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93화 (93/257)

제93화

세상 일이 참 어렵다.

비전 있는 계획.

훌륭한 인재.

적극적인 지원.

이렇게 좋은 조건이 더해졌는데도 가끔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뭐라고? 해적들에게 털렸다고?”

“죄송합니다. 영주님. 뭐라고 드릴 말이 없습니다.”

보고를 들은 밀턴은 깜짝 놀랐다.

밀턴의 명령을 받고 맥스는 의욕적으로 임무에 착수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선박과 선원을 수배하고 사전 정보를 조사해서 무력에 필요한 물품도 확보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맥스는 자신이 직접 항해에 참석하기까지 했다.

높은 충성심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결과였다.

그렇게 해서 시도된 첫 항해에서 맥스는 글로스터 왕국에 직접 뛰어들어서 일곱 개의 상단과 거래처를 뚫었다.

이만하면 밀턴이 원래 생각했던 워터포트 왕국과의 독점 무역은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성공적인 항해였다.

그리고 맥스는 그 후에도 두 번 더 배를 타고 글로스터 왕국에 들어가서 거래처를 더 넓히고 사업 규모도 더 키웠다.

아예 포레스트 가문에서 직접 운영하는 상단을 만들어서 글로스터 왕국에 지부를 만들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했으나, 세 번째 항해에서 일이 터졌다.

글로스터 왕국에서 거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맥스가 타고 있던 배가 해적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교역품과 돈이 다 털린 것은 물론이고 맥스마저 놈들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거기다….

“놈들이 수석 행정관님을 돌려받고 싶다면 몸값으로 2만 골드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콰직.

밀턴의 악력에 탁자의 귀퉁이가 박살나 버렸다.

“해적 나부랭이들이 그 따위로 지껄였다 이거지?”

“예. 그렇습니다. 후작님.”

“이 XX 새끼들이….”

밀턴은 머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 같았다.

밀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제롬을 불러라. 해적 나부랭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

밀턴은 직접 바다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선장님. 그 후작가에서 몸값을 치르겠다고 합니다.”

“그래? 푸하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아예 이쪽으로 진로를 바꿔볼까?”

빨간 수염 해적단의 두목은 호탕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빨간 수염.

그는 원래 대륙의 남부에서 활동하던 해적이었다.

그런데 대륙의 서부 연안에서 제법 큰 거래를 하는 상단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부하들을 항구에 잠복시켜서 표적이 언제 오는지를 감시하게 했다.

그리고 소문의 표적이 항구에 왔다는 것을 알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익숙한 솜씨로 항로의 중간에서 표적을 습격해서 배와 물품을 빼앗았다.

거기다 증인을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도 다 죽여서 없애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잠깐, 나를 죽이는 것보다 포레스트 후작가에 말해서 몸값을 요구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오.”

표적 중에 한 명이 말했다.

처음에는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나는 포레스트 후작가의 수석 행정관인 맥스요. 나를 죽여 봤자 은화 한 푼 나오지 않겠지만 나를 살려주면 영주님이 몸값을 지불할 것이오.”

그 말에 처음에 빨간 수염은 웃으면서 말했다.

“웃기는군. 평민 따위를 위해서 귀족들이 몸값을 지불한다고? 그런 푼돈 따위는….”

“2만 골드.”

빨간 수염의 말을 끊으면서 맥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2만 골드라는 금액은 비웃던 해적들도 침묵하게 만들 정도로 거금이었다.

“일단 해보면 될 일 아니오? 적어도 당신들이 손해 볼 일은 아닐 거요.”

맥스는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해적들을 낚아 올리고 있었다.

“크흠…. 그래. 2만 골드란 말이지? 시도라도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겠군.”

빨간 수염이 이렇게 말한 순간 맥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해적들이 덮친 순간 최악의 상황이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아직 맥스는 세상에 자기 능력을 펼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해적들에게 몸값을 말하면서 자신을 살려두도록 유도한 것이다.

무려 2만 골드라는 거금을 미끼로 삼아서 말이다.

과연 밀턴이 자신을 위해서 그런 몸값을 지불할까?

사실 그건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놈들은 고작 해적 나부랭이일 뿐이고, 감히 이 따위 해적들이 천하의 밀턴 포레스트 후작에게 인질극을 하게 한다.

여기까지나 맥스의 노림수였다.

‘일단 영주님이 오시기만 하면 해적 놈들 따위야 문제도 아니지.’

전쟁터에서 공화국을 상대로도 불패의 신화를 써 내린 밀턴 포레스트다.

맥스는 전쟁을 잘 몰랐지만 이런 해적들 따위는 밀턴이 오기만 하면 순식간에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인질극을 성립시킬 수만 있다면 몸값은 2만 골드든 20만 골드든 상관없었다.

그게 맥스가 즉석에서 생각한 계책이었다.

그런데 그때….

“안 됩니다. 두목!”

한 명의 남자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초를 치려고 했다.

“뭐냐? 오징어.”

오징어라는 별명으로 불린 남자는 마른 체형에 찢어진 눈을 하고 있었다.

마른 걸 넘어서 비리비리하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마른 체형이라서 겉으로 봐서는 해적이라고 해도 안 믿기는 남자였다.

그 남자가 맥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저 새끼 수 쓰는 겁니다. 어떻게든 살려고 발악을 하는 겁니다.”

“앙? 그거야 그렇지. 그래서 뭐? 어차피 몸값을 받으면 우리야 상관없잖아?”

“몸값을 줄지 안 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고작 평민 나부랭이 때문에 2만 골드를 지불하는 귀족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틀림없이 수작이 있는 겁니다.”

“그런가?”

오징어라는 남자의 말에 붉은 수염은 그러고 보니, 라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러자 맥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반드시 내실 것이오. 영주님은 나를 몹시 아끼신단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2만 골드씩은 좀 아니지 않나? 아름다운 여자를 잡은 것도 아니고 그냥 사내새끼 따위한테….”

붉은 수염이 의심하는 듯하자 맥스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영…. 영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오.”

“뭐라고?”

“그…. 그런 쪽으로 취미가 있으셔서….”

살다 보면 말을 막 뱉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맥스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던 모양이다.

‘젠장, 끝인가?’

이렇게 막 뱉은 말을 믿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맥스는 좌절했다.

“흐음…. 그래. 귀족 놈들 중에 그런 놈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

그런데 붉은 수염에게는 그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린 모양이다.

“좋다. 일단 살려준다.”

“두목님! 저 새끼 개수작 부리는 거라니까요? 윽!”

꽝!

옆에서 오징어라는 남자가 사족을 붙였지만 붉은 수염은 주먹 한 방에 제압했다.

“새끼야. 일단 살려 준다잖아? 일단, 나중에 헛수작질이면 그때 죽이면 되잖아?”

“으윽….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여튼 오징어 이 새끼 간은 멸치 간만 해가지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닥치고 항로나 잡아!”

붉은 수염은 그렇게 말하면서 맥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만약 거짓말이면 곱게 죽기는 글렀다고 생각해라. 알겠냐?”

“물…. 물론이오.”

중간에 오징어라는 남자가 재를 뿌릴 뻔했지만 결국은 맥스의 계획대로 되었다.

그 후에 붉은 수염은 다른 선원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맥스가 인질을 돌려보내야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설득을 해서 다른 선원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밀턴이 몸값을 주겠다고 연락을 받고 기분이 몹시 좋아진 것이다.

“인질 교환은 어디서 하는 게 좋을까? 역시 무인도 같은 곳이 좋겠지?”

붉은 수염의 말에 오징어라는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두목.”

“뭐? 너는 왜 또 갑자기 안 된다고 하고 지랄이야.”

자기 생각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오징어가 붉은 수염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오징어는 결사적으로 말했다.

“귀족들이 무슨 개수작을 부릴지 알고 정면에서 인질 교환을 한답니까? 놈들이 기사라도 데리고 있다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막습니까?”

“으음….”

오징어의 말에 붉은 수염은 순간 그럴 듯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 나도 그게 의심스러웠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지껄일 것이지.’

붉은 수염의 말에 혈압이 오르는 오징어였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사실 오징어는 이 거래 자체가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래도 이왕 하기로 결정됐으니 가능하면 철저하게 해야 했다.

“바다에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중간에 조각배로 돈과 인질을 태우고 서로 교환하는 형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야 놈들이 개수작을 부려도 우리가 중간에 빠지죠.”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즉답하는 붉은 수염의 말에 오징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싸늘했다.

‘아직도 불안하단 말이지.’

오징어는 여전히 이 거래가 내키지 않았지만 붉은 수염이 자기 말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튼 돈 욕심만 많아 가지고….’

오징어도 돈이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긴 하지만 목숨보다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좀 이르지만 계획을 실행하자.”

오징어는 뭔가 결심한 표정을 하고 중얼거렸다.

달이 구름에 가려지는 어두운 밤.

붉은 수염 해적단은 자신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무인도에 배를 정박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무리 바다에서 살고 죽는 해적이라고 해도 근거지가 되는 육지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라에서 사정을 봐주는 사략 해적들의 경우 아예 항구 자체를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는 경우도 있었지만 붉은 수염 해적단 같은 정통(?) 해적들은 얌전하게 무인도 같은 곳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붉은 수염 역시 이 일대에서 영업하기에 앞서 무인도 몇 개를 물색해서 근거지로 삼은 참이었다.

다른 배에서 빼앗은 재물을 계속 배에 싣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런 무인도에 숨겨 두었다가 한꺼번에 내다 파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가 해적들이 바다 위에서 침몰하면 그 재물은 소위 말하는 해적들이 숨겨 놓은 보물이 되는 것이다.

가끔 모험가들이 그런 소문을 듣고 일확천금을 노리고 무인도를 수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쨌든 붉은 수염 해적단은 오랜만에 땅을 밟자 긴장이 풀렸다.

그들은 포로인 맥스를 가둬두고 해변에 술통을 꺼내고 모닥불에 고기를 걸며 외쳤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자!”

“마시자! 취하자! 죽자!”

“와하하하하!”

배를 다룬다는 것은 고도의 팀워크와 정신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해적들 역시 바다 위에서는 함부로 정신 줄을 놓을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언제 풍랑이 불지 모르고 암초가 나타날지 모르니 정신을 차리고 있는다.

다만, 육지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오오오…. 우리는 바다 사나이~♪ 용감한 바다 사나이~♪”

“아가씨들이 제일 좋아하는 용감한 바다 사나이~♪”

술 취해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해적들은 허점투성이었다.

그 흔한 보초 한 명 세우지 않고 모조리 취해 버린 것이다.

사실 이런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있는 무인도에 위협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 보통은 없어야 정상이다.

“찾았데이.”

갈매기를 통해서 해역 일대를 넓게 조사하고 있던 비앙카가 말했다.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약간 떨어진 무인도인데, 거기서 술 마시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드라.”

“그래요. 술에 취해 있다 이거죠?”

밀턴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최고의 기회 중에 하나였다.

놈들의 종적을 찾고 인질인 맥스를 어떻게 구출할지가 고민이었는데 놈들이 단체로 취해 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제롬.”

“부르셨습니까? 주군.”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놈들을 기습으로 처리한다.”

“예. 알겠습니다.”

“비앙카 님. 놈들이 무인도의 해변에 있다고 하셨죠?”

“글치.”

“우리 배를 그 반대편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가능하겠습니까?”

“알았데이.”

그리고 비앙카는 갈매기에서 패밀리어 마법을 풀고는 돌고래 한 마리를 꿰어서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돌고래의 등에 반짝이는 발광 마법까지 살짝 걸어주자 완벽한 길잡이가 되었다.

“됐다. 따라온나.”

“예. 저 빛을 따라가라.”

“알겠습니다. 후작님.”

야밤의 항해는 암초에 걸릴 위험이 크기 때문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비앙카가 돌고래를 이용해서 안전한 길로 안내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밀턴을 태운 배는 해적들이 술 마시고 있는 무인도의 반대편으로 무사히 이동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