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조용히 이동한다. 모두 횃불은 끄고 움직이도록.”
“옛.”
무인도는 그렇게 크지 않았기에 해적들이 있는 반대편에는 금방 도착했다.
바위 뒤에 숨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놈들은 술에 취해서 엉망진창이었다.
“잘됐군. 저 정도면 사로잡기도 쉽겠어. 가자!”
“옛!”
밀턴의 명령에 바위 뒤에 있던 병력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뭐…. 뭐냐?”
“적? 적이댜아!”
혀가 꼬여서 발음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해적들은 변변한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살….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크억!”
병사들은 술 취한 해적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거의 일방적이었다.
유일하게 반항하는 인간이라고 하면….
“이놈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덤비는 거냐? 죽고 싶은 놈들만 덤벼라!”
그래도 두목이랍시고 붉은 수염은 자기 칼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반항했다.
사로잡기 위해서 살짝 거리를 두고 물러나 있는 병사들 사이에 밀턴이 나섰다.
“비켜라.”
밀턴이 나서자 붉은 수염이 잔뜩 취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놈! 네가 두목이냐? 나는 남해의 붉은 수염…. 커억!”
말을 하던 놈은 밀턴의 발차기 한 방에 명치를 맞고 나뒹굴었다.
하지만 모래를 뒤집어 쓴 놈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이놈 제… 제법이구나. 하지만 이 붉은 수염의… 푸웩!”
다시 한번 밀턴의 주먹이 놈의 안면에 꽂혔다.
“크으윽…. 이놈 정말 제법이구나. 하지만 나는 천하의 붉은 수…. 끄어어억!!”
이번에는 밀턴의 발차기가 낭심에 꽂혔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붉은 수염을 보고 밀턴이 말했다
“이…. 이놈 비겁하다.”
“그만 시끄럽고….”
뚜둑. 뚜두둑.
밀턴은 주먹을 풀면서 붉은 수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상큼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일단 쳐 맞자.”
그리고 실로 무자비한 폭행의 향연이 펼쳐졌다.
“크윽…. 나는 붉은…. 커억….”
붉은 수염은 끝까지 자기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쳐 맞기만 했다.
붉은 수염의 구타는 제롬이 인질로 잡혀 있는 맥스를 찾아서 데려오기 까지 계속되었다.
“다모 대덩요. 다 던단 ㅤㄷㅛㅇ더해 두데요.”
입술이 퉁퉁 부어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붉은 수염은 처음의 위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이 구타가 끝나기를 바라면서 싹싹 빌고 있었다.
“맥스, 무사하냐?”
“예.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영주님.”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맥스가 멀쩡한 모습을 보니 밀턴은 조금 안도가 되었다.
‘다행이군.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여.’
밀턴에게 있어서 맥스는 고이고이 충성 수치를 올려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써 먹을 수 있게 된 고능력치의 내정 관료다.
그렇게 꼭 필요한 인재가 해적 나부랭이들 따위한테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엄청나게 열이 받았었다.
그래서 제롬에 비앙카 같은 고급 인력을 동원하고 자신도 직접 나서서 구출 작전을 펼친 것이다.
“무사하니 다행이군. 이번 일에 관한 책임은 영지로 돌아갔을 때 묻겠다.”
“예. 감사합니다. 영주님.”
밀턴의 말에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은 인재를 아끼는 밀턴의 마음에 은은히 감동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 해적들은….
‘역시….’
‘사랑이다 이건가?’
뭔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롬, 옆에 그놈은 누구지?”
밀턴은 제롬이 누군가를 꽁꽁 묶어서 데리고 온 것을 보고 말했다.
“수석 행정관을 구출하러 배에 가니 한 명이 보트에 재물을 싣고 도망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잡아 왔습니다.”
“도망? 우리가 공격하고 빠져나간 놈은 하나도 없었는데?”
그렇다면 놈은 그 전에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밀턴은 흥미를 느끼고 놈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어? 이놈 봐라?’
밀턴의 눈에 흥미가 떠올랐다.
왜냐하면 별생각 없이 바라본 놈의 상태창이었는데 능력치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로빈]
해적 LV.2
무력 - 15 통솔 - 55
지력 - 82 정치 - 75
충성 - 00
특성 - 상재, 항해, 물욕.
상재 LV.7 : 상업에 관한 전반적인 능력을 올려주며 이익을 남기는 폭이 커진다.
항해 LV.5 : 항해술에 관한 전반적인 능력을 살려준다. 선장이 되었을 때 지휘력이 올라간다.
몰욕 LV.8 : 돈에 관해서 엄청난 집념을 발휘한다. 목숨 다음으로 돈을 중요하게 여기며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이놈은 뭐지? 일개 해적 나부랭이가 왜 이렇게 능력치가 높아?’
지력이 80 이상에 정치도 75 이상은 되었다.
무력이 일반인 수준인 것에 비해서 저 두 가지가 높다는 것은 머리를 써서 해적들에게 공헌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리고 특성인 상재의 레벨이 레이라 공주보다도 높았고, 항해술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물욕? 이런 특성은 보다보다 처음 보네.’
가장 높은 레벨의 특성인 물욕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몰욕 LV.8 : 돈에 관해서 엄청난 집념을 발휘한다. 목숨 다음으로 돈을 중요하게 여기며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특성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살면서 발달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돈에 목숨을 걸고 살았으면 이런 특성이 생기는 걸까?
심지어 특성 레벨도 8씩이나 된다.
여러모로 이렇게 신기한 놈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죽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사로잡지. 그리고 다른 해적들도 모두 포박하라. 이대로 영지로 후송한다.”
“여기서 처리하실 게 아닙니까?”
제롬의 물음에 밀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기껏 사로잡았는데 그러긴 아쉽지. 요즘 광산도 돌리고 있는데 이놈들 죗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어?”
밀턴의 말에 제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광산의 업무는 위험성이 높다.
그래서 광산에는 예로부터 노예나 죄인들이 많이 투입되었다.
그렇게 병사들은 해적들을 사로잡아서 배로 끌고 갔다.
배에 도착한 밀턴은 해적들을 가둬두는 한편 한 명을 지목했다.
“거기 너.”
“예.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밀턴의 갑작스런 부름에도 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충성스럽게 대답했다.
그 남자는 좀 전에 밀턴이 심상치 않은 능력치를 확인한 로빈이라는 남자였다.
‘역시 눈치로 먹고사는 놈이었어.’
밀턴이 놈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따라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밀턴은 갑판 안에 마련된 자신의 방에서 놈과 단둘이 독대를 가졌다.
“이름이 뭐지?”
“예. 저는 그…. 오징어라고 불립니다.”
“오징어?”
“예. 그…. 머릿속에 먹물이 좀 들었다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래?”
‘나는 또 못생겼다고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네.’
“그건 별명이군. 진짜 이름은 뭐지?”
“그…. 로빈이라고 합니다.”
“그래 로빈, 너는 어째서 동료들과 떨어져서 도망가려고 했었지?”
밀턴의 말에 오징어, 아니 로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는 구구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님. 저는 한스, 아! 한스는 붉은 수염 저 새끼의 이름입니다.”
“계속 해라.”
“예. 저 한스 새끼가 감히 후작님을 상대로 인질극을 한다고 해서 차마 더 이상은 같이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적간의 의리란 이런 것일까?
어제의 선장은 오늘의 새끼가 되었다.
“아니, 간이 부어도 유분수지 어떻게 우리 해적 나부랭이가 감히 고귀하고 영민하고 용맹하신 후작님에게 언감생심 인질극을 한단 말입니까?”
아부가 너무 심해서 밀턴의 귀에 살짝 거슬렸지만 그래도 일단은 참고 들었다.
“그래서 제가 고심 끝에 이 사실을 후작님에게 알리고자 용기를 내서 탈출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딱 하고 후작님이 나타나셔서 저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야말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부 섞인 로빈의 애원을 들으면서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이놈 봐라. 은근슬쩍 내가 자기를 구해준 걸로 말하네?’
머리가 좋은 건 상태창을 봐서 알고 있었지만 은근히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때 밀턴은 한쪽에 챙겨 놓은 꾸러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뭐지?”
“예. 그…. 그건.”
로빈이 가지고 도망가려고 하다가 걸려서 압수한 꾸러미에는 해적들이 그동안 모아놓은 재산이 한가득했다.
“뭐냐고 물었다.”
“예. 그건 한스 놈이 그동안 불쌍한 사람들을 약탈해서 모은 재물입니다.”
“그걸 네가 가지고 튀려고 했고?”
“아닙니다. 저는 그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물론 영주님에게 가는 길에 여비도 필요했고, 또….”
입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끄럽게 돌아가던 로빈의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돈 얘기가 나오자 크게 당황하면서도 어찌어찌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이건 물욕 특성의 부작용인가?’
돈을 위해서 어떤 고난과 역경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은, 목숨 말고는 거의 다 포기한다는 말이다.
지금도 자기 목숨이 풍전등화인데도 어떻게든 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흠…. 이거 잘만 하면….’
이때 밀턴은 이 돈 귀신 놈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정했다.
“왕국 법에 의하면 귀족은 생포한 도적이나 범죄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살…. 살려 주십시오.”
밀턴의 말에 로빈은 간절하게 외쳤다.
아직 더 살고 싶었다.
살아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리고….
아니,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돈이 최고다.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황금에 파묻혀 죽고 싶었다.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개가 되라면 될 테니 부디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면 살아야 했다.
로빈은 이제 잔머리를 그만두고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절박함이 극한에 도달한 로빈을 보고 밀턴이 넌지시 말했다.
“내가 왜 너를 살려줘야 하지?”
“그…. 그건….”
“널 살려주면 나에게 뭔가 이득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밀턴의 말에 로빈은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후작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보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그동안 이 붉은 해적단의 재정을 총괄해 왔습니다.”
“해적단의 재정을?”
“예. 약탈한 물자를 비싼 값에 팔아서 많은 차익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뱃길도 잘 알고 있어서 후작님이 항해 무역에 뜻이 있으시다면 저를 꼭 써보시기 바랍니다.”
“흐음….”
밀턴은 팔짱을 끼고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눈치가 빠르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하는 로빈을 보고 밀턴은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좋다. 정 그렇다면 너에게 기회를 주지.”
“정…. 정말이십니까?”
밀턴의 말에 번쩍 고개를 드는 로빈이었다.
그리고 밀턴은 로빈이 빼돌리려고 했던 보물 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황금과 보석같이 환금성이 좋은 물건이 가득한 주머니를 보고 말했다.
“이 주머니의 가치는 얼마나 되지?”
“어…. 얼마 안 됩니다. 한 5천 골드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5천 골드? 적어도 1만 골드는 넘어 보이는데?”
“아…. 아닙니다. 그 보석의 가치도 낮고 황금도 순도가 떨어지는 저질입니다.”
“그래?”
“예. 틀림없습니다.”
“그렇군. 그럼 어쩔 수 없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밀턴을 보고 로빈은 안도했다.
하지만 그건 밀턴의 뒷말을 듣기 전까지만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이 보물을 사지.”
“예?”
“5천 골드라고 했지? 영지에 도착하는 대로 현금으로 지불하지.”
“그…. 그게 그….”
“왜 그러지?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5천 골드라고?”
“예…. 그게 그렇게 말은 했습니다. 그…. 그런데 그….”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놈을 보며 밀턴이 엄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설마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것인가?”
“아…. 아닙니다. 5천 골드가 맞습니다.”
아무리 돈이 아까워도 목숨만큼은 아니었다.
로빈은 울상을 지으며 5천 골드에 합의를 했다.
사실 저 보물의 가치는 2만 골드는 가뿐히 넘었다.
흥정을 잘만 하면 2만 5천 골드까지도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런데 그걸 고작 5천 골드에 넘겨야 하다니….
‘크윽…. 그래도 그냥 빼앗기는 것 보다는 낫다.’
사실 밀턴이 그냥 빼앗을 것 같아서 가격을 최대한 낮게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5천 골드라도 돈을 챙길 수 있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감지덕지였다.
‘얘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니 이 후작 놈은 나한테 5천 골드를 주고 밑천으로 불려오라고 할 거야. 흥, 어림없지. 가지고 그대로 날라 버릴 테다.’
그 후에 먼 나라로 가서 5천 골드를 자본금으로 진짜 상단을 차린다는 계획이 로빈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세워졌다.
하지만, 밀턴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