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아직 오거스트 국왕은 잡지 못했나?”
“예. 아직은….”
전령의 보고에 지크프리트는 불만족스런 표정을 하고 말했다.
“어렵군. 눈치를 채고 몸을 숨긴 건가? 어렵게 됐군.”
사실 오거스트 국왕의 생포야말로 지크프리트의 진짜 목적이었다.
현재 레스터 왕국을 이끌고 있는 것은 실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레이라 공주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대표해서 다스리고 있는 것은 오거스트 국왕이다.
비록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는 권력을 놓기 싫어서 꾀병을 부려 국정을 태만하게 했고, 국가가 위기에 빠지자 급하게 몸을 빼서 국외로 도망가려는 쓰레기 같은 국왕이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이 나라의 군주는 오거스트 폰 레스터이다.
그 오거스트 국왕을 잡아서 항복 문서를 받아내면, 사실상 이 전쟁에서 크게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
만약….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레이라 공주와 밀턴 포레스트가 국왕의 항복 선언에 순순히 순응을 한다면 그 시점에서 전쟁은 끝이다.
그리고 설령 순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
왕국에서 국왕의 발언은 절대적이다.
즉, 국왕의 항복 선언을 받아낸 시점에서 레이라 공주의 정통성은 크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을 이용해서 그녀를 따르는 난민들을 흔들고 주변의 귀족들을 흔드는 것 정도는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민중에게 사랑받고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도 민심이라는 것은 항상 소수파를 동반하는 법.
오거스트 국왕을 생포해서 항복 선언을 받기만 한다면 이 나라에 균열을 만들고 1년 안에 무너트릴 수 있었다.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에는 그러기 위한 계획이 전부 수립되어 있었다.
‘문제는 오거스트 국왕을 잡아야 한다는 건데… 생각보다 쉽게 잡히지 않는군.’
지크프리트가 생각한 오거스트 국왕은 지극히 무능하고 욕심이 많은 군주였다.
그건 사실이다.
다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오거스트 국왕은 자기 한 몸을 보전하는 것에 한해서는 상당한 능력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수도에서 가장 먼저 피난길에 올랐지만 국경을 넘지 않고 우선은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귀족들이 충분히 망명을 한 후에야 자신도 거취를 정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그 성격 덕분에 지크프리트가 예상한 루트에 배치한 검문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최근 공화국군이 국경 지대를 틀어막고 귀족들을 잡아들인다는 소식을 듣자 더욱더 깊숙하게 잠적해 버렸다.
문무를 겸비하고 높은 지략으로 국가의 명운을 쥐락펴락 하는 지크프리트였지만….
설마 일국의 왕이라는 인간이 이 정도의 소인배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게 지크프리트의 철두철미함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고, 그사이에 세비안 자작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 밀턴에게 전달되었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놓은 말이겠지?”
전서구로 작전 개요를 전달 받은 밀턴은 은은하게 감탄했다.
이 전쟁 초기에 참모진으로 세비안 자작을 초청했지만 실패했다.
당시에는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가 수도에 남아준 덕분에 지금 레스터 왕국은 실낱같은 형태로나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비안 자작은 지크프리트의 움직임이 멈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음 작전을 지시했다.
그 작전은 대범하고, 한편으로는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라에서 공화국군을 몰아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밀턴은 작전이 적힌 종이를 바로 태워버리고 즉시 군을 움직였다.
이거야말로 지크프리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작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간의 장애는 여전히 있지만 지크프리트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상대방이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결국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정군을 괴멸시킨 그 시점에서 레스터 왕국은 지크프리트와 정면 승부를 피했다.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공주는 백성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고 국왕을 비롯해서 국가의 고위층은 대부분 나라를 버렸다.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면 남부군이라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밀턴 포레스트뿐이었다.
하지만 신중을 기해서 대응하면 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밀턴 포레스트가 어딘가에 모습을 숨기고 잠재적인 위협적 요소로 존재하는 것 이상의 행동은 할 수 없었다.
만약 모습을 드러내서 먼저 공격을 해온다면 당당하게 힘으로 맞서 싸우면 될 뿐이다.
그러니 오거스트 국왕의 행적을 수색하는 동시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수도 주변의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면 된다.
유일한 문제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뿐이지.”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전황을 살피는 지크프리트였다.
이번에 레스터 왕국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얻었다.
이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지금의 명성을 실질적인 권력으로 교환하는 작업에도 슬슬 신경을 써야 했다.
‘총통이 생각하기에 내가 너무 컸다고 생각되면 위험해. 아직은 그늘 밑에서 벗어날 때가 아니니까.’
지크프리트가 그렇게 이후의 일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는 그때.
“지크프리트 비서관님. 본국에서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전령의 다급한 목소리에서 지크프리트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전군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지크프리트는 벌떡 일어나서 전령에게 호통을 쳤다.
평소 조용한 성격인 지크프리트였지만 지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밥상을 다 차려놓고 천천히 먹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전군 철수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자세하게 설명하라.”
“그게… 본국에 적이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뭐라고? 적?”
순간 지크프리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스트라부스 왕국은 최근 5만의 병력을 레스터 왕국에 원정군으로 파병하고 잃었다.
거기다 마스터인 데릭 브란스 공작까지 잃은 상황이다.
물론 복수심에 불타서 공격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지크프리트는 출병 전 미리 손을 써 두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이 움직이면 다시 한번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이 연합군을 결성해서 스트라부스 왕국을 공격하기로 조약을 맺어 놓은 것이다.
즉, 스트라부스 왕국이 군을 움직여서 본국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해가 가지 않는 지크프리트에게 전령이 말했다.
“본국을 침략한 군대의 규모는 2만, 그 부대의 사령관은….”
전서를 읽던 전령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사령관이 누구냐?”
지크프리트의 채근에 전령이 대답했다.
“그…. 사령관은 밀턴 포레스트라고 합니다.”
“뭐라고?!”
지크프리트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가 귀환 명령을 들은 시점에 레이라 공주에게도 똑같은 정보가 전해졌다.
비앙카가 마법으로 직접 연락을 해서 밀턴의 군대가 힐데스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그러자 세비안 자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성공이군요.”
“그렇군. 모든 게 세비안 자작 그대의 뜻대로야.”
레이라 공주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돌이켜 보면 굉장히 아슬아슬했습니다.”
“하지만 해냈지.”
“…….”
“훌륭하오.”
레이라 공주의 말은 짧지만 진실함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세비안 자작이 이번에 보인 전략은 훌륭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돌아보면….
우선 세비안 자작의 첫 수는 레이라 공주에게 피난민을 이끌고 수도에서 퇴각하게 하는 동시에 밀턴에게 군을 분산시켜서 몸을 숨기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지크프리트가 공화국의 군인으로 이 땅에 발을 들인 이상 민중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물론 수도를 비운다는 것은 큰 손실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이미 아무런 손실 없이 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설령 수도를 잃게 된다고 해도 민중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는 계산속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밀턴이 이끌고 있는 남부군을 잠적시켜 적에게 보이지 않는 압박을 가해야 했다.
덕분에 적의 움직임을 위축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적의 노림수라고 지크프리트는 예측했다.
하지만, 딱 하나.
지크프리트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세비안 자작의 한 수가 더 숨어 있었다.
밀턴 포레스트가 이끄는 남부군.
그 남부군을 단순히 불안 요소로만 활용하려고 분산시킨 것은 아니었다.
군이 모습을 숨긴 시점부터 밀턴은 남부군을 조금씩 북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은 지크프리트가 점령한 수도와 힐데스 공화국의 국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은신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국경을 넘어서 힐데스 공화국을 공격할 수 있게 준비를 한 것이다.
지금 힐데스 공화국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5만 원정군을 물리치고 레스터 왕국을 집어삼키기 직전이다.
이런 상황만 놓고 보면 한창 성세를 떨치는 것 같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최근 연달아서 무리한 전쟁을 계속한 힐데스 공화국도 국내의 사정이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전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소모적인 행위다.
인간, 물자, 식량 등등….
전쟁을 한 번 할 때마다 국가는 막대한 체력을 소모하는 법이다.
힐데스 공화국은 최근 들어서 그런 큰 전쟁을 몇 번이나 치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금 힐데스 공화국의 국내에 적절한 군사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애당초 세비안 자작의 노림수는 거기에 있었다.
다만, 적의 급소가 어딘지 알았다고 해도 즉시 공격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급소가 노출된 것은 피차일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급소에 겨누고 있는 칼은 적의 칼날이 더 예리하고 가까웠다.
만약 지크프리트가 앞뒤 가리지 않고 바로 레이라 공주를 공격하기 위해서 움직인다면 밀턴이 그런 지크프리트의 뒤를 쳐야 했다.
그러니 밀턴이 이끄는 남부군을 애매한 위치에 놔두고 일단 상황을 지켜봤다.
세비안 자작으로서는 확신이 필요했다.
지크프리트가 레이라 공주를 바로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확신 말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지크프리트가 별동대를 동원하면서 얻을 수 있었다.
국외로 도피하는 귀족들을 잡아들이는 그 과정을 보며 세비안 자작은 지크프리트의 노림수를 알았다.
지크프리트가 노리는 것은 이쪽에서도 행방을 알 수 없는 오거스트 국왕을 생포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세비안 자작은 확신했다.
적어도 지금은 레이라 공주를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세비안 자작은 밀턴에게 즉시 전서구를 날렸다.
이제 타이밍의 승부다.
지크프리트가 먼저 오거스트 국왕을 사로잡기 전에 밀턴에 힐데스 공화국의 깊숙한 곳에까지 들어가서 위협이 되어야 했다.
그저 국경 지대에 분탕질을 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힐데스 공화국의 목젖에 들이민 칼날이 되어주지 않으면 적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세비안 자작은 자세한 작전을 내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저 밀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의 능력을 믿었을 뿐이다.
그리고 밀턴은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힐데스 공화국의 국경을 빠르게 돌파한 밀턴은 다른 관문이나 요새는 싹 무시하고 최대한 빠르게 수도로 진격했다.
그리고 힐데스 공화국의 수도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베르트하임 요새를 공격했다.
그리고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아서 베르트하임 요새를 함락시켰다.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베르트하임 요새는 천혜의 지형을 방패로 삼아서 1천의 군사로 1만의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훌륭한 요새였다.
하지만, 세비안 자작의 예상대로 지금 힐데스 공화국의 국내는 텅 빈 깡통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밀턴이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서 바로 힐데스 공화국의 수도로 진격해서 바하슈텐 총통을 사로잡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밀턴은 그렇게 하지 않고 여기서 군을 물렸다.
적의 간담을 철렁하게 했으면 자신의 역할은 다한 것이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내다가 병력에 피해를 입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일이 단단히 꼬여버린다.
힐데스 공화국의 수도 바로 문턱 앞에까지 위협을 가하는 것.
그것이 지금 밀턴이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며 수행해야 할 의무였다.
밀턴이 보여준 한 수에 힐데스 공화국의 국가 수뇌부는 벌집을 쑤신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최근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을 많이 소진한 힐데스 공화국은 레스터 왕국이라는 먹잇감을 먹어서 다시 국력을 키우려고 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그런 바하슈텐 총통의 명령을 받아서 훌륭하게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걸 꼭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있는 법이다.
왕건주의건 공화주의건 간에 국가의 고위층은 알아서 삼삼오오 모여서 파벌을 만들기 마련이다.
총통의 직속 비서관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만, 신참에 가까운 존재인 지크프리트가 갑자기 큰 공을 세우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다가는 혹시 자기 자리가 없어지지 않을까?
알게 모르게 그런 불안감을 가진 자들이 입을 모아서 바하슈텐 총통에게 말했다.
국내를 비워두고 전쟁을 하니 이런 치명적인 위협이 발생한 것이라고 당장 무모한 전쟁을 멈추고 국군을 국내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바하슈텐 총통으로서는 자신의 사람인 지크프리트가 큰 공을 세우도록 지원해 주고 싶었지만 역시 수도 인근에 나타난 적의 병력은 큰 위협이었다.
정치판에서 적절한 명분을 얻은 발언은 큰 힘을 지닌다.
비록 그 발언을 하는 인간의 속내가 질투와 시기로 시커멓다고 해도 말이다.
결국 바하슈텐 총통은 명령을 내렸다.
지크프리트에게 그만 군사를 이끌고 귀환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