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88화 (88/257)

제88화

“비서관님. 적의 주력 기사단이 중앙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1진이 돌파 당했습니다. 2진에서도 위험하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밀턴의 중앙 돌파는 공화국의 전열을 단숨에 돌파하며 공화국군 참모들의 간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

‘기회라고 생각했나? 과감하면서도 냉철한 판단이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야.’

지크프리트는 오히려 냉소를 머금었다.

아마 적은 자신들의 전력이 크게 줄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앙 돌파를 시도해도 막을 힘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지크프리트에게는 아직도 200이 넘는 고스트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고스트를 이끄는 자신의 심복 제이크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강자였고 지크프리트 자신 역시 마스터였다.

지크프리트의 입장에서 보면 밀턴 포레스트가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으로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내가 가진 전력을 더 노출 시킬 수는 없단 말이지.’

고스트와 제이크, 거기다 자신의 경지까지….

겉으로는 바하슈텐 총통 직속의 병력이었지만 그 실상은 오직 지크프리트 개인에게만 충성하는 병력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있으며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은 지크프리트뿐이었다.

아직 공화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그로서는 자신의 힘을 다 드러낼 수 없었다.

브란스 공작을 잡을 때는 후퇴 작전을 겸하여 다른 이들의 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온전하게 자기 힘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도 없군.’

지크프리트는 선택지에 도달했다.

여기서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고서라도 밀턴을 잡느냐?

아니면 전력을 숨긴 상태로 일단 군을 물리느냐?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지크프리트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지. 아직은 발톱을 숨겨야 할 때다.’

지크프리트는 후자를 선택했다.

공화국을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가진 전력을 드러내는 것은 역시 꺼려졌다.

잘못하면 그동안 물밑에서 준비한 수많은 초석들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굳이 여기서 힘을 드러내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군에 명령했다.

“후퇴하라! 무너진 전열을 수습하고 군을 뒤로 물린다!”

그런 지크프리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공화국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를 시작했다.

“주군! 적들이 물러납니다.”

제롬의 보고를 받으면서 밀턴은 미소를 지었다.

밀턴의 눈에도 무너지는 전열을 수습해서 물러나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쉽게도 추격을 해서 전과를 확대하기에는 지형적으로도 상황적으로도 적절치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다.

‘이겼다.’

레스터 왕국을 망국의 위기 직전까지 몰아넣고,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정군 5만을 궤멸시켰으며 그 데릭 브란스 공작마저 전사시킨 강적.

그 지크프리트를 밀턴이 이긴 것이다.

밀턴은 검을 번쩍 들며 사방으로 크게 외쳤다.

“우리들의 승리다!”

“와아아아아!!”

“남부군 만세!!”

“포레스트 백작님 만세!”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터졌다.

밀턴뿐만 아니라 남부군 전원이 승리의 짜릿함에 전율하는 순간이었다.

“기사단이 꽤 강력하군. 그리고 그 전차를 타고 있던 궁수 부대도 거슬리고, 병사들의 전체적인 수준도 예상보다 높았어.”

밀턴과의 초전이 끝난 후에 지크프리트는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밀턴이 이겼다고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지만 지크프리트는 딱히 자신이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초전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기려고 하면 이길 수도 있었다.

그저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한 입장이기에 한 번 군을 물렸을 뿐이었다.

아직 적은 자신의 사정권에 있었고 지크프리트는 결코 밀턴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초전에서 적의 특성을 알게 된 만큼 다음에는 확실하게 승기를 가져올 자신이 있었다.

“어디…. 어떻게 요리해 줄까?”

지크프리트는 지도를 펼치고 머릿속으로 작전을 구상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적의 움직임과 행동 경로, 그리고 자신이 공격했을 때 취할 대응법이 완벽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다만, 지크프리트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지크프리트 비서관님.”

“무슨 일이냐?”

“예. 총통부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총통부?”

지크프리트는 순간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도 없으니 일단 전령을 만났다.

그리고 그 전령이 한 말은….

“지크프리트 비서관. 지금 즉시 더 이상의 전투를 피하고 공화국군의 주력을 수도로 귀환시키도록 하시오. 이것은 총통 각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오.”

전령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총통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나?”

“그렇소.”

당당하게 대꾸하는 전령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순간 살심이 들었다.

하지만 화를 꾹 참으며 전령에게 좋은 말을 했다.

“알겠네. 최대한 빠르게 회군할 테니 돌아가서 그렇게 보고하게.”

지크프리트가 이렇게 말하자 전령은 팔짱을 끼고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소.”

“없다고?”

“그렇소. 나는 의회에서 지크프리트 비서관이 더 이상 독단으로 무리한 전쟁을 수행하지 말도록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그러니 이 군이 회군할 때까지 나는 감시로 붙어 있어야 하오.”

“조금 전에는 총통 각하의 직속 명령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는 의회의 명령이라고?”

지크프리트가 말꼬리를 잡자 전령은 순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건 비서관이 알바가 아니오.”

‘이 쓰레기가….’

사실 상황은 안 봐도 뻔하다.

더 이상 전투에서 지크프리트가 공을 세우는 것을 경계한 모리배들이 총통에게 회군을 독촉한 것이 분명했다.

왕정에 비해서 훨씬 더 공정하고 우수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는 공화국이었지만 지크프리트가 보기에 윗물이 썩은 시점에서 왕국이나 공화국이나 그게 그거였다.

‘어쩌지? 여기서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해도 될까?’

지크프리트는 고민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전투를 더하면 분명 밀턴을 잡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총통 직속으로 내려온 명령을 어기면 공화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엄청난 공세를 당할 것이다.

밀턴 포레스트의 목이냐? 아니면 공화국 내부에서의 위치냐?

둘 중에 하나를 우선시해야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전군을 즉시 회군하도록 하죠.”

철수였다.

지크프리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오.”

전령은 오만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전령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선은 공화국 안에 쓰레기들부터 처리해야겠어. 그리고…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밀턴 포레스트.’

밀턴의 목을 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 지크프리트였다.

그렇게 지크프리트는 남은 전군을 이끌고 공화국의 수도로 회군했다.

훗날 지크프리트는 말한다.

[그때 밀턴 포레스트의 목을 치지 않은 것은 최악의 실수였다.]

지나간 일을 거의 후회하지 않는 지크프리트였지만 이날의 회군만큼은 두고두고 후회했다.

전투가 끝난 후.

병사들이 시신과 무기를 수거하며 현장을 정리하는 과정에 어울리지 않게 한 여인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바로 비앙카였다.

“비앙카 님. 갑자기 무슨 볼일이십니까?”

“내 좀 살펴볼 게 있데이.”

그렇게 말한 비앙카는 적의 시신을 유심하게 살폈다.

그리고 시신의 품안에 반짝이는 약병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집었다.

약병의 안에는 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비앙카는 신중하게 그 약의 내용물을 살폈다.

“역시….”

내용물의 확인이 끝난 후에 그녀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찾았데이.”

그 순간 비앙카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환희와 격정.

그리고 잔혹함이 진하게 맺혀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

총 사망자가 10만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는 이 전쟁은 서부 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가장 마지막에 밀턴 포레스트와 지크프리트가 싸운 전투를 끝으로 양국은 더 이상의 전투를 그만둔 것이다.

레스터 왕국의 내전으로 시작해서 힐데스 공화국의 개입, 거기에 더해진 스트라부스 왕국의 개입까지 더해진 서부 대전은 전 대륙의 이목을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큰 전쟁은 항상 영웅을 만들어낸다.

이 전쟁에서 가장 크게 명성을 떨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지크프리트였다.

공화국군을 이끌고 레스터 왕국을 거의 집어삼킬 뻔했으며 무엇보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자랑인 데릭 브란스 공작의 목을 치고 그가 이끌던 5만의 대군도 전멸시켰다.

이제까지 무명이었던 인물이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세운 공적으로는 실로 입지적이라고 할 만했다.

일설에는 과거 공화국 3국이 동맹을 맺고 스트라부스 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작전도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지크프리트는 이 전쟁으로 인해 단번에 그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밀턴 포레스트라는 이름이었다.

밀턴 역시 무명이었지만 그는 이 전쟁에서 남부군을 이끌고 나라를 위기에서 몇 번이고 구했다.

2왕자가 수도를 공격해서 함락하려고 할 때 수도를 구했고 그 후에 2왕자를 사로잡아서 내전을 사실상 종식 시켰다.

그리고 힐데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도 제법 무명을 날린 알프레드를 상대로 완벽한 압승을 거두었고, 지크프리트의 군대를 견제했다.

거기다 힐데스 공화국의 본토를 직접 침공한다는 대범한 수를 써서 공화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군과 일전을 벌여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승리가 가지는 의미가 컸는데 레스터 왕국으로서는 그 최후의 승리가 지친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공화국이 점령했던 북부의 토지가 엉망이 되었고, 긴 전쟁으로 올해의 식량 사정도 크게 뒤처졌다.

그렇게 힘든 고난과 시련이 가득한 국민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했다.

고개를 들고 우러러볼 희망을 비춰주는 존재.

밀턴은 지금 레스터 왕국에서 그런 존재가 되었다.

레이라 공주가 원하는 대로 구국의 영웅이 된 것이다.

동화속이나 소설 속에서는 보통 이럴 때 영웅은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끝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얘기가 다르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밀턴에게 닥친 문제는 한둘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레스터 왕국에 산적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레스터 왕국 같은 소국이 전쟁의 무대로 휘말렸으니 피해가 극심한 것은 당연했다.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했지만 특히 심한 것은 북부와 수도였다.

공화국에 점령당했던 북부는 올해 농사를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왕자들의 내전으로 남자들이 무기만 들 수 있으면 거의 다 징발을 당했었다.

그 남자들 중에 4분에 3은 전사했다.

그들 대부분이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거리에는 고아가 넘쳐났고 치안 상황도 급격하게 나빠졌다.

거기다 수도 역시 심각했다.

레이라 공주가 백성들을 이끌고 피난했기 때문에 수도에서는 인명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후퇴하는 과정에서 수도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역사 깊은 왕도 로렌시아는 폐허가 되었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수도의 시민들은 그 광경을 보고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슬픔, 비통함,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무기력해진 사람들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해 주기를 바랐다.

그 대상이 바로 밀턴과 레이라 공주였다.

레이라 공주는 우선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지크프리트가 수도에 쳐들어오기 전에 수도의 귀족 대부분이 국외로 도주했다.

물론 그들의 대부분은 지크프리트의 검문에 걸려서 재산을 빼앗기고 노예로 공화국에 압송당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레이라 공주를 따르기로 한 귀족들도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레이라 공주가 보여준 리더십에 매료된 자.

혹은 나라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끝까지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국내에 남은 자.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진짜배기들이 레이라 공주의 곁에 남았다.

그녀가 그들을 모으고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오.”

나라가 다 무너졌다.

그냥 재건하겠다는 마음으로 해서는 앞으로의 일이 너무나 막막했다.

이번 기회에 그녀는 나라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귀족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레이라 공주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말했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북부를 안정화시키는 것이오.”

레이라 공주의 말에 귀족 중 한 명이 말했다.

“수도를 우선적으로 재건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귀족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화국이 물러가기는 했지만 그들이 다시 침범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소. 우선은 국경의 방비를 공고히 하는 것이 중요하오.”

레이라 공주의 말에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롭다 못해 나태하게 지내온 레스터 왕국이었다.

그 나태함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는 이번 전쟁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문제는 북부의 국경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누구를 보내느냐 하는 것인데….

모두의 시선이 한 명에게 쏠렸다.

“공주 전하. 포레스트 백작에게 북부의 방위를 맡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포레스트 백작이라면 공화국의 손길에서 국가를 굳건하게 지켜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귀족들이 앞다퉈서 자신을 추천하는 것을 보며 밀턴은 생각했다.

‘이래서 능력이 검증되면 곤란하다니까. 계속 써먹으려고 하잖아?’

그저 안온한 은수저 라이프가 목표였던 밀턴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행이도 레이라 공주는 밀턴을 북부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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