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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84화 (84/257)

제84화

지크프리트는 지도를 펴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런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낮선 참모들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비서관님.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지크프리트는 참모의 말에도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적의 빈틈을 찾고 있는 거요.”

그 말에 참모들은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빈틈을 찾는다니?

지금 레스터 왕국은 그야말로 빈틈투성이 아닌가?

레이라 공주가 시민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고, 국왕을 비롯한 다른 귀족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수도는 텅텅 비었다.

딱 멸망 직전의 나라의 모습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빈틈을 찾는단 말인가?

그때 지크프리트의 막사에 전령 한명이 급하게 달려와서 말했다.

“지크프리트 비서관님. 급보입니다.”

“뭔가?”

“예. 상시 정찰 중이던 남부군이….”

“행적을 감추었겠지.”

“…예. 그… 그렇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지크프리트가 전령이 할 말을 미리 맞춰 버리자 전령은 뻘쭘해졌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적들 중에 굉장히 머리 좋은 놈이 있나 보군. 설마 이 판국에 이런 수를 쓸 줄이야.”

한탄하는 지크프리트와 달리 참모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서관님.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혹시, 적의 의중에 뭔가 짐작이 가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참모들의 질문에 지크프리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능한 것들하고 일하는 건 정말 피곤하군.”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별것 아니오. 그보다 상황을 설명하지.”

지크프리트는 지도를 다 펼치고 참모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적들은 수도를 비우고 도주했소. 국왕과 주요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이끌고 외국으로 도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현 시점에서 가장 강한 실권을 지니고 있는 레이라 공주는 수도의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소.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레이라 공주를 공격할 수가 없소.”

지크프리트의 말에 참모들은 이해가 안 갔다.

“레이라 공주의 피난민을 공격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참모 중에 한 명이 하는 질문에 지크프리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공화주의 만세라고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부하들에게 외치는 놈들이….’

지크프리트는 참모들이 한심했지만 티내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공화국의 최대 가치가 무엇이오?”

“예. 그거야 당연히 신분 제도에 억압받고 탄압받는 민중의 해방과 균등한 기회와 평등이 주어지는 낙원의 건설입니다.”

“그렇소. 우리는 민중을 위해서 일어선 나라요. 그런데… 레이라 공주는 지금 자신들을 따르는 민중을 모두 데리고 이동 중이오. 한둘도 아니고 수십만에 해당하는 민중을 말이오.”

“아….”

“과연, 그렇군요.”

참모들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화국의 전쟁 명분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해방과 신분 제도의 철폐에 있다.

그러니 적국이라고 해도 민중을 무의미하게 약탈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곤란했다.

물론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깨끗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때때로는 일반인을 공격해서 약탈하거나 학살하는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뭐든지 정도가 있는 법이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 일이라면 그냥 묻어 버리거나 일부 군인들의 폭주에서 벌어진 실수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레이라 공주가 이끌고 있는 피난민은 무려 수십만에 달한다.

그리고 그들 전원이 자신들을 버리지 않고 이끌어주는 레이라 큰 감동을 받은 이들이다.

그런 이들의 민심을 건드리지 않고 레이라 공주를 공격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차피 적국이니 눈 딱 감고 민간인을 공격할까?

불가능하다.

레스터 왕국의 귀족들은 백성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오른 레이라 공주를 어리석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화국의 입장에서 보면 레스터 공주의 행동이 약삭빠르다고 느껴졌다.

수십만 민중을 거느리고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상 공화국군이 레이라 공주를 건드리는 것은 힘들다.

만약 무리하게 공격했다가 민간인의 피해가 커지면 이 전쟁의 승패와는 별개로 이 전쟁의 지휘부는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공화국의 이상이 민중을 위한다, 라는 명분으로 세워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현실이 꼭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국가의 명분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했다가는 후환이 두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텅 빈 수도를 공격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적들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면 우리가 무혈 입성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참모들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꺼낸 말에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도를 함락하는 것이야 쉽겠지.”

그 말에 참모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크프리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남부군이라는 불안 요소를 뒤에 두고 있는 이상 그 이상의 행동을 하기는 어려워.”

“아….”

“그런….”

그제야 참모들은 남부군이 자취를 감춘 것을 생각해냈다.

“남부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그들의 행적을 파악하면서 우리도 군사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겠지. 하지만 놈들이 자취를 감추면 얘기가 달라지오.”

지크프리트가 군을 이끌고 수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남부군이 기습을 감행할 수도 있다.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도 수색을 해 보면 행적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렵소.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내가 놈들이라면 군을 여럿으로 쪼개서 행적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오. 그래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지.”

“그건…. 산악병을 여러 조로 쪼개서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힐데스 공화국의 산악병이 서바이벌과 정찰에 능하다 하나 여기는 타국. 지형적인 이점은 적들에게 있소. 거기다 너무 잘게 쪼개서 수색병을 보내면 아까운 정예병들을 무의미하게 소진할 수도 있지.”

이미 지크프리트는 보고를 받아서 밀턴이 알프레드를 상대로 산악병의 정찰망을 완벽하게 무너트렸다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무의미하게 산악병들을 쪼개서 장거리 정찰을 시킬 수는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우리가 이기고 있는 전쟁인데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니?’

지크프리트는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작전이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유능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싸우지 않고 적의 움직임에 억제력을 가하고 있는 작전은 자신이 생각해도 절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나라라고 해도 일국을 멸망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더니. 이래서인가?’

내심 레스터 왕국 정도는 떡 주무르듯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지크프리트였다.

내전으로 엉망이 되었고 현 국왕도 자신의 권력 보전밖에는 관심이 없는 쓰레기 같은 나라.

가만히 내버려 둬도 10년 안에는 망할 것 같은 형편없는 나라였다.

하지만 그런 나라조차 위기에 처하자 음지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영웅들이 나타났다.

남부군을 이끌고 레스터 왕국의 영웅으로 등장한 밀턴 포레스트.

다 쓰러져 가는 왕실에 등장해서 민심을 한 몸에 휘어잡은 레이라 폰 레스터 공주.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겠지만 지금 지크프리트를 곤혹스럽게 만든 작전을 입안한 인간도 녹록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지크프리트는 지도를 지그시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전쟁터에서 선택권을 강요당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거의 처음인가?’

어쨌든 그는 지금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위험 부담을 최대한 줄이고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려면….

“일단….”

장시간의 숙고 끝에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수도는 점령합시다.”

기껏 상대가 버린 패이다.

전쟁 중에 상대방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것을 기피하는 지크프리트였지만 그래도 텅 빈 수도를 눈앞에 두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수도를 최대한 빠르게 점령합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본대를 이끌고 재빨리 레스터 왕국의 수도로 진군했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서 수도에 도착한 지크프리트는 그야말로 텅텅 빈 수도를 무혈로 점령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비록 수도를 점령했다고 해도 이것만 가지고 레스터 왕국을 복속시켰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는 본군에서 약 2,000의 병력을 추가로 구성해서 명령을 내렸다.

“시간이 승부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국경으로 가는 길목을 봉쇄하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지시를 받은 병력은 서둘러서 명령을 수행하러 갔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수도의 왕궁에 앉아서 레스터 왕국의 전체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시간을 아무리 끌어봐야 미봉책은 그저 미봉책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노크먼 백작은 원래 수도에서 제법 목소리를 내던 귀족 중에 한 명이다.

평소에는 중앙의 귀족이야말로 귀족 중에 귀족이며 자신들이 있어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떠들고 다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그가 한 일은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가족과 함께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는 마차에 자신의 재산을 최대한 실을 수 있을 만큼 실었고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기 위해서 이주 중이었다.

그가 도망가는 나라의 1순위는 스트라부스 왕국이었다.

군사력이 강한 스트라부스 왕국으로 망명하면 더 이상 힐데스 공화국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버지, 그런데 스트라부스 왕국에 가도 저희는 여전히 귀족인 것이지요?”

마차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딸이 하는 말을 듣고 노크먼 백작은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다. 우리 노크먼가는 무려 역사가 500년이나 되는 가문이다. 설령 레스터 왕국이 망한다고 해도 우리가 귀족이 아닌 것은 아니지.”

“그렇죠. 다행이다.”

“다만 우리는 앞으로 스트라부스 왕국의 귀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작위가 한두 단계 내려갈지도 모르지만 이 나라의 귀족으로 사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것이다.”

노크먼 백작의 말에 백작의 부인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애당초 공화국의 침략도 막지 못하는 약소국은 망해 버리라죠. 귀족을 보호해 주지도 못하는 나라에 충성을 바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하하하…. 그렇지. 우리 가문은 앞으로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새 출발을 하는 것이야.”

노크먼 백작가의 시조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적과 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기사였다.

그의 공적이 높게 평가받아서 귀족 작위를 받은 게 노크먼 백작가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앞에서 달콤한 권력은 인간을 얼마나 쉽게 썩게 만드는가?

선조의 충성심과 기상은 사라졌고 지금 있는 것은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나라를 버리는 것조차 한 점 망설임이 없는 돼지들뿐이다.

가문의 시조가 봤다면 무덤 속에서 수치심에 피를 토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 자체가 노크먼 백작가의 시조가 내리는 천벌일지도 모른다.

“멈춰라!”

갑자기 한 무리의 일행이 나타나서 노크먼 백작가를 가로 막았다.

처음에 노크먼 백작은 산적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다.

하지만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고 깜짝 놀랐다.

“헉? 공화국군.”

지금쯤 수도를 공격하고 있을 공화국군이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외곽 지대에 나타난 것이다.

이 뜻밖의 사태에 노크먼 백작은 크게 당황했다.

공화국군은 이미 마차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말했다.

“마차 안에 레스터 왕국의 귀족이 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공화국군의 말에 노크먼 백작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라! 공화국에서 우리를 살려줄 리가 없다!”

공화국에 잡힌 귀족은 노예로 강등되어서 광산이나 농장으로 보내진다.

그건 귀족들에게 있어서 죽는 것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당연히 노크먼 백작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최후까지 저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항하면 모두 죽이겠다.”

공화국군의 장교가 이렇게 경고를 하자 노크먼 백작의 호위 병력과 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렸다.

“이놈들… 이 은혜도 모르는 놈들!”

노크먼 백작이 발악을 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결국 노크먼 백작과 그 가족은 공화국군에게 붙잡혔고 그의 전 재산도 몰수당했다.

“이거 생각보다 쏠쏠하군.”

“그렇게 말입니다.”

공화국군은 지크프리트의 명령대로 국외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면서 이곳을 지나는 귀족들을 털라는 명령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럴 때가 아닌데? 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쏠쏠한 이익이 놀랐다.

부패한 귀족들이 알아서 전 재산을 잘 정리해서 자신들에게 헌납(?)을 하니 생각보다 그 금액이 대단했다.

전쟁으로 소모한 군비를 조달한다는 의미로 봐도 지금의 작전은 나쁘지 않았다.

별동대가 피난길에 국외로 도주 중인 귀족들을 순조롭게 잡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크프리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피난길에 오른 귀족들은 전 재산을 알뜰살뜰하게 챙겨 놓은 상태라서 털 때마다 상당한 이익이 되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가 국외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고 철저하게 검문검색을 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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