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빌어먹을.”
지크프리트는 이를 갈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부군은 틀림없이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어디선가 암약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역으로 본토를 공격하다니?
총통이 직접 후퇴 명령을 내린 이상 거부할 수도 없다.
하지만….
‘미치겠군.’
앞으로 반년, 아니 무리해서 움직이면 3개월 안에 레스터 왕국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발을 빼야 하다니….
지크프리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어쩔 수 없다.”
그의 눈에는 분노도 억울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지금 공화국 내에서 지크프리트의 위치는 총통 직속의 비서관일 뿐이다.
지금의 직위와 권력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설령 위에서 아무리 멍청하고 납득이 안 가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빠르게 미련을 버리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게 건설적이다.
그걸 머리로 알아도 실제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할 수 있다.
그는 이성으로 감정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재빨리 포기한 지크프리트는 즉시 두 가지 움직임을 보였다.
하나는 퇴각로를 정하고 퇴각 준비를 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모두 태워라!”
“불태우고 부숴라! 한 조각의 문명도 남기지 마라!”
밀턴의 휘하에 있는 건축 덕후 영애 소피아가 봤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공화국 군사들은 후퇴하는 와중에 레스터 왕국의 수도 로렌시아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한 나라의 수도라 함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법.
지크프리트는 그 수도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중요한 서책이나 보물 등의 재화는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겼다.
그리고 가져갈 수 없는 건축물과 도시의 기반 시설은 모두 파괴했다.
야만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전쟁 중인 공화국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점령에 실패한 이상 이곳은 다시 적국의 영토가 된다.
그렇다면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멀쩡한 상태로 적에게 돌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철저하게 파괴해서 적에게 피해를 최대한 안겨줘야 했다.
그렇게 수도를 모두 파괴한 후에 지크프리트는 군을 이끌고 후퇴했다.
다만, 후퇴하는 그의 눈빛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집념이 형형했다.
“대성공이네. 공화국 아들이 모두 후퇴한단다.”
“다행이군요.”
비앙카에게 공화국의 퇴각 소식을 들은 밀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은 소식도 있데이.”
“뭡니까?”
“공화국 아들이 후퇴하면서 수도를 다 불태웠단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밀턴은 한숨이 나왔지만 받아들였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회생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레스터 왕국은 그야말로 멸망 직전에 간신히 회생한 것이다.
수도가 파괴당했다고 해도 대부분의 시민들은 레이라 공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으니 무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치고는 충분히 싸게 든 것 아닌가?
그만큼의 대위기였던 것이다.
밀턴과 남부군의 무력.
레이라 공주의 리더십.
세비안 자작의 신묘한 책략.
셋 중에 하나라도 없었다면 레스터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지.’
수도뿐만이 아니라 공화국에 침략 당했던 북부를 포함해서 전 국토에 걸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앞으로 그걸 치유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나라는 살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돌아가야죠.”
밀턴은 즉시 제롬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제롬, 전군에 명령하라. 즉시 본국으로 돌아간다.”
“예. 알겠습니다.”
밀턴의 명령을 받고 남부군은 즉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드디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실질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무의미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서 밀턴은 후퇴 경로를 최대한 신중하게 잡았다.
공화국군의 움직임을 잘 살피면서 무의미한 전투를 피하며 순조롭게 자국으로 후퇴를 지휘했다.
분명히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공화국의 국경을 거의 다 넘어가던 밀턴의 눈앞에 지크프리트가 이끌고 있는 공화국군이 나타나 버렸다.
“그냥 보낼 것 같았나?”
지크프리트는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보며 스산한 눈빛을 빛냈다.
레스터 왕국을 집어삼키기 위해서 지크프리트는 꽤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런데 그 작전이 실패한 것이다.
성과가 없는 전쟁은 아니었다.
레스터 왕국의 수도를 불태우고 국토의 상당 부분을 파괴해서 피해를 주었고 무엇보다 공화국 최대의 강적인 스트라부스 왕국의 병력 5만을 괴멸시켰다.
적의 전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만을 두고 본다면 결코 무의미한 전쟁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얻은 게 없다는 것이다.
원래는 레스터 왕국을 집어삼켜서 대륙의 남부로 뻗어가는 교두보를 만들려 했었는데 그 계획이 실패했다.
그 실패의 원인은 몇 가지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밀턴 포레스트가 이끄는 남부군이었다.
설마 레스터 왕국같이 평화에 찌들어 썩어빠진 나라에 이 정도의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레이라 공주와 밀턴 포레스트 백작.
이 둘 중에 한 명은 처리해 놔야 다음에 레스터 왕국을 도모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지크프리트는 즉시 밀턴을 잡아내기 위해서 본국의 군사를 움직였다.
하지만 밀턴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 보낸 군사들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적의 움직임에 계속 적을 놓치기만 했다.
밀턴은 비앙카의 마법을 이용해서 하늘에서 매의 눈으로 적의 움직임을 보고 적과의 부딪힘을 피한 것이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지크프리트는 바로 대응법을 바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움직임을 보건대 적은 상당히 넓은 정찰 범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것을 이용하면 될 뿐이다.
지크프리트는 사방으로 전서구를 날려서 포위망을 구성했다.
적을 꽁꽁 싸매기 위한 포위망이 아니라 후퇴 경로를 제한할 수밖에 없게 교묘하게 길목을 막는 포위망이었다.
지크프리트는 현장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전서구로 연락을 하면서 현장을 손바닥 들여다보는 듯 지시를 내렸다.
천재를 넘어서 신들린 듯한 예측력이야말로 지크프리트의 진면목이었다.
그리고 바꿔 말하면 지크프리트가 작정을 하고 밀턴을 잡으려고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결국 밀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치 여우 사냥을 당하듯이 지크프리트의 눈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군. 피하기는 어렵겠어.”
적의 군세가 단단하게 준비를 한 것을 확인하고 밀턴은 말했다.
보아하니 작정을 하고 기다린 듯했다.
그렇다면 후퇴해 봐야 피해만 늘어날 뿐.
“제롬, 전투 준비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해라.”
“옛! 전군 대형을 갖춰라!”
밀턴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부군은 즉각 질서정연하게 전투 대형을 갖췄다.
“정예병이군.”
남부군의 움직임을 보고 지크프리트는 은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원래 남부군은 이렇게까지 훌륭한 군기를 자랑하는 군은 아니었다.
밀턴이 공을 들여서 훈련시킨 포레스트 영지병은 제법 군기가 들어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레이라 공주가 고용한 용병들과 전쟁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다른 영주들의 사병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정예병은 실전에서 탄생하는 법.
거기다 이번 전쟁을 거치며 남부군의 병사들은 거듭된 승리를 이어 갔다.
그 승리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고 사기를 진작시켰다.
지금의 남부군은 틀림없이 정예 병력이라고 칭찬 받을 만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지.”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검을 들어서 적을 향해 겨누고 외쳤다.
“공화국의 형제들이여, 침략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라!”
“우오오오오오오!!”
커다란 함성과 함께 공화국이 전진했다.
“공화국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줘라! 전진!!”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밀턴의 호령에 따라서 남부군 역시 앞으로 전진했다.
지금의 세상은 아직 모르지만 훗날 역사가들은 말한다.
밀턴 포레스트.
지크프리트.
이 전투가 바로 두 영웅이 처음으로 부딪힌 초전이라는 것을 말이다.
양군의 보병이 격돌하면서 먼저 우위를 잡은 것은 밀턴이 이끄는 남부군이었다.
“공화국 개들을 물리쳐라!”
“감히 우리 수도를 불태워?!”
“다 죽어라. 이 개새끼들아!”
남부군의 병사는 거칠게 적들을 몰아붙였다.
보병의 부딪힘에서 너무 쉽게 밀리는 것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휘 체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현장 지휘관들은 어째서 대응하지 않는 거냐?”
보병이 밀리는 이유는 현장에서 유기적으로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하급 지휘관.
상사, 중사, 하사 등의 지휘관들이 지휘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왜 현장 지휘관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일선에서 보병을 지휘해야 할 현장 지휘관들이 너무 빨리 죽고 있습니다.”
“뭐라고?”
지크프리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병사들과 섞여서 바로바로 지시를 내리는 현장의 지휘관들은 사망률이 높다.
그러나 보병이 이제 막 격돌했을 뿐인데 어째서 지휘 체계가 삐걱거릴 정도의 피해가 발생한다는 말인가?
‘뭔가 이상해.’
공화국군의 현장 지휘관들이 빠르게 사망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오랜만에 일 좀 하는군.”
끼이이이….
붉은색 머리에 기형적으로 커다란 장궁을 당기고 있는 남자.
그가 팽팽하긴 당긴 시위를 놓은 순간….
팅!
청명한 소리가 공기를 울리고 동시에 한 줄기의 화살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겁먹지 마라. 밀집 대형으로 서로를 지켜… 커억!”
한창 큰 목소리로 보병을 지휘하고 있던 공화국의 중사 한 명이 목에 화살을 맞았다.
갑옷의 이음새 부분을 파고들어서 정확하게 목을 맞은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좋았어. 다음에는 어떤 놈이 좋을까?”
트라이크는 미소를 머금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트라이크의 저격으로 인해서 지휘관을 잃은 공화국군의 보병은 크게 밀렸다.
하지만 그걸로 승기를 잡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적의 측면을 무너트린다. 매복병에게 신호를 보내라.”
지크프리트가 지시를 내리자 남부군의 좌측에서 한 무리의 병력이 갑자기 등장해서 맹렬하게 돌격해 왔다.
바로 힐데스 공화국이 자랑하는 정예 산악병들이었다.
원래는 소대 단위로 운용하며 산악전에서 정찰과 소규모 전투에 운용하는 이들이었지만 전쟁터에서는 한 덩어리로 뭉쳐서 집단으로 운영하는 게 더 강했다.
힐데스 공화국의 산악병은 한 명 한 명이 보통 병사 네 다섯은 거뜬히 상대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턴 역시 이걸 눈 뜨고 당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제롬, 기사단을 이끌고 서쪽을 막아라.”
“옛. 주군!”
정예병에는 정예병을 투입해서 막는 것.
보병 간의 전투에서 자신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기사단을 뺀다고 해도 지장은 없었다.
밀턴의 대응은 정석적이고 옳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걸렸군.”
지크프리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유도했다고 해야 할까?
“제이크, 신호를 보내라.”
“옛!”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심복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부군의 우측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우 모두에 복병을 준비해두고 시간 차이를 두고 공격하게 한 것이다.
애당초 한쪽은 기사 병력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돌격!”
“목표는 밀턴 포레스트의 목이다!”
남부군의 우측에서 나타난 병력은 대략 500.
병력 자체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빠르게 남부군의 우측에 돌격해 왔다.
“감히 뭐가 목표라고?”
“웃기지도 않는 놈들! 전부 죽여 버려라!”
우익을 지휘하는 남부군의 귀족들은 즉시 대응했다.
고작 500의 병력이라면 현장에서 병사들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500의 병력의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30여 명의 특수 병사.
검은색 해골 모양의 갑옷을 입은 그들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공들여 키운 특수 병력 고스트.
지크프리트의 진짜 공격은 바로 이들이었다.
“돌입 전에 비약을 마셔둬라.”
“옛!”
고스트 소대를 이끌고 있는 남자의 명령에 다른 고스트들도 품 안에서 물약을 꺼내 마셨다.
그러자 이들의 몸속에 기운이 순식간에 폭발하듯이 솟구쳤다.
“선두에 열 명은 오러를 사용하라. 나머지는 후열에서 따라간다.”
“옛!”
“좋아. 돌입한다!”
콰아앙! 쾅!
지크프리트가 보낸 비장의 일격이 남부군의 우측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