도 큰 양보를 했소.”

“그건 알고 있습니다.”

밀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레이라 여왕을 보며 살짝 경계했다.

오늘 작심을 한 것일까?

그녀의 걸음걸이에서 기백이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양보를 했는데 생각을 해?”

말을 하다 보니 짜증이 난 것일까?

레이라 여왕의 이마에 힘줄이 삐죽 돋아난 것 같았다.

“지금 나하고 장난해?”

거기다 말투도 완전히 변했다.

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레이라 여왕은 밀턴을 벽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쿵!

그녀의 섬섬옥수가 뻗어서 벽을 짚었다.

‘이게 뭐야? 역 벽쿵?’

“어…. 여왕 전하 조금 진정하시고 체통을….”

“시끄러. 닥쳐.”

레이라 여왕은 그대로 자기 입술을 밀턴에게 들이박았다.

딱.

둘의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친 키스.

밀턴은 자기 입술이 찢어지는 걸 느꼈지만 그녀를 밀어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박력에 압도되었고, 무엇보다 그녀와의 키스는 너무 황홀했다.

레이라 여왕은 참고 참았던 울분을 이 키스로 폭발시키겠다는 듯이 거칠게 밀턴을 공격했다.

그녀의 양손은 어느새 밀턴의 목을 꽉 끌어안았고 밀턴 역시 손을 뻗어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길고 긴 키스가 끝난 후….

레이라 여왕은 살짝 상기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나하고 결혼해. 알았어?”

“예.”

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해 버렸다.

꽤 나중의 일이지만 이때 레이라 여왕이 한 역프로프즈가 세상에 전해지고 많은 여자들이 레이라 여왕의 배짱과 카리스마에 감격했다고 한다.

이 세계에서 여자들은 어디까지나 조신하게 기다리는 역할이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어도 먼저 말도 못 걸고 그냥 수줍게 관심 있는 척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평민도 아니고 왕족인 레이라 여왕이 거침없이 먼저 어택하고 프로포즈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자들은 자지러지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우리 여왕님.

여왕님 그냥 날 가져요.

일종의 원조 걸 크러쉬로 등극해 버린 것이다.

그리해서 레스터 왕국에서는 남자들에게 먼저 사귀자고 말하는 여자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프로포즈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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