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이렇게 죽는 건가?’
브란스 공작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아니, 절대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나에게는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
브란스 공작은 클라우디아의 얼굴을 떠올리고 전의를 다졌다.
‘저놈을 처리하고 지크프리트를 잡아서 인질로 삼으면… 작은 가능성이긴 하지만 승산은 있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떠올린 브란스 공작은 전의를 다졌다.
“와라. 최후까지 화려하게 놀아주마.”
내심과 다르게 겉으로는 옥쇄를 각오한 대사를 말하는 브란스 공작에게 제이크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지크프리트 역시 자신의 검을 꺼내고 마찬가지로 자세를 잡았다.
그걸 보고 브란스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도 같이 덤빌 생각이냐?”
“비겁하다고 할 생각이오?”
“흥, 어차피 공화국의 개들에게 정정당당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거칠게 대답하는 브란스 공작이었지만 내심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마스터간의 결투에서 수준이 떨어지는 존재가 손을 거들어봐야 짐이 될 뿐이다.
오히려 브란스 공작의 입장에서는 지크프리트를 인질로 잡을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원래 반드시 이기는 싸움을 선호해서 말이오.”
“좋다. 어디 와….”
말을 하던 브란스 공작은 순간 손에서 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여러 번 놀란다고 생각했고 더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안 놀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반드시 이기는 싸움만 하오.”
지크프리트의 검에도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나타나 있었다.
“…….”
즉, 브란스 공작의 눈앞에는 두 명의 마스터가 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망연자실한 브란스 공작을 향해서 지크프리트가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자, 그럼 죽을 시간이오. 브란스 공작.”
그리고 지크프리트와 제이크가 동시에 좌우에서 브란스 공작을 공격했다.
“큭…. 제기랄!!”
브란스 공작은 그런 둘을 향해서 인생 최후의 힘을 실어서 마주 공격했다.
이제는 논리도 희망도 없었다.
그저 발악을 할 뿐.
“제법 애먹었어.”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검을 집어넣으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최후까지 집념을 불태우며 싸운 데릭 브란스 공작의 수급이 있었다.
마스터 두 명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해진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피해 상황은?”
지크프리트가 하는 말에 제이크가 부하에게 보고를 듣고 대신 말했다.
“전투 중 사망자는 13명입니다. 하지만 전투 후에 부작용으로 24명이 추가로 사망하거나 폐인이 될 듯합니다.”
그 보고를 들은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300명 중에 37명… 거의 10퍼센트가 넘는군. 아직 개선의 여지가 많아.”
작은 목소리로 이것저것 중얼거린 지크프리트는 제이크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현장을 빠르게 정리하라. 특히 그것의 흔적은 절대 남겨서는 안 된다.”
“예. 브란스 공작의 목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깃발 위에 높게 매달아라. 최대한 활용해 줘야지.”
“옛.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와 그 부하들은 현장을 정리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데릭 브란스 공작의 전사.
이것이 가져오는 의미는 엄청나게 컸다.
전쟁 중 지휘관의 죽음은 전황을 한 방에 뒤집을 정도로 큰 사안이긴 하지만 브란스 공작의 죽음은 그 이상의 의미였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전력을 담당하는 큰 축이나 상징의 일각이 쓰러진 것이다.
마스터의 죽음은 국가적으로 봤을 때 커다란 손실을 가져다 준 것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정군은 지휘관을 잃고 이대로 후퇴할 수는 없었다.
브란스 공작을 잃고 본국으로 돌아가 봐야 참모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두대의 칼날뿐이다.
용서를 받으려면 하다못해 이런 사태를 야기한 지크프리트의 목이라도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이런 참모부의 결정은 더 큰 비극을 불러왔을 뿐이다.
지휘관을 잃고 무모한 전쟁을 지속한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정군은 궤멸해 버렸다.
마스터인 데릭 브란스 공작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5만의 정규 병력까지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재앙이었다.
그리고 스트라부스 왕국 이상으로 사태가 심각한 곳은 레스터 왕국이었다.
“도대체 이 사태를 어찌 책임질 것이오?”
“책임이라니?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정군이 패배한 것에 대한 책임을 어찌 우리한테 묻는단 말이오?”
“원정군을 불러온 것은 1왕자파의 책임이 아니오?”
“1왕자 전하는 이미 돌아가셨소. 그리고 원정군이 국내에서 활동하도록 허가한다는 윤허를 내린 것은 전하시오. 그런데 우리한테 책임을 묻겠단 말이오?”
“그럼 누구한테 묻겠소. 이 무능한 간신배들 같으니라고?!”
“뭐라고?! 감히 어디서….”
긴급히 소집된 회의장에서 고성을 지르는 귀족들의 모습은 반쯤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반드시 이기리라고 생각했던 스트라부스 왕국군의 원정군이 궤멸한 충격은 너무 컸다.
사실 스트라부스 왕국군이 개입하면서 한 번 추락했던 1왕자파는 아주 약간이지만 부활했었다.
내전의 패배로 큰 책임을 지고 끝없이 추락했지만 다행이도(?) 책임자인 1왕자는 자살했다.
이 상황에서 1왕자의 이름으로 불러온 스트라부스 왕국군이 북부를 되찾으면 내전의 패배로 인한 책임은 상당수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스트라부스 왕국군이 패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려 5만의 군세에 마스터인 데릭 브란스 공작이 직접 참가한 원정군이었다.
그런데 패배도 이런 대패가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패배한 것이다.
이제 와서 1왕자파가 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부정하는 것뿐이다.
원정군의 활동을 최종 승인한 것은 현 국왕이니 자신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귀족들은 그런 1왕자파의 귀족들을 공격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옥좌에 올라서 임시로 국정을 보살피며 생각했다.
‘잘하는 짓들이다.’
내일 이 나라가 멸망해도 오늘의 권력을 위해서 정쟁을 일삼을 인간들이 눈앞에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전부 다 끌어내서 왕궁의 광장 앞에서 목을 매달고 싶었다.
‘문제는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거지.’
대전에 믿을 만한 신하가 없다고 생각한 레이라 공주는 눈앞에 머저리들은 내버려 두고 혼자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크프리트라… 그런 괴물이 있을 줄이야.’
사실 원정군의 패배는 레이라 공주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정군이 이긴다는 전제하에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원정군이 패배하면서 그 모든 계획이 엉클어져 버린 것이다.
그녀도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했다.
원정군의 패배는 확실히 계산 밖의 일이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밀턴이 이끄는 남부군이 힐데스 공화국의 군을 완벽하게 무찔렀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서 페일런 공작과 2만의 병력을 수도에 상주시켜 놨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포레스트 백작을 불러와야 합니다. 그리고 수도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지크프리트가 군을 이끌고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부군은 무엇보다 수도 방위에 철저해야 합니다.”
당연히 이 점은 귀족들도 알 수 있었다.
귀족들은 한목소리로 밀턴을 수도로 불러들여서 페일런 공작과 함께 수도 방위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밀턴을 벼락출세한 남부의 촌놈으로 취급했지만 이제는 그런 밀턴에게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으음….”
레이라 공주는 한쪽 이마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수도는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걸까?
‘내가 지크프리트라면….’
밀턴과 남부군을 수도로 불러들였을 때 지크프리트가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을 생각하니 레이라 공주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밀턴과 남부군을 부르지 않고 수도에 지크프리트가 들어왔을 때 방어가 가능할까?
‘수성전을 펼친다고 해도 힘들어. 페일런 공작은 마스터이긴 해도 전쟁에 능숙한 무장은 아니야.’
레이라 공주는 몹시 곤란했다.
마치 체스 판에서 외통수에 빠진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결국 대전에서의 회의는 무의미하게 고성만 오가고 끝이 났다.
회의가 끝나고 피곤에 지친 레이라 공주에게 시녀가 다가와서 말했다.
“공주님. 한 남자가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누구지?”
지금 같아서는 너무 피곤해서 어지간해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란돌 세비안 자작이라고 합니다.”
“세비안 자작?”
레이라 공주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기억이 있는 인물이었다.
원래 1왕자군의 참모로 종군했지만 1왕자에게 미움을 사서 변변히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후에 남부군에 합류해서 딱 한 번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 성과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었다.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2왕자군을 절묘한 유인책으로 끌어내서 괴멸시킨 작전은 대단했다.
당시에 레이라 공주도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밀턴도 세비안 자작을 몹시 높게 평가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그는 틀림없이 우리나라 최고의 전략가입니다.]
개인적으로 레이라 공주 역시 공감이 갔다.
원래 밀턴은 이번 전쟁에 그를 데리고 가려고 참모로 초빙했지만 스승인 트라우스 후작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거부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군.’
레이라 공주는 짧게 자책을 하며 시녀에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라.”
“예. 공주님.”
잠시 후에 약간 수척해진 세비안 자작이 레이라 공주의 앞에 나타났다.
“왕국의 충실한 신하 란돌 세비안 자작이 레이라 폰 레스터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예의는 됐소. 자리에 앉으시오.”
레이라 공주는 자기 앞의 테이블에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세비안 자작은 자리에 앉은 후에 레이라 공주를 향해서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수도의 귀족들이 포레스트 백작을 수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공주님은 그 요청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류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사실이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세비안 자작의 질문에 레이라 공주는 피식 웃었다.
‘나를 시험한다. 이건가?’
약간 괘씸하기는 하지만 레이라 공주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포레스트 백작을 수도로 불러들이면 수도는 지킬 수 있을지 모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도 이외의 지역은? 나라의 모든 병력을 수도에만 집중시키면 지크프리트는 무인지경으로 우리나라의 국토를 유린하겠지. 그걸 아는데 쉽게 포레스트 백작을 불러올 수는 없소.”
그녀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남매라고 해도 1왕자하고는 다르군. 머릿속에 뇌가 있는 것 같아.’
세비안 자작의 안에서 1왕자는 머릿속에 뇌가 없는 신기한 생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더 상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수도를 지키지 않으면 나라의 중심이 무너집니다. 어차피 전쟁이 벌어진 이상 백성들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세비안 자작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불쾌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한 번은 봐줄 수 있지만 두 번씩이나 시험을 당해야 할 정도로 내가 만만해 보이는가?”
“예? 그게 무슨….”
“수도만 지키고 나머지 국토가 유린당할 경우 국가의 기반 시설이 무너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가에 대한 국가의 민심이 땅에 떨어지겠지. 그렇게 되면 수도를 지킨다고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최악의 경우 공화주의를 앞장세운 사상가들이 국민들을 선동해서 나라를 완전히 무너트려 버리겠지.”
“…….”
“이만하면 자네의 시험에 대한 답으로는 만족스러운가?”
레이라 공주의 말에 세비안 자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히 공주님을 시험한 죄. 깊게 사과드립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오.”
세비안 자작은 정중하게 사과를 했고 레이라 공주도 거기에 노여움을 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에 대한 품평을 했다.
‘그저 운이 좋고 미모로 포레스트 백작님을 휘어잡아서 정권을 잡은 여인이 아니다. 왕재로 충분할 정도의 지혜와 성품을 가지고 있어.’
‘지략은 물론이고 배짱도 있어. 지금 왕도에서 나를 시험할 귀족은 한 명도 없는 줄 알았는데 설마 이렇게 대범한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
그리고 둘은 동시에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포레스트 백작님에게 해가 될 여인은 아니군.’
‘포레스트 백작에게 해가 될 남자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