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90화 (90/257)

제90화

밀턴은 정말 깜짝 놀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검을 돌려준다니?

이건 기사가 주군에게 군신 관계를 거둬 달라는 뜻이다.

“갑자기 무슨…. 내가 섭섭하게 한 것이라도 있다는 것이냐?”

밀턴의 말에 릭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검을 돌려준다는 것이냐?!”

밀턴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릭의 옆에 있는 토미가 설명했다.

“주군, 사실은….”

그들의 사정인즉….

“지금 실력으로 내 곁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한동안은 세상을 떠돌며 수련을 하겠다 이거냐?”

핵심을 정리한 밀턴의 말에 릭과 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릭과 토미는 최근에 서로 상의한 끝에 당분간 밀턴의 곁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최근 이 둘은 자신들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 기사들을 보며 눈치가 들었다.

남부에서도 추리고 추려 놓은 실력자들로만 구성한 기사들이다 보니 자신들보다 더 실력이 좋은 후배를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실력과 별개로 이 둘은 밀턴의 가장 오래된 측근이다.

사실 경력만 놓고 보면 제롬도 릭과 토미에게는 굴러온 돌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나름의 대우는 받았지만 그게 오히려 이 둘에게 부담이 된 듯했다.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 직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이 둘의 안면은 두껍지 못했다.

이번 전쟁만 해도 그렇다.

밀턴은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릭과 토미가 활약한 장면을 거의 없었다.

밀턴의 측근으로 지시에 따라서 지휘에 따랐을 뿐이고, 심지어 릭의 경우 밀턴이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었다.

기사가 실력이 부족해서 자신의 주군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

샌슨에게 고지식할 정도로 기사도를 교육 받은 릭에게 있어서 이것은 더할 나위 없는 수치였다.

“주군, 부디 시간을 주십시오. 반드시 강해져서 돌아오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군의 위명이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추면 그때 돌아오겠습니다.”

릭과 토미가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보며 밀턴은 고심했다.

‘어떻게 하지?’

사실 밀턴은 이 둘을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익스퍼트는 아니지만 기사라고 말하기에 쪽팔릴 실력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놈들하고 든 정이 있는데….’

전생의 기억이 각성하기 전에도 밀턴은 릭과 토미와 함께 자랐다.

어린 시절 함께 샌슨의 지도 아래에서 목검을 들고 수련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 정이 있다 보니 이 둘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밀턴의 이기심으로 두 사람의 발전 가능성을 틀어막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나?’

밀턴은 한숨이 나왔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상황이다 보니 뭐라고 대답해 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밀턴은 일단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세비안 자작에게 말했다.

“세비안 자작, 그대는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후작님을 찾아오는 길에 두 기사분과 합류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무거운 주제인 줄 알았으면 따로 올 것을 그랬군요.”

“그래서 그대의 용건은?”

밀턴의 물음에 세비안 자작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포레스트 후작님. 부디 저 란돌 세비안의 주군이 되어 주십시오.”

세비안 자작의 용건은 릭과 토미와은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승의 장례도 끝났겠구나.’

이전에 영입 제의를 했을 때는 스승의 장례 때문에 거절했던 세비안 자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묶여 있을 이유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한 주군을 찾아온 것이다.

“레이라 공주 전하께서 그대에게 백작위와 상담역의 직위를 내리려 했다고 들었소.”

“과분한 제의는 감사하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이 나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세비안 자작의 말에 밀턴은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레이라 공주와 자신을 저울에 달았을 때 세비안 자작은 자신을 더 무겁게 쳐주었다는 말이 아닌가?

무엇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밀턴은 미소를 머금고 그 이유를 물었다.

“공주 전하가 아니라 나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공주님은 훌륭한 군주의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그분은 속내를 읽기가 어려워서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

“차라리 좀 단순한 후작님이 저하고 궁합이 더 좋을 듯했습니다.”

“너무 솔직한 것 아닌가?”

밀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말에 세비안 자작은 그냥 씩 웃고 말았다.

‘괜히 물어봤네.’

세상 살다보면 굳이 물어보지 않는 편이 있는데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환영하오. 세비안 자작. 내 그대를 중히 쓰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주군.”

밀턴이 세비안 자작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만한 능력의 책사를 어디서 또 손에 넣는단 말인가?

무조건 잡아야 했다.

“이제 문제는 너희 둘인데….”

밀턴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검을 바치고 있는 릭과 토미를 보며 중얼거렸다.

보내기 싫다.

정말 보내기 싫었다.

하지만….

‘보내는 게 옳은 거겠지.’

이 둘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려는 밀턴에게 세비안 자작이 말했다.

“주군, 이제 막 합류하기는 했지만 제가 의견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세비안 자작의 말에 밀턴은 고개를 돌려서 말했다.

“무슨 묘안이라도 있는가?”

“두 기사분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주종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다면 밀턴으로서는 안 들을 이유가 없었다.

“말해보게.”

“예. 그러니까….”

다음날.

밀턴은 대규모 행렬을 이끌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남부군에 더불어서 중앙군, 거기다 임시 수도로 지정되며 생긴 피난민들까지 대거 이끌고 영지로 돌아갔다.

피난민들 중에 반은 수도의 재건을 위해서 남고 나머지 반은 임시 수도로 지정된 포레스트 영지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행렬을 보면서 릭과 토미는 지켜보고만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가야 할 곳은 남부와는 정반대에 있는 북부이기 때문이다.

“역시 따라가고 싶은가?”

이 둘의 뒤편에서 페일런 공작이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저희 스스로 결정한 일입니다.”

“주군에게 도움이 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둘의 굳은 대답에 페일런 공작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세비안 자작이 이 둘에게 제시한 의견.

그것은 북부에 신설되는 기사단에 이 둘을 합류시키는 것이었다.

무슨 기사의 로망이 담긴 소설처럼 세상을 떠돌며 수행하는 것보다는 페일런 공작의 밑에서 단련하는 편이 더 낫다는 세비안 자작의 말에 설득된 것이다.

그 결과 이 둘은 밀턴에게 굳이 검을 돌려주지 않고 포레스트 영지 기사 출신으로서 페일런 공작가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밀턴으로서도 그 편이 훨씬 만족스러웠다.

“그래. 포레스트 후작에게 도움이 되려면 최소한 익스퍼트 정도는 되어야지. 둘 다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정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

페일런 공작은 듬직하게 대답하는 둘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젊다면 그 정도의 근성은 있어야지. 나한테 맡겨주게. 내가 반드시 자네 둘을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려 주겠네.”

“감사합니다. 페일런 공작님.”

“공작님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둘은 크게 감격했다.

마스터인 션 페일런 공작이 직접 지도를 해 주다니?

이런 호강이 또 있을까?

“그럼 우리도 가지. 북부까지는 갈 길이 멀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둘이 말에 오르려고 하자 페일런 공작이 말했다.

“응? 뭐 하는 거지?”

“예. 그거야 말에 올라서….”

“강해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만….”

“그럼 매일매일 단련에 힘을 써야겠지. 안 그래?”

“예. 그렇습니다만….”

점점 대답에 힘이 빠지고 확신이 사라지는 릭과 토미였다.

그런 둘에게 페일런 공작이 말했다.

“이해를 했다니 다행이군. 그러니 두 사람은 뛰어오도록.”

“…북부까지요.”

“당연하지.”

“갑옷 걸치고요?”

“갑옷은 기사의 피부라 여겨야 마땅하지.”

“…….”

“…….”

“참고로 낙오하면 한 바퀴 더 돌아야 할 거야.”

“하하하…. 농담이시죠?”

북부에서 수도까지의 거리를 연병장 한 바퀴 정도로 얘기하는 말에 두 사람은 이게 농담이기를 바랐다.

아니, 그보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농담 아닌가?

뺑뺑이로 기네스 기록을 세울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하지만 페일런 공작은 몹시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익스퍼트가 되겠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뛰어.”

잠시 후.

북부로 향하는 행렬의 끝에는 릭과 토미가 중무장 상태로 달리고 있었다.

“영주님 만세!”

“포레스트 후작님 만세!”

전쟁터에서 귀환한 밀턴은 대대적으로 영지민의 환영을 받았다.

관리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고 영주가 돌아온다는 말에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떨어져 있는 포레스트 영지였지만 그들에게도 밀턴의 활약상은 들렸다.

전쟁에 나가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불패의 신화를 기록한 명장.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내고 공화국을 물리친 구국의 영웅.

어진(?) 공주님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충성스런 기사.

원래 영지민들 사이에서 밀턴의 평판은 좋았지만 이제는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저기 오신다!”

“와아아! 여기 좀 보십시오!”

“영주님 만세!!”

“여기를 봤어! 여기를 봤다고!!”

이쯤 되면 밀턴이 옷을 다 벗고 강남 스타일 말 춤을 춘다고 해도 거룩한 행위로 받아들여 줄 것 같았다.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밀턴은 말 위에서 손을 흔들어 주면서도 쓴웃음이 나왔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소녀가 실신하는 것도 보였다.

어쩌면 이게 영웅의 후광이라는 새로운 특성의 효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민중을 휘어잡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영지민들의 환영을 한 몸에 받으며 영주성에 도착한 밀턴을 환영한 것은 가신들이었다.

“승전과 승작을 축하드립니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가신들의 축하를 받으며 밀턴은 말에서 내려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수고가 많았다. 오면서 보니 영지가 많이 발전했더군.”

“감사합니다.”

포레스트 영지의 행정관인 맥스가 밀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호오…. 꽤 발전했는걸?’

밀턴은 맥스의 상태창을 보고 살짝 놀랐다.

[맥스]

행정관 LV.5

무력 - 17 통솔 - 45

지력 - 79 정치 - 85

충성 - 95

특성 - 세무, 임기응변, 농경.

세무 LV.3 : 세금을 거두고 운영하는 일에 관한 능력이 올라간다. 계산상의 오류가 줄어든다.

임기응변 LV.6 : 예정에 없던 상황이 닥쳐도 가능한 최선의 대처 능력을 보인다.

농경 LV.6 : 농사에 대한 이해도가 깊다. 농경지의 소출을 증대시킨다. 가뭄과 홍수의 피해를 최소화한다.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다 올라갔고, 세무라고 하는 새로운 특성도 생겼다.

하지만 무엇보다 흡족한 것은 그의 충성심이 이제는 95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녀석 처음에 충성 수치가 얼마였지? 52였던가?’

능력은 쓸 만한데 자존심이 강해서인지 충성 수치가 어지간히도 안 오르던 맥스였다.

하지만 밀턴이 전쟁터에서 활약함에 따라서 그 명성이 더 커지고 맥스도 밀턴을 향한 충성심이 커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속물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밀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자기 능력을 알고 있는 거지.’

큰 새는 굵은 가지에 앉아야 하고, 큰 고기는 넓은 물에서 살아야 하는 법이다.

맥스는 자기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밀턴이 충성을 바쳐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밀턴이 자기 그릇을 증명해준 이상 맥스가 밀턴을 배신하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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