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89화 (89/257)

제89화

“포레스트 백작의 영지는 남부에 있소. 거기다 새로운 사업을 한창 진행 중이지. 그런 상황에서 포레스트 백작을 북부로 보내는 것은 좋지 않소.”

레이라 공주의 말에 귀족 중 리건 자작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를 뒤져본다고 해도 포레스트 백작보다 국경을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그 말에 주변의 다른 귀족들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에서 그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얼마나 나태했는지, 그리고 자신들과 달리 전쟁을 꾸준하게 준비해온 밀턴이 얼마나 유능했는지를 말이다.

“백작의 개인적인 사정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백작님이 북부의 국경을 맡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리건 자작은 밀턴을 간절하게 바라보며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그리고 밀턴은 그런 리건 자작의 애원이 몹시 부담되었다.

‘저 아저씨 부담되네.’

아리따운 아가씨도 아니고 중년 남성의 간절한 눈빛에 마음이 흔들리는 취향은 없었다.

하지만 리건 자작의 발언 자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도 했다.

‘어떻게 하지? 거절하고 싶은데 그럴 명분이 마땅치 않으니… 그냥 미운털 박힐 것 각오하고 철판 깔아?’

밀턴은 순간 나는 모르겠으니 당신들은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남부로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 번 물에서 구해주기는 했지만 보따리까지 풀어줄 정도로 이 나라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밀턴이었다.

그러나 밀턴보다 레이라 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리건 자작.”

“말씀하십시오. 전하.”

“모두 알다시피 이번 전쟁에서 포레스트 백작은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네.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실로 훌륭한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서 밀턴의 공적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

다른 귀족들도 동의하는 것을 보며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그런 포레스트 백작에게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내가 더 짐을 지워야 하겠는가?”

“그건….”

레이라 공주의 말을 듣고 보니 리건 자작은 할 말이 없어졌다.

북부의 국경을 안정화시키는 것에 가장 큰 적임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다 보니 밀턴이 떠올라서 추천했다.

하지만 레이라 공주의 말을 듣고 보니 너무 염치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얼굴이 붉어졌다.

레이라 공주는 좌중의 다른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물론 포레스트 백작은 내가 북부를 맡아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승낙을 할 것이오.”

‘아닌데. 절대 싫다고 할 건데?’

밀턴은 공주의 말에 동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

“하긴, 포레스트 백작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시겠죠.”

레이라 공주의 처연한 말에 다른 귀족들은 모두 공감하는 듯했다.

‘이 아저씨들이 날 호구로 보나?’

밀턴은 뭐라고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그냥 꾹 참았다.

보아하니 지금 레이라 공주가 요물 특유의 미모와 언변으로 귀족들을 잘 구워삶아 주는 듯하니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레이라 공주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나태했소. 평화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한 준비를 게을리했지. 그리고 그 대가를 이렇게 치렀소. 그렇지 않소?”

“참담합니다. 공주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신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그래도 나름 명예를 알고 긍지를 알며 애국심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만 남았으니 말이다

귀족들의 반성과 사죄를 들으며 레이라 공주가 쐐기를 박았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포레스트 백작에게만 국방의 의무를 맡기는 것이 과연 옳다고 생각하오? 스스로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레이라 공주의 이 말에 다른 귀족들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실로 공주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어리석은 신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전하!”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레이라 공주의 카리스마에 언변이 더해지자 순진한(?) 귀족들의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 광경을 보고 밀턴은 생각했다.

‘사이비 종교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는 거구나.’

그러면서 자신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귀족들의 혼을 빼 놓은 다음 레이라 공주가 입을 열었다.

“페일런 공작.”

“부르셨습니까? 주군.”

페일런 공작이 듬직하게 대답하자 레이라 공주가 명령했다.

“그대에게 북부의 국경 수비를 맡기고자 하오.”

“명령하신다면 목숨을 다해서 주군의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주변 귀족들을 보고 말했다.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는 기사 전력의 상승을 빼놓을 수 없는 법. 이 자리에 있는 각 가문에서는 젊은 기사들을 지원하시오. 그들을 페일런 공작의 휘하로 편입시켜서 지도를 받으며 북부의 국경에서 복무하도록 할 것이오”

레이라 공주의 말에 귀족들은 기꺼이 동의했다.

“신의 아들과 가문의 기사들 중에 20대의 젊은 기사들을 전부 지원시키겠습니다.”

“저희 가문에는 아들이 셋 있습니다. 이들 모두 지원시키겠습니다.”

“저 역시 따르겠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밀턴의 공적이 가장 컸지만 아직도 페일런 공작의 위명은 굉장했다.

그런 페일런 공작의 휘하에서 활동하며 지도까지 받을 수 있는 자리라니?

귀족들이 앞다퉈서 자기 아들과 가문의 기사들을 지원시킬 만도 했다.

기사 전력의 강화와 더불어서 귀족들의 전폭적인 협력까지 유도한 레이라 공주의 한 수였다.

레이라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검을 들고 말했다.

“페일런 공작, 무릎을 꿇으시오.”

“예.”

페일런 공작이 무릎을 꿇자 레이라 공주가 검을 들어서 그의 양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션 페일런 공작, 그대를 북부의 변경백으로 임명하며, 전권을 위임하오. 부디 공화국의 마수에서 이 나라를 지켜 주시오.”

“목숨을 다해서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페일런 공작은 북부의 변경백이 되었고, 레이라 공주는 페일런 공작이 북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그다음에 레이라 공주는 밀턴을 불렀다.

“포레스트 백작. 무릎을 꿇으시오.”

“예.”

밀턴이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에 검이 가볍게 두 번 오갔다.

그리고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밀턴 포레스트 백작. 그대의 작위를 한 단계 승작하여 후작으로 임명하겠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예상한 것이었다.

“또한 그대를 남부의 변경백으로 임명하며 남부 지역에 대한 그대의 독자적인 권리를 인정하겠다.”

“최선을 다해서 남부 지역을 다스리겠습니다.”

주변이 좀 놀라기는 했지만 여기까지도 밀턴과 레이라 공주가 사전에 얘기를 해 둔 것이었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다소 놀라기만 했을 뿐.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남부 지역의 귀족들에게 밀턴이 끼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변경백의 직위는 그것을 좀 더 공식적으로 만들어줄 뿐.

큰 변화가 있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폭탄은 이다음 발언이었다.

“또한 수도가 공화국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당했기에 포레스트 후작의 영지를 임시 수도로 지명하며, 포레스트 후작을 중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

그런 레이라 공주의 말에 주변 귀족들은 크게 놀랐다.

“후작령을 임시 수도로?”

“거기다 중앙군 총사령관?”

귀족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포레스트 영지를 임시 수도로 지명한다는 말은 이제 한동안은 나라의 중심을 포레스트 영지로 하겠다는 말이다.

모든 행정 명령이 그곳에서 내려가고 사람과 물자가 집중될 것이다.

설령 임시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발전과 경제적 이득이 있을 것인가?

이것은 지방의 봉토 귀족에게 있어서는 거의 신의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레이라 공주는 거기에 겸해서 밀턴을 중앙군 총사령관의 자리에 앉혔다.

중앙군은 수도의 모든 군사력을 총 지휘하는 자리로 대대로 로열 기사단의 단장이 역임해 왔다.

이게 뜻하는 바는 상상 이상이다.

작게는 포레스트 영지를 임시 수도로 지명하고, 혹시 발생할지 모를 행정권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 가장 큰 역할인 군사 부분을 통째로 넘겨주며 밀턴이 가지고 있는 변경백의 권위를 존중해 주겠다는 배려이며, 크게는 밀턴 포레스트라는 한 인물에게 이 나라의 군사 부분을 통째로 맡겨준 것과 같았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이 정도의 요직에 앉는 경우는 레스터 왕국의 역사를 뒤져봐도 흔하지 않았다.

주변 귀족들도 놀랐지만 밀턴 역시 엄청나게 놀랐다.

‘이 공주님 진짜 화끈하네.’

파격을 넘어서 초파격이라고 해도 부족하다.

지위, 군사, 경제, 명예 등등….

도대체 몇 가지 지원을 받고 있는지 파악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 알겠습니다.”

밀턴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 순간 밀턴에게만 들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군주로서 크게 발돋움할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인덕 특성이 진화해서 영웅의 후광이 되었습니다.]

‘대박!’

실로 오랜만에 레벨이 올랐다.

밀턴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서둘러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혼자가 되자 즉시 상태창을 확인했다.

[밀턴 포레스트 후작]

군주 LV.4

무력 - 82 통솔 - 87

지력 - 82 정치 - 70

충성 - 100

특성 - 군주의 위엄, 영웅의 후광, 전략.

군주의 위엄 LV.2 :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군에게 강한 믿음을 주며 적에게는 두려움을 준다. 상벌을 내림에 따라 신하의 충성심을 크게 올릴 수 있다.

영웅의 후광 LV.1 : 민중에게서 강한 지지력과 존경심을 끌어낸다. 다소 무리한 정책을 진행해도 민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전쟁터에서는 적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전략 LV.4 : 전쟁의 전체적인 판도를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승했다.

특히 정치 수치가 크게 올랐는데 이것은 밀턴이 레스터 왕국 안에서 존재감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밀턴의 마음에 크게 든 것은 영웅의 후광이라는 새로운 특성이었다.

영웅의 후광 LV.1 : 민중에게서 강한 지지력과 존경심을 끌어낸다. 다소 무리한 정책을 진행해도 민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전쟁터에서는 적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진짜 대박이다.’

대한민국의 정치가들이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정도로 강력한 권능이었다.

아무리 여기가 왕국이고 밀턴이 귀족이라고 해도 민심이 가지는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군주의 위엄과 영웅의 후광. 이 두 가지 특성을 잘만 조화시키면….’

밀턴은 잠시 자신의 가능성에서 어떤 미래를 봤다.

하지만….

‘관두자, 나답지 않아.’

아무리 능력이 된다고 해도 뜻이 없다면 그건 길이 아닌 것이다.

밀턴은 금방 미련을 버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영지 상태창을 확인했다.

영지 - 포레스트 영지.(임시 수도)

인구 - 135,724명.

자금 - 352,761골드.

주요 생산품 - 밀, 보리, 귀리, 목재, 모피, 양모, 말, 치즈, 선박, 어육, 구리.

주요 시설 - 구리 광산, 항구.

개발 가능 - 아카데미, 왕궁, 신전.

군사력 - 기사 112인, 수습 기사 520인, 기병 2,500인, 보병 12,000인, 궁병 7,000인.

특이 사항 - 영지가 임시 수도로 책정되며 황금기가 열렸습니다. 영지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진짜 미쳤다.”

밀턴은 심장이 덜덜 떨리는 느낌이었다.

레이라 공주가 자신의 영지를 임시 수도로 지정해 주었을 때 어느 정도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런데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그냥 황금기가 열렸다고 한다.

‘괜찮은 거지? 잘되고 있는 거지? 설마 갑자기 인도인이 나타나서 옥수수하고 황금을 등가 교환하자고 시비 거는 건 아니겠지?’

너무나 큰 대박을 터트리고 보니 실감이 나지 않는 밀턴이었다.

상태창을 보아하니 이미 광산과 항구의 개발은 완료된 듯하다.

영지를 맡고 있는 소피아와 맥스가 충분히 밀턴의 기대에 응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군사력은 왜 이렇게 확 늘었지? 전쟁을 거치면서 소모를 했는데?”

군사력이 몇 배를 훌쩍 넘게 늘어난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밀턴이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맞다. 나 이제 중앙군 총사령관이지.”

앞으로는 중앙군 역시 밀턴의 명령에 따르게 되었다.

이제는 남부의 실세를 넘어서 이 나라의 실세로 등극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이제부터는 밀턴이 독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2만이 넘는 것이다.

과거 영지를 막 이어받았을 때 영지에는 100명이 간신히 넘는 병사가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나 진짜 어마어마하게 출세했구나.’

과거의 초라했던 자신을 생각하자 여기까지 이룩한 자신의 업적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밀턴이 한창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때….

“주군 안에 계십니까?”

막사 밖에서 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들어와라.”

밀턴이 허락을 하자 막사 안으로 릭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릭과 토미, 그리고 조금 뜻밖의 인물로 세비안 자작까지 함께였다.

‘드문 조합이군.’

“무슨 일로 찾아왔지?”

밀턴의 물음에 릭은 몹시 진지한 표정을 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토미 역시 무릎을 꿇더니 둘은 허리에 검을 풀어서 밀턴에게 내밀었다.

“주군, 죄송합니다. 검을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주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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