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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92화 (92/257)

제92화

그렇다.

레이라 공주가 왕위 등극을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오거스트 국왕 때문이었다.

공화국이 쳐들어올 때 오거스트 국왕은 왕실의 재산을 두둑하게 챙겨서 국외로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후에 종적이 묘연해져 버렸다.

지크프리트가 펼쳐 놓은 포위망에는 걸리지 않았다.

타국에서 오거스트 국왕이 망명했노라고 밝힌 국가도 없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금에 와서도 오거스트 국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이게 레이라 공주를 꽤 귀찮게 했다.

“만약 아버지의 생사도 불확실한 상태로 내가 왕위에 오르면, 우리 아버지 성격상 그때 나타나서 내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다고 주장할 거예요.”

“이제 와서 오거스트 국왕이 나타나 봤자 당신의 걸림돌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민심은 물론이고 귀족층의 지지와 군사력 등등.

무엇을 비교해도 오거스트 국왕은 레이라 공주의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현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죠. 우리 아버지라는 인간의 성격상 가장 최악의 수단도 쓸지 몰라요.”

“최악의 수단?”

“다른 나라에 망명해서 징징거리는 거죠. 못된 불효녀가 날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소. 그러니 정의를 위해서 날 도와주시오. 그럼 왕위를 되찾고 우리 왕국을 갖다 바치겠소.”

레이라 공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는 거죠.”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요.”

“…….”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만약 레이라 공주의 말대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최악이었다.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고 이제 막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과정에 있는데 여기서 또 전쟁이라니?

이 시점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승패와 별개로 나라가 끝장날 수도 있었다.

“적어도 1년 정도는 상황을 지켜 볼 거예요. 그리고 주변 국가에게 외교적인 인정을 받으면서 천천히 왕위에 오르는 게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사실 나는 즉위식보다 결혼식이 더 우선일 것 같아요. 그럼 산더미처럼 날아오는 청혼서도 좀 사라질 텐데 말이죠.”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애써 모른 척하며 차만 홀짝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낚이면 안 돼. 낚이면 안 돼. 낚이면 안 돼.’

레이라 공주는 이전부터 은근히 밀턴에게 결혼이라는 카드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것도 정식으로 제의하기보다는 그저 ‘우리 결혼할 거야. 언제 할까?’라는 식으로 기정사실화된 사실을 들이미는 것처럼 교묘하게 말이다.

솔직히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는 결혼 상대로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말대로 이만한 미인을 세상 어디에 가도 아내로 맞이하기 힘들긴 할 거다.

하지만 결혼 상대를 외모만 보고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 여왕의 남편이라니?

너무 부담스러운 인생이다.

이미 당초에 생각했던 조용하고 안온한 은수저 라이프는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레이라 공주의 남편이 되면 어쩐지 인생의 난이도가 확 올라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그녀와의 결혼이 망설여지는 이유는 또 있었다.

“영주님 여기 계셨나요?”

레이라 공주와 단둘이 대화 중인 공간에 나타난 것은 붉은 머리카락에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소피아 필리노버였다.

그녀는 밀턴의 곁에 있는 레이라 공주를 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음, 반가워요. 필리노버 영애.”

레이라 공주와 인사를 한 그녀는 밀턴에게 바로 용건을 꺼냈다.

“거주구의 확장 공사에 이주민들을 채용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 계획서를 써 왔습니다. 읽어 보시고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밀턴은 그녀가 써온 보고서를 읽어보고 감탄했다.

“나쁘지 않군. 일자리를 제공하면 배급에 의존하는 바도 줄어들겠지. 이건 소피아 당신이 생각한 건가?”

“예.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실행하도록.”

밀턴은 서류에 사인을 해 주고 소피아에게 돌려줬다.

그러자 소피아는 자기 생각이 채택된 것이 기쁜 모양인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사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들어가 있지 않은 환한 미소를 보고 밀턴은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귀엽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소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어….”

소피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별로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가만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밀턴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밀턴은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무척 부드럽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멍하니 소피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밀턴이었지만….

“크흠…. 포레스트 후작.”

그만 옆에 있는 레이라 공주의 존재를 깜빡하고 말았다.

“아….”

밀턴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떼자 레이라 공주가 엄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아무리 군신 관계에 있다고 해도 다 큰 영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실례요.”

“예. 그렇죠. 죄송합니다.”

“나보다는 소피아 영애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미안하….”

“저는 괜찮습니다.”

소피아는 밀턴의 말을 싹둑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레이라 공주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파격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영주님과 저 사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괜찮았다고?”

“예. 오히려 기뻤습니다. 마치 오라버니가 생긴 기분이라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소피아를 보며 밀턴도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아닙니다. 그럼 영주님.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소피아가 그렇게 말하고 물러가자 레이라 공주는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에도 필리노버 영애와 이런 스킨십을 가진 적이 있나요?”

“스킨십이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흐음…. 그래요?”

“예. 그냥 칭찬하고 싶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머리에 손이 갔을 뿐입니다.”

그 후에 머리카락의 감촉이 부드럽고 기분 좋아서 계속 만졌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래요. 칭찬의 의미라….”

레이라 공주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일자리 문제 말인데, 항구를 활성화시키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예? 항구를 말인가요?”

“예. 기껏 만든 항구이니 활성화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직접 항로를 개척하면 상인들이 몰려들 테고, 일자리도 늘어날 테죠.”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항구의 항로를 개척한다면 영지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고, 난민들의 일자리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개척된 항로를 직접 운영하면 새로운 자금줄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어때요? 도움이 되었나요?”

레이라 공주가 새침한 표정을 하고 말하자 밀턴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장 가신들과 얘기를 해봐야겠군요.”

바로 움직이려는 밀턴이었지만 레이라 공주가 그런 밀턴의 옷자락을 슬며시 붙잡았다.

“…왜 그러시죠?”

“크흠…. 제가 도움이 된 거죠?”

“예. 그렇습니다.”

“도움이 되었는데…. 뭐 없나요?”

레이라 공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정수리를 밀턴 쪽으로 기울였다.

‘이거 설마? …에이 아니겠지?’

밀턴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레이라 공주는 계속해서 정수리를 슬며시 기울이며 밀턴에게 말했다.

“도움이 되었는데….”

“아, 그게 그러니까….”

“누구는 쉽게 해줬는데….”

“그거야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른….”

밀턴은 변명을 하다가 그냥 한숨을 내쉬고 손을 내밀었다.

‘이 요물…. 오냐? 낚여준다. 낚여 줘.’

이번 한 번은 그냥 낚여 주기로 결정한 밀턴은 순순히 손을 뻗어서 레이라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국의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는 경험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귀중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공주-다른 공주를 본적 없지만-도 아니고 이 레이라 공주라니?

항상 도도하고 철두철미한 여성이 자신에게 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리자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어쩌면 이것도 이 요물 공주님의 내숭이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머리카락은 참 부드럽네. 향기도 좋고.’

손가락 사이를 사르륵 흘러내리는 레이라 공주의 금발은 무척 부드러웠다.

항로 개발.

이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항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연안 항해가 기본이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끼고 돌면서 중간에 몇 번이고 항구를 들려서 보급을 하고 목적지로 향하는 그런 항해 말이다.

밀턴도 원래 항구를 만들면서 그런 중개항을 목적으로 했었다.

하지만 직접 항로를 만들려고 하니 약간의 욕심이 났다.

이런 항로 개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밀턴은 알고 있다.

바로 독점이다.

딱히 신대륙을 발견한다거나 하는 성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개발하지 못한 항로를 선점해서 독점한 뒤 막대한 이득을 노리고자 하는 게 밀턴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밀턴이 노리는 것이….

“워터포트 왕국과의 직항 항로를 만들고 싶다.”

라는 것이었다.

워터포트 왕국이라고 하면 이 중앙 대륙에서 남쪽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섬나라다.

나라는 크지 않지만 섬나라인 만큼 해군력이 강했고 토지가 비옥해서 좋은 와인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나라는 크지 않지만 지형적으로 중앙 대륙과 남대륙의 사이에 있다는 점이 좋았다.

워터포트 왕국은 양 대륙을 오가며 무역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 앤드루스 제국 다음으로 군사력이 강한 것이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면, 앤드루스 제국 다음으로 자금이 풍부한 부국이 바로 워터포트 왕국인 것이다.

레스터 왕국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직항 거래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직항 항로를 만들기만 하면 상당한 이득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밀턴이 생각을 말하자 맥스가 가장 먼저 반대 의견을 가지고 왔다.

“어렵습니다. 우리 영지, 아니 우리 왕국은 기본적으로 항해술이 발달한 나라가 아닙니다.”

“항해술이 필요하면 유능한 선원을 구해오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공고를 한다고 해도 사람이 얼마나 모일지도 의문이고 모인 사람이 실제 유능한지 어떤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맥스의 말은 상식적으로 보면 맞았다.

다만….

‘인재의 유능함 무능함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데 말이야.’

밀턴의 경우 상식에서 벗어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찬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유능한 선원을 모으고 항로를 개척한다고 해도 워터포트와의 독자 무역을 시도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밀턴의 말에 맥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해적들 때문입니다.”

“해적들이라….”

이 문제는 밀턴에게도 심각하게 다가왔다.

레스터 왕국의 위치를 보면 대륙의 허리, 아니 허리보다 약간 높게 있다.

인체로 비유하면 허리보다는 가슴 정도?

거기에 비해서 목표점인 워터포트 왕국은 저 멀리 최남단 너머에 있는 섬나라다.

이렇게 거리가 멀어져 있으면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당연했다.

장거리 항해 무역은 성공 시에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큰 만큼 해적에게 한 번 털리기라도 하면 손해도 막심하다.

“영주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워터포트 왕국은 너무 멀고 험합니다. 차라리 가까운 플로렌스 공국이나 글로스터 왕국이 좋을 듯합니다.”

맥스의 간곡한 조언에 밀턴은 눈을 감고 지그시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야.’

플로렌스 공국은 레스터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남쪽의 국가이고 그 플로렌스 공국을 넘어가면 글로스터 왕국이 있다.

육로로 이동하면 국경을 두 번 넘어야 하고 길은 험하지만 해로를 개척하면 유통 거리를 빠르게 좁힐 수 있다.

‘그것만 해도 금전적인 이득은 충분할지도 몰라.’

밀턴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맥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머리로 알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미련이 남았다.

워터포트 왕국과의 항로를 독점 개발하면 대박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미련을 만드는 것이다.

문득.

밀턴의 머릿속에는 전생의 직장 상사들이 떠올랐다.

‘무리한 일감을 따오고 밑에 애들만 갈구다가 결국 납기일이 지나면 우리한테 잘못을 돌렸지.’

그때를 생각하면서 뒤에서 동료들과 술 마시면서 저 꼰대 새끼들 때문에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엄청 욕했던 기억이 났다.

‘쯧, 그 개저씨들하고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는 없지.’

맥스는 무능한 인물도 아니고 더 이상 충성심이 낮은 인물도 아니다.

그런 맥스가 저렇게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는 것은 틀렸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맥스. 네 말에 옳다. 내가 욕심이 과했군.”

결국 밀턴은 미련을 버렸다.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밀턴을 보고 맥스의 비장한 표정이 사라지고 대신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영…. 영주님.”

맥스도 설마 밀턴의 입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 세계에서 영주, 그것도 고위 귀족이 가지고 있는 권위는 21세기 지구의 진상 상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설사 자신이 틀렸다고 해도 우회적으로 수정을 명령하면 하지 절대 틀렸음을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밀턴이 해준 말은 파격적이기까지 했다.

인자하고 사려 깊은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만만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감…. 감사합니다. 주군.”

맥스는 이 말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태어나기를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가진 능력이 대단해서 자존심이 높은 인물이 맥스였다.

그런 맥스에게 있어서 이 대단한 밀턴 포레스트 후작이 인정을 해준다는 것이 크게 와닿은 듯했다.

거기다 밀턴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 군주의 위엄도 한몫을 했고 말이다.

‘충성 수치가 또 올랐군.’

90대가 넘은 이상 이미 안전빵이긴 하지만 맥스의 충성 수치가 오르자 밀턴은 이때다 싶어서 말했다.

“맥스, 너에게 글로스터 왕국과의 항로 개척과 무역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다.”

“최선을 다해서 주군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의욕에 가득 찬 맥스는 밀턴의 명령에 힘찬 대답을 하고 바로 임무에 착수했다.

그런 맥스를 보고 밀턴은 흐뭇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저 정도 의욕이라면 당연히 잘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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