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애당초 지금 밀턴의 눈에는 로빈의 충성 수치가 보였다.
놈의 충성 수치는 고작 23.
이건 등 돌렸을 때 칼이나 안 꼽으면 다행인 수치였다.
능력이 탐이 난다고는 하지만 이런 놈을 순순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에게 5천 골드를 맡기면 1년 안에 얼마까지 불려줄 수 있지?”
밀턴의 말에 로빈은 속으로 비웃음을 띄웠다.
‘거봐라. 역시 이렇지. 고귀하신 귀족? 지랄하고 있네.’
귀족이니 뭐니 해도 결국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에 돈에 욕심 없는 인간은 없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돈 앞에서 평등하게 아래에 있다.
귀족이랍시고 잘난 척해 봐야 돈 님에 비하면 잘난 것 하나도 없다.
자신만의 개똥철학에 확신을 가진 로빈은 눈앞에 있는 귀족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둘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로빈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저를 믿고 맡겨 주신다면… 1년 안에 열 배 이상을 불려 보겠습니다.”
“고작 열 배? 네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나?”
밀턴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로빈이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열 배는 너무 안전하게 부른 것이고, 제가 마음만 먹으면 스무 배. 아니 서른 배도 가능합니다.”
어차피 돈 들고 튈 것인데 까짓것 100배라고 못 부를까?
로빈은 뻥을 제대로 질렀다.
“호오…. 서른 배?”
“예. 그렇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뭐가 더 있나?”
“예. 항로를 개척하고 항해 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덤벼드는 해적 나부랭이들도 모두 격퇴하겠습니다. 백작님이 믿고 맡겨만 주시면 제가 1년 안에 이 일대의 해안을 평정해 보이겠습니다.”
“오오…. 그거 대단하군. 그렇다면 혹시 저 멀리 남쪽에 있는 워터포트 왕국과의 항로도 개척 가능한가?”
밀턴의 말에 로빈은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원래 그쪽에서 영업(?)하던 놈입니다. 믿고 맡겨만 주시면 후작님의 영지에서 워터포트 왕국까지의 항로를 연결해 보이겠습니다.”
원래 뻥이라는 게 치면 칠수록 눈덩이처럼 살을 불리는 법이다.
로빈은 어차피 여기서 사기 치고 튈 생각이기에 닥치는 대로 막 질렀다.
사실, 지금 그가 하는 말 대부분은 자신이 한 번쯤은 머릿속에 상상했던 미래였다.
한 해역을 평정하고 그 해역의 무역로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거둬들이는 엄청난 돈.
생각만 해도 황홀하지 않은가?
“으음…. 정말 대단하군.”
밀턴 역시 그 황홀함에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고 맡겨 주십시오.”
“좋다. 너에게 맡겨 주지.”
드디어 밀턴의 입에서 바라던 말이 나왔다.
로빈은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이 감동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이 은혜는….
“단!”
로빈의 말을 끊으며 밀턴이 끼어들었다.
“‘믿고’ 맡겨 달라는 것은 좀 무리가 있군.”
“예? 아 그게 무슨….”
“너를 만나고 아직 하루도 되지 않았다. 나름 유능해 보여서 일을 맡길 수는 있다고 해도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해적이었던 너를 믿고 맡기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그…. 그것은….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빌어먹을, 귀족 주제에 나름 머리는 돌아간다 이건가? 보아하니 감시 역으로 기사 한두 명 정도 붙이겠군.’
로빈은 밀턴이 감시 역으로 누군가를 붙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설령 기사라고 해도 바다 위에서는 선장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하나둘 정도는 적당히 속여서 바다에 빠트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납득을 하는 건가?”
“예. 후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 이해해 주니 다행이군. 그러니 나는 나름대로 손을 좀 써야겠다.”
“예. 후작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로빈이 순순히 순응하자 밀턴은 병사를 통해서 누군가를 불러왔다.
“뭐꼬? 내는 와 불렀는데?”
그 누군가가 바로 비앙카였다.
“저…. 저기 이분은 누구신지?”
우락부락한 기사가 아니라 섹시한 미녀가 등장하자 로빈은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여기사?
아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밀턴은 로빈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 주었다.
“소개하지. 내가 초빙해서 모시고 있는 마법사인 비앙카 님이시다.”
“아…. 마법사?”
로빈은 순간 ‘이게 아닌데?’라는 예감이 진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턴은 로빈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비앙카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비앙카님. 전에 말씀하신 적 있지요. 부하의 배신을 억제하기 위해서 걸 수 있는 저주가 있다고?”
“응? 아아아아…. 그거?”
비앙카도 눈치가 빨라서 바로 알아들었다.
사로잡은 해적과 저주라는 두 가지 단어만 가지고도 밀턴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비앙카는 몹시 심각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가능하지. 근데 전에 내가 말했을 때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악독하고 무자비한 저주로 부하들을 억압할 수는 없습니다, 뭐 대강 이래 말했잖아?”
‘악독하고 무자비한 저주?’
비앙카의 말에 겁이 덜컥 나는 로빈이었다.
그리고 밀턴도 비앙카의 말에 바로 박자를 맞췄다.
“제 부하들에게는 그랬죠. 확실히 그렇게 잔인하고 사악한 저주를 부하들에게 걸 수는 없습니다.”
‘잔인하고 사악하다고?’
로빈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저 녀석은 아직 정식으로 제 부하가 아니고, 서로 간에 신뢰가 깊은 것도 아니죠. 무엇보다 본인도 동의했으니 저주를 걸어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언제 저주를 걸어도 된다고 했어?’
로빈은 인생을 살면서 최대의 억울함을 느끼고 있었다.
“흐음…. 그래. 그렇군. 본인이 동의했다면 뭐….”
‘동의한 적 없어! 납득하지 마 이 미친년아!’
“근데 괜찮겠나? 이거 진짜 곱게 죽지는 못하는 저주데이.”
“그 정도는 돼야죠.”
당사자인 로빈을 제외하고 밀턴과 비앙카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로빈은 똥줄이 타는 듯했다.
잔뜩 겁먹은 로빈에게 마침내 비앙카가 다가갔다.
“자, 그럼 한데이.”
“저…. 저기 마법사님.”
“힘 빼라. 금방 끝난데이.”
그리고 비앙카는 로빈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뭐지? 이 서늘한 손은?’
로빈이 보기에 비앙카의 싸늘한 손의 체온은 도저히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바로 마녀라는 건가?’
사실 비앙카에게 약간의 냉증이 있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로빈에게는 모든 것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둠의 왕이시여. 이 남자를 그대에게 제물을 바칩니다. 제물의 심장을 식탁에 올리고 피를 그대의 잔에 채우며, 그의 영혼을….”
‘뭐야? 왜 이렇게 살벌한 주문이야?’
이제 로빈은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어둠의 왕이니 제물이니 심장이니….
하나하나가 다 살벌했다.
지금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밀턴에게 죽을 게 뻔했다.
‘으…. 으으으….’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로빈을 보고 밀턴은 속으로 웃었다.
‘비앙카 님이 생각보다 손발을 잘 맞춰 주는걸?’
이제까지 비앙카가 마법을 쓰면서 주문을 외우는 건 거의 보지 못했다.
외운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을 언어였고 말이다.
그런데 저렇게 뻔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살벌한 내용의 주문까지 해 주다니….
로빈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을 봐서는 이 연극이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이자에게 속박의 저주를 걸어 주소서!”
그리고 비앙카의 주문(?)이 다 끝나자 그녀의 손에서 환한 보랏빛이 발생했다.
“으…. 으아아아아아!!”
결국 로빈은 공포를 참지 못해서 어린애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비앙카는 호흡을 정돈하며 말했다.
“저주는 완료됐데이.”
“괜찮으십니까?”
“으음…. 너무 큰 주문을 사용해서 그런지 좀 피곤하데이.”
비앙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쪽에 있는 의자로 걸어갔다.
그녀는 정말 피곤하다는 듯이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밀턴은 그런 비앙카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혀 주고 로빈에게 말했다.
“너는 괜찮은가?”
“예. 예…. 예…. 예….”
얼이 빠진 로빈의 모습을 보고 밀턴이 말했다
“다행이군. 저주가 잘 맞는가 봐?”
‘그딴 것 잘 맞기 싫어!’
로빈은 속으로만 절규했다.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가 나를 배신하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 그렇군요. 저기 그런데 후작님.”
“왜 그러지?”
“만약…. 그러니까 정말 만약에 제가 배신을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말해 주면 안 된데이.”
밀턴이 말하기도 전에 비앙카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제 저놈아는 그분에게 바쳐진 제물이데이.”
‘내가?’
“함부로 운명이 어찌 될지 말했다가는 저주가 즉시 발동할 수도 있데이.”
‘저주가 발동한다고? 결과만 알아도?’
“만약 그렇게 되면….”
비앙카는 더 이상은 말하기도 두렵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로빈은 그냥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밀턴이 로빈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하는군. 음…. 안타깝게 되었어.”
“그런….”
“걱정하지 마라. 네가 나에게 했던 약속을 모두 지킨다면 언젠가는 저주도 풀어주마.”
“…….”
로빈은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내가 아까 뭐라고 했더라?’
5천 골드 30배 뻥튀기기.
레스터 왕국에서 이어지는 해역 평정하기.
워터포트 왕국까지 항로 개척하지.
핵심 공약만 놓고 보면 대강 이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1년 안에 해 보이겠노라고 뻥을 쳤었다.
‘…X… X됐다.’
울고 싶은 심정의 로빈이었다.
원래 로빈은 굉장히 똑똑하고 눈치도 빠른 인간이다.
이런 허풍 섞인 협박이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라는 희귀한 존재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 없었고, 밀턴과 비앙카의 쿵짝이 너무 잘 맞아서 의심의 여지조차 가지지 못했다.
결국 로빈은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로빈이 사라지자….
“푸하하하…. 죽인다. 점마 저거 재미있네.”
“비앙카 님도 연기가 보통이 아니시군요.”
“크크크…. 원래 내가 사람 놀려 먹는 재미로 사는 여자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웃고 말했다.
“그런데 아까 저놈한테 건 마법은 진짜 뭡니까?”
“그냥 간단한 추적 마법이데이. 어디에 있든 간에 찾을 수 있다카이.”
“정말입니까?”
“그래. 유효 기간은 대강 1년 정도는 가니까 안심하그라.”
“호오…. 그럼 1년마다 저주를 갱신해야겠군요.”
“크크크…. 그거 좋데이. 조금씩 저주 풀어준다 카고 계속 놀려 먹자.”
“저주를 풀기 위해 꼭 필요한 의식이라고 말하고 한겨울에 얼음물에 한 시간씩 담구는 건 어떨까요?”
“재미있겠다. 또 딴 것 없나?”
“저주를 풀기 위해서 깨끗한 몸이어야 한다고 하고 한 이틀 정도 쫄쫄 굶겨 보죠.”
“니 천재가? 누구한테 그렇게 재미있는 생각을 배웠노?”
“있어요. 나PD라고.”
“그게 누군지 몰라도 나도 좀 같이 배우자!”
“푸하하하하하….”
이쯤 되면 해적보다 이 둘이 악당이 아닌가 싶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로빈은 빼도 박도 못하게 밀턴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되었다.
마법사의 자주까지 걸린 이상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유일하게 위안이 된다면 밀턴이 로빈을 향해서 상당한 지원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대형 선박을 열 척이나 지원해 주었고 선원과 별개로 병사 500명과 기사도 열 명이나 지원해 주었다.
앞이 막막했던 로빈으로서는 조금이지만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그래. 까짓것 한번 해보자.’
저주를 풀기 위해서 로빈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기로 했다.
상업과 항해에 자신이 있다는 말은 마냥 뻥이 아니었다.
거기에 귀족의 빵빵한 후원까지 등에 업었으니 아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영주님. 정말 저 남자에게 저만한 권한을 맡겨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을 거야. 족쇄는 확실하게 달았으니 말이야.”
중간에 저주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챈다고 해도 놈에게 걸려 있는 추적 마법은 진짜다.
만에 하나 배신한다면 그때는 따로 손을 쓰면 되는 것이다.
“이제 항해 무역에 관해서는 로빈에게 맡기고 맥스 너는 수석 행정관의 임무에 충실하라.”
“예. 알겠습니다.”
큰 짐을 하나 해결한 듯했지만 아직도 할 일은 잔뜩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