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2년.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사용하는 인간에게는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전화에 휩싸여서 멸망의 직전까지 치달았던 레스터 왕국은 놀라운 속도로 회복했고, 이제는 회복을 넘어서 부흥의 시기가 도래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2년 동안 레스터 왕국에서 생긴 수많은 변화 중에 한 가지는 우선 레이라 공주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레이라 공주는 1년 동안 왕위에 오르지 않고 오거스트 국왕을 수색했다.
하지만 국왕은 찾지도 못했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결국 레이라 공주는 수많은 신하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레스터 왕국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레이라 폰 레스터 여왕이 된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그녀는 뛰어난 귀족층과 민중의 지지를 모두 받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왕위에 오름으로 인해서 정통성까지 갖추자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레이라 공주의 적대 세력까지 바짝 엎드려 버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집중화된 권력을 이용해서 빠르게 나라를 안정시켜 갔다.
북부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페일런 공작의 북부군에 군비를 증설하고,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복구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복구의 우선순위는 철저하게 백성들의 생활을 우선순위로 했는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수도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내린 명령이었다.
[왕궁은 가장 나중에 복구해도 되니, 우선은 일반 주민들의 거주지를 우선적으로 복구하라.]
왕궁보다도 일반 백성들의 거주구를 먼저 복구하라는 그녀의 명령에 많은 백성들은 크게 감탄했다.
그녀를 지지하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민중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레이라 여왕이었지만 그녀 못지않은 인기인이 한 명 더 있었다.
그게 밀턴 포레스트 후작이었다.
전쟁에서 공화국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시점에서 밀턴은 이미 구국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영웅이라는 것은 평화의 시기가 되면 차츰 잊히는 법이다.
하지만 밀턴은 달랐다.
밀턴의 영지인 포레스트 영지가 임시 수도로 지정되고 인구가 급격하게 유입되면서 밀턴은 그 인구를 성공적으로 포용했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었지만 밀턴은 그들을 받아들였고, 그들 대부분이 포레스트 영지에 적응했다.
그들은 포레스트 영지에 집을 얻었고, 일자리를 얻었다.
지금에 와서는 수도가 완전히 복구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수도로 돌아갈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과거에는 남부의 촌구석으로 취급 받던 포레스트 영지가 이제는 제2의 수도로 취급 받을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그 발전의 배경에는 밀턴이 과감하게 추진한 해양 무역이 한몫을 했다.
밀턴이 비밀리에-겉으로 알려지기로는 그렇다-뽑은 인선으로 추진한 해양 무역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아서 플로렌스 공국과 글로스터 왕국에 이어지는 해역 전부를 재패하고 1년이 조금 넘는 시절에는 멀리 남쪽에 있는 워터포트 왕국과의 항로를 연결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까지 레스터 왕국에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엄청난 성공 신화였다.
물론 이 성공의 배후에는 저주를 풀기 위해서 잠자는 시간마저 줄여 가며 열일을 한 전직 해적 로빈의 노력과 성과를 보일 때마다 적극적인 지원을 추진한 밀턴의 추진력이 있었다.
어쨌든 밀턴은 해양 무역 사업은 대박이었다.
항구에서 이뤄지는 무역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소피아는 확장 공사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일이 거기까지 진행되자 나머지는 순풍에 돛 단 듯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항구의 규모가 커지자 물류가 집중되었고, 일자리도 많아졌다.
돈이 시중에 많이 풀리자 자연스럽게 상업의 발달로 이어졌다.
여기서 밀턴이 또 절묘한 한 수를 두었는데 바로 상업에 관련된 세금을 깎아준 것이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이런 대박 기회에 세금을 올려서 오히려 목돈을 확 끌어당기겠지만 밀턴은 반대였다.
그리고 그 노림수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세금이 낮아지자 레스터 왕국뿐만이 아니라 타국의 상단까지 포레스트 영지에 찾아와서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세금을 낮춘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이득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인 밀턴은 그 자금을 그냥 놀리지 않고 국가에 투자했다.
북부군에 들어가는 국방비.
수도의 재건에 필요한 자금.
그 외에도 자잘한 국책 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에 밀턴은 계속해서 돈을 투자했다.
그런 밀턴을 보고 레스터 왕국의 백성들은 감탄과 감사를 넘어서 찬양까지 할 태세였다.
고작(?) 전쟁터에서 불패의 신화를 써 내린 구국의 영웅이자 전쟁의 귀재일 뿐이라고 생각한 포레스트 후작이 이제는 국가의 내정 면에서도 든든한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쏘냐?
레스터 왕국의 술집에서는 툭하면 레이라 여왕과 포레스트 후작 중에 누가 더 뛰어난 영웅인가? 라는 주제로 말다툼을 하는 술주정꾼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주먹다짐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항상 ‘빨리 둘이 결혼했으면 좋겠다.’로 끝났다.
사실, 백성들의 절대적인 찬양과 다르게 밀턴은 마냥 순수한 마음만 가지고 국가의 사업에 돈을 투자하는 게 아니다.
큰돈을 벌려면 자기 혼자 돈을 꽁꽁 쥐고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
어차피 영지의 항구 사업이 대성공한 지금 밀턴은 상업 시장의 80퍼센트 가량을 독점하고 있다.
그러니 중요한 건 판을 키우는 것이다.
국가가 빠르게 정상화되고 국민들의 주머니가 볼록해져야 시장의 정점에 있는 자신의 주머니는 부우우우울룩해지는 것이다.
실제 국가의 사정이 나아짐에 따라서 항구의 상업이 발전하는 게 점점 눈에 보이니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에게는 국가의 영웅이자 보물로 찬양받고 있으니 참 불공평한 일이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참 끝이 없기는 없구나.”
밀턴은 영주 성의 첨탑에서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처음에 자신이 영주가 되었을 때는 그냥 한적한 시골 영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노을 지는 저녁에 밭에서 돌아오는 농부들과 집집마다 올라오는 빵 굽는 연기.
그림으로 그려 놓으면 힐링하기에 참 좋아 보이는 소박한 광경이었다.
그랬던 광경이 이제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는 방사형 도로 사이사이로 수많은 건물이 들어섰고, 그중에는 이 세계에서 나름 고층 건물로 취급 받는 5층 이상의 건물도 많았다.
거기다 이 거대한 도시를 가두고 있는 외성 벽도 몹시 두껍고 견고해서 성벽 안에 거인을 가두고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성벽 너머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항구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가 있었고 거기에는 수많은 마차들이 낮 밤을 가리지 않고 끊이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다.
넘치고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밀턴이 처음에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고 목표로 했던 은수저 라이프를 지나서 이건 그냥 자수성가 다이아몬드 수저다.
밀턴은 오랜만에 자신의 영지 상태창을 확인했다.
영지 - 포레스트 영지.(임시 수도)
인구 - 678,815명.
자금 - 2,512,014골드.
주요 생산품 - 밀, 보리, 귀리, 쌀, 목재, 모피, 양모, 말, 치즈, 선박, 어육, 육포, 구리, 철, 석탄, 면직물, 귀금속, 무기, 갑옷, 가죽 제품.
주요 시설 - 구리 광산, 철광산, 상업 항구, 아카데미, 신전, 왕궁(임시), 상인 길드, 용병 길드.
개발 가능 - 콜로세움, 거대 동상, 해병 양성소.
군사력 - 기사 350인, 수습 기사 2,084인, 기병 10,000인, 보병 55,000인, 궁병 23,000인. 해병 8,000인.
“진짜 쩐다.”
밀턴은 그냥 감탄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현금만 해도 무려 250만 골드가 넘는다.
토지나 항구의 권리, 보유하고 있는 선박과 상단의 가치 같은 것을 더하면 보유 자금은 열 배 이상은 가뿐하게 뛸 것이다.
이 영지를 처음 받았을 때는 1만 골드도 안 되는 빚에 허덕여서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남부의 변경백이자 레스터 왕국의 실세로 군림한 것이다.
솔직히 여기서 더 바랄 것은 없었다.
이건 진짜다.
하지만 불안감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가진 게 많아진 만큼 지금 가진 것을 잃으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진짜…. 시대만 좀 평화롭다면 나도 이제 어깨에 힘 좀 빼고 살겠는데 말이야.”
레스터 왕국에서 밀턴을 적대하거나 어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국외로 나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쟁 이후에 밀턴은 공화국 쪽의 정보에 많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건 레이라 공주도 마찬가지였지만 밀턴은 특히 공화국의 한 남자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바로 지크프리트라는 남자 말이다.
전쟁터에서 한 번 싸워서 이긴 적은 있지만 밀턴도 이제 알고 있다.
그때의 싸움은 자신이 이긴 게 아니라 지크프리트가 그저 물러가 준 것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비앙카가 밀턴이 몰랐던 진실을 알려주고 나서였다.
지크프리트가 운영하던 검은 해골 투구를 쓴 기사들.
그 기사들이 품고 있는 비약의 정체를 비앙카는 알았다.
생명력을 일시적으로 폭주시키는 비약.
소드 유저 상급 정도만 되면 누구나 이 비약을 먹고 익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아니, 도달한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저 익스퍼트와 같은 수준의 오러를 뿜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약이 독해서 부작용도 심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약의 효과는 확실했다.
비앙카가 이 말을 해줬을 때 밀턴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밀턴과 싸웠던 공화국의 장교 알프레드 역시 갑자기 경지 이상의 실력을 보여줬다.
그것 때문에 다 이긴 전쟁에서 까딱 잘못하면 죽을 뻔했던 밀턴이다.
그걸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검은 해골을 뒤집어쓴 그 이상한 기사들은 아마도 전원이 그런 비약을 소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밀턴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보에 의하면 데릭 브란스 공작이 이끌던 원정군과의 전투에서 그 검은 해골의 기사들은 300명 가까이 등장했다고 한다.
결국, 그때의 전투에서 지크프리트는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마도 그게 공화국 내부의 사정이리라고 짐작이 갔다.
어쨌든 밀턴은 확신했다.
지크프리트라는 남자는 반드시 이 시대에 태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밀턴은 돈과 사람을 아끼지 않고 들여서 지크프리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2년 동안 밀턴이 지켜본 지크프리트의 행보는 내실을 철저하게 다지는 쪽으로 이어졌다.
이전의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지크프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밀턴에게 딱 한 번의 패전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이외의 전투에서는 모두 승리했고, 무엇보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데릭 브란스라는 대어를 잡아낸 것이 컸다.
그 명성을 밑천으로 지크프리트는 공화국 안에서 착실하게 자신의 기반을 만들어 갔다.
힐데스 공화국의 군부에서는 지크프리트의 존재감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공화국의 목적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모든 왕국과 제국을 쓰러트리고 공화주의를 세상에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강대국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런 공화국의 역사에서 지크프리트의 존재는 그 공적이 확실하게 두드러졌다.
스트라부스 왕국이나 레스터 왕국에 커다란 피해를 주기도 했고, 데릭 브란스라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거물을 잡아내기도 했다.
공화국의 군인들은 지크프리트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확실한 실적을 보여주니 공화국의 군부에서는 지크프리트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높아졌고, 지크프리트는 그들을 하나하나 포섭해 가며 군부를 장악해 갔다.
지금 지크프리트의 직함은 총통 직속 비서관에 더불어서 힐데스 공화국군의 사단장으로 취임했다.
이전의 전쟁에서는 어디까지나 총통 직속의 비서관으로서 전쟁에 참여했던 지크프리트가 불과 2년 만에 사단장으로 취임했다.
사단장이라고 하면 계급상으로는 위에 군단장밖에 없다.
독자적인 명령권이 끼치는 영향력이 1만에 달하는 계급이다.
이것은 지크프리트가 공화국의 군부 안에서 어떤 위치에 올랐는지를 반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밀턴은 이런 지크프리트의 행보를 들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상의 대립 시대도 모자라서 동시대에 나폴레옹이 같이 살고 있는 기분이군.’
확신하건대 지크프리트는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군부를 차근차근 접수하고 있는 행보를 보아하니 확실했다.
가뜩이나 혼란한 시대에 태어났는데 골치 아프게 동시대에 야망이 넘실거리는 시대의 간웅까지 함께하고 있는 이 쫄깃한 느낌.
밀턴은 지금 자신이 이룩한 것들이 전쟁 한 방에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밑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밀턴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전쟁이 벌어질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면, 밀턴은 그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