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서로에 대한 결론을 내린 둘은 조금이지만 경계심을 허물었다.
대화할 준비가 되자 세비안 자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주님도 충분히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작금의 상황이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그냥 최악이라고 하지 그래요. 사실인데 뭐….”
한숨을 내쉬는 레이라 공주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진하게 드러났다.
“이게 다 공화국의 그 괴물 때문이죠.”
레이라 공주의 말에 세비안 자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사실 저도 공화국에 그런 괴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세비안 자작이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스승의 장례를 위해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전쟁에서 패배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기는 전쟁.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기느냐가 관건인 전쟁.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밀턴의 제의를 거절하고 스승의 장례를 치렀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우선, 포레스트 백작을 수도로 부르는 것은 안 됩니다. 왜 안 되는지는 공주님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밀턴이 수도를 지켜도 지크프리트가 무인지경으로 날뛰면서 국토를 유린하면 레스터 왕국은 끝장이다.
국가의 기반 시설이 다 무너진 상황에서 수도만 지켜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거기다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왕자들의 내전으로 인해서 가뜩이나 민심이 왕국을 떠났다.
그 상황에서 국민들이 유일하게 희망으로 생각하는 왕족이 바로 레이라 공주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라 공주가 국민들의 고난을 방치하여 민심이 떠나간다면 공화국에서는 만세를 부를 일이다.
실정으로 민심을 잃은 왕국은 공화주의라는 사상을 퍼트리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레이라 공주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페일런 공작이 과연 수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오?”
페일런 공작과 2만의 병력만 가지고는 수도를 지킬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답답한 레이라 공주의 물음에 세비안 자작은 쐐기를 박았다.
“아니요. 지킬 수 없습니다.”
“휴우우….”
레이라 공주도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어렵군. 어려워.”
“공화국군을 이끄는 지크프리트는 브란스 공작이 이끄는 5만의 대군을 거의 피해 없이 일방적으로 물리쳤습니다. 솔직히 페일런 공작님이 수성의 유리함을 살려서 싸운다고 해도 승산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소?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나를 만나러 왔다면 아무런 대책 없이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레이라 공주가 운을 띄워주자 세비안 자작은 품속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냈다.
이것이야말로 세비안 자작이 이 사태를 깨닫고 집에서 이틀 밤을 지새우며 준비한 작품이었다.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그리고 세비안 자작은 자신이 준비해온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설명이 이어짐에 따라서 레이라 공주가 몇 번의 질문을 했고 그때마다 세비안 자작은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그리고 몇 시간에 걸친 설명이 끝난 후에 레이라 공주는 크게 감탄했다.
세비안 자작의 계획을 다 듣고 보니 꽉 막힌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지만 햇살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당신 천재군.”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세비안 자작, 내 이름으로 전권을 위임하겠소. 이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켜 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음날.
레스터 왕국의 수도에서는 왕궁의 명령으로 모든 시민들이 피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갑자기 시민들을 피난시키다니요?”
레이라 공주가 백성들을 피난령을 내렸다는 얘기를 듣고 귀족들은 불처럼 일어났다.
그들에게 있어서 레이라 공주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지금 시민들을 피난시키다니?
만약 피난을 간다면 왕족과 귀족들이 먼저고, 무엇보다 시민들 몰래 가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백성들부터 먼저 피난시키는 행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라 공주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현실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소. 그렇다면 도주하는 것밖에는 남은 길이 없지 않소?”
“그렇다면, 백성들은 남겨두고 국가의 지도층이 비밀리에 먼저 퇴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족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라에서 백성들보다 중요한 것은 없소. 나는 그들을 먼저 피난시키고, 그들의 피난길에 함께하며 왕족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이오.”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레이라 공주의 말에 귀족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인가?’
‘영웅주의에 미친 건가?’
‘이래서 여자들이란….’
귀족들은 레이라 공주가 위인전, 아니 동화 속의 이야기에 매료된 어리석은 인물로 보였다.
그리고 이들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공주님. 퇴각을 결정했다면 저희들 역시 수도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대들 역시 나와 같이 백성들과 고난을 함께해 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오.”
“아니, 저희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공주님의 행동에는 동참할 수 없을 듯합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노골적으로 무례함을 드러내며 자신들 살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말하는 귀족들이었다.
레이라 공주는 그들을 향해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성들을 버릴 생각이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이오?”
“나라가 있어야 백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국가의 핵심 지도층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의 결정은 오직 나라의 안위를 우선시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그들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화가 잔뜩 난 표정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비겁한 작자들! 그렇다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시오. 명예도 모르는 자들과 운명을 함께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레이라 공주가 화를 내자 귀족들은 순간 위축되었지만 이내 눈을 부릅뜨고 맞받아쳤다.
“공주님이야말로 얄팍한 감정에 휘둘려서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을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가라앉는 배에 끝까지 타고 있을 정도로 저희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뒤끝 있는 말을 한마디씩 하고 물러났다.
아마 저택으로 돌아가면 재산을 바리바리 챙겨서 서둘러서 외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대전을 나가자….
“피곤하군. 아침부터 똑같은 짓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 건지?”
푸념을 하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대전의 귀퉁이에 숨어 있던 세비안 자작이 나타나서 말했다.
“잘하고 계십니다. 이 기회에 옥석은 가려내야죠.”
그 말을 들은 레이라 공주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훗, 남대륙 속담에 넘어져도 그냥은 안 일어나는 인물이라는 말이 있던데… 자작이 딱 그런 인물이군.”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연극은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지? 일정이 빠듯한 것으로 아는데?”
“지금 수도에 있는 유력 귀족들 전원이 공주님과 독대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반나절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피곤하군.”
“하지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알겠소. 그럼… 계속하지.”
그날 세비안 자작의 말대로 레이라 공주는 수도 안에 있는 대부분의 유력 귀족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비슷비슷한 말을 했고, 귀족들의 반응은 반으로 갈라졌다.
귀족들의 80퍼센트 가량은 레이라 공주의 행동을 비난하고 심한 경우에는 격분하기도 했다.
그들이 그 자리에서 반역을 저지르지 않은 것은 알현의 회장 밖에서 눈에 빤히 보이도록 대기 중인 페일런 공작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20퍼센트의 귀족은 레이라 공주의 뜻에 동참을 하기로 했다.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윤리관이 똑바로 잡혀 있는 귀족들.
그리고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레이라 공주가 임시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보여준 유능한 모습과 카리스마에 매료된 귀족들.
또, 개중에는 아직 실권을 쥐고 있는 레이라 공주를 따르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눈치를 보다가 결정한 자들도 있었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수도의 중요 귀족들 중에서 약 20퍼센트 가량은 레이라 공주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레이라 공주는 그들과 함께 수도의 시민들의 피난 준비를 도왔다.
그리고 80퍼센트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바리바리 싸서 최대한 빠르게 도주를 했다.
그리고 그 80퍼센트의 귀족들 사이에 현 국왕인 오거스트 국왕 역시 끼어 있었다.
이제까지 병환을 핑계로 칩거하고 있던 오거스트 국왕은 언제 아팠냐는 듯이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수도를 떠났다.
그 과정에서 왕실의 재산을 바닥까지 긁어서 가져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 그 재산을 가지고 타국으로 망명을 하려는 생각인 듯했다.
레이라 공주는 이걸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서글프다 생각했을 뿐이다.
‘고작 저 정도 인간이 내 아버지라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푸념에 빠질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제부터는 정말 바쁘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녀는 밀턴에게 전령을 보내서 앞으로의 방침을 설명했다.
그리고 피난 가는 백성들 사이에 자신이 함께할 것을 공개적으로 알렸다.
힘든 피난길을 준비하던 백성들에게 그런 레이라 공주의 발표는 큰 힘이 되었다.
“공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니….”
“국왕 전하도 따로 도망갔다고 하는데 공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단 말인가?”
“듣기로는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귀족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하더군.”
“썩어빠진 개새끼들, 그럼 우리도 버렸고, 왕족인 공주님도 버렸다는 말이잖아?”
“빌어먹을 개자식들…. 평소에는 잔뜩 거들먹거리더니 중요할 때는 도망가 버리다니.”
백성들의 여론은 확연하게 나뉘었다.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간 오거스트 국왕과 대부분의 귀족들을 향해서 강한 원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들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하며 사비를 털어서 피난길을 지원해 주고 있는 레이라 공주에 대한 믿음이 크게 올라갔다.
레이라 공주는 대중들 사이에 자신의 사람을 풀어서 민심을 조작하는 것이 특기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고스란히 진실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원하는 결과가 예상보다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나타났다.
‘이제 2단계까지 계획이 완료되었군. 그럼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자.’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수십만 명의 시민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백성들은 길게 늘어서서 그 행렬이 지평선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정군을 쓰러트린 지크프리트는 빠른 기간 안에 군을 정비하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원래 같으면 수도를 바로 공격하겠지만 밀턴이 이끄는 남부군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알프레드 대위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다니.’
레스터 왕국에서 원정군의 패배를 예상하지 못했듯이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도 알프레드의 일방적인 패배는 예상 밖이었다.
신중하고 꼼꼼하게 전쟁을 수행하는 알프레드라면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전선의 유지 정도는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밀턴의 압승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지크프리트는 밀턴이 남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부군은 요지부동으로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크프리트도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상황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수도를 공격하는 와중에 밀턴이 남부군을 이끌고 배후를 공격하면 상황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그러는 사이에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레이라 공주였다.
그녀가 수도의 시민들을 다 데리고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귀찮게 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