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어찌 된 일인가? 자세히 보고하라.”
참모가 전령에게 전후 사정을 물었다.
전령은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보급품을 관리하던 진지에 적의 급습이 있었는데 최소한의 피해로 격퇴를 했습니다. 그 후에 게일 경이 물러나는 적을 추격했습니다.”
“추격? 무리한 추격은 군령으로 금지했을 터인데?”
“예. 하지만 게일 경이 현장 판단으로 추격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자신의 기사단을 이끌고 추적에 돌입했습니다.”
“무리했군. 그래서 결과는?”
“적을 추적한 결과 매복하고 있던 적과 조우해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전투 중에 검은 해골 투구를 쓰고 있는 적들과 위험인물로 지정된 지크프리트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전령의 보고에 브란스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위치는?!”
“우리 진형에서 남동쪽에 있는 숲의 안쪽입니다.”
“남동쪽? 거기는 우리가 진군해 온 방향이 아니오?”
“설마 이제까지 후방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래서 우리군의 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인가? 이런 대담한 수를….”
참모들은 탄성을 질렀다.
이제까지 적의 본진을 찾기 위해서 꽤 광범위한 정찰을 했다.
물론 힐데스 공화국을 상대로 산악 지역에 정찰을 진행한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다.
정찰을 보내면 정찰 부대의 반 이상은 돌아오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적의 본진을 찾기 위해서 희생을 무릅쓰고 정찰을 강행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모두 허사였다.
적은 최초의 조우 이후 흩어져서 자신들이 진군해 온 방향.
그러니까 후방에서 진을 치고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무섭도록 대담하고 치밀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정찰 부대를 운용해도 찾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즉시 군을 준비하라. 아니, 그보다 내가 먼저 가겠다. 기사단과 본진은 즉시 나를 따라라.”
이제 적의 위치를 알았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공격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란스 공작이 서두르자 참모들 중에 한 명이 급하게 제동을 걸었다.
“공작님. 위험합니다. 지금 본진의 병력은 3,000이 고작입니다. 이 병력으로 적의 본진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큽니다.”
하지만 브란스 공작은 참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
“3,000이면 충분하다. 어차피 적들 역시 게릴라전을 하기 위해서 병력을 분산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에 놈들이 다시 본진의 위치를 숨기면 끝이다. 비켜라!”
버럭 소리를 지른 브란스 공작은 참모를 밀쳐내고 막사 밖으로 향했다.
이제까지는 별 방법이 없었기에 참모들의 의견을 얌전하게 따랐다.
하지만 적의 위치를 발견하게 된 이상 이제는 자신의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할 참이었다.
“전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오오오오!!”
브란스 공작이 직접 군을 이끌고 움직였다.
브란스 공작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아군은 이미 적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저기에 지크프리트가 있다!”
“잡아라! 놈을 잡으면 이번 전쟁 최대의 무공이다!”
병사들과 기사들 모두 지크프리트를 보고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전쟁은 출세를 위한 찬스이기도 했다.
특히 국가에서 지정한 위험인물을 잡거나 죽이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커다란 상이 주어진다.
실제로 말단 병사가 그런 인물을 죽여서 귀족 작위를 얻은 적도 있었다.
공만 세우면 신분에 상관없이 상벌을 주는 것도 스트라부스 왕국의 특징 중에 하나다.
예외가 있다면 과거 서부 전선에서 종사하던 밀턴 같은 외국인들뿐이다.
다만, 이런 출세의 기회는 병사들을 용감하게 하기도 하지만 군기를 흐트러트리기도 한다.
공적을 세우기 위해서 앞다퉈 달려가다 보니 전열이 무너지고, 수적인 우위가 없어졌다
그런 병사들은 지크프리트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검은 해골들에게 일방적으로 쓰러질 뿐이었다.
‘안 되겠군.’
현장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브란스 공작은 직접 앞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병사들을 물려라! 방해다!”
브란스 공작의 외침을 들은 순간 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공작님이 오셨다!”
“병사들은 비켜라! 공작님의 앞을 가로막지 마라!”
브란스 공작의 전투 스타일을 알고 있는 기사들은 일찌감치 병사들부터 챙겼다.
평소의 브란스 공작은 그렇게 자상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엄하지도 않은 평범한 인물이다.
하지만 전투 모드로 스위치가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으아아아앗!”
브란스 공작이 거친 기합과 함께 질주했다.
콰콰콰콰콰….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의 앞에 거치적거리는 존재는 없었다.
앞에 있는 것이 아군이든 적이든 신경 쓰지 않고 돌격하는 그의 공격에는 굳건하게 버티던 검은 해골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큭….”
검은 해골들은 브란스 공작의 공격에 쓰러졌고, 그들의 방어 라인도 무너졌다.
“공작님을 따르라!”
“공화국의 개들을 섬멸하자!‘
마스터 한 명이 전장에서 가지는 가치가 큰 이유는 이래서이다.
마스터라는 존재가 작정을 하고 날뛰면 일반 병사들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물론 포위한 상태로 꾸준하게 시간을 들이면 설령 마스터라고 해도 언젠가는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적이 마스터 한 명일 때의 일이다.
전열이 무너진 적을 보고 가만히 있을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죽어라 이 공화국의 개들아!”
“다 죽여 버리겠다!”
이제까지 당한 울분을 갚겠다는 듯이 스트라부스 왕국의 기사와 병사들은 적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검은 해골들은 개개인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전열이 무너진 상황에서 적들의 공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후퇴하라!”
결국 지크프리트의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검은 해골 투구를 쓴 특수 부대가 그를 호위하며 즉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추격하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당연히 브란스 공작은 적을 호락호락하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적의 후퇴가 너무 일사분란하고 빨랐다.
사방으로 흩어지면서도 미리 조를 짜두었는지 유기적으로 행동하며 후퇴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큰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안 돼. 기껏 잡은 기회인데….’
다른 건 몰라도 지크프리트만큼은 반드시 잡아야 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공작인 자신이 레스터 왕국 같은 소국의 분쟁에 끼어든 것 자체가 바로 지크프리트 때문이다.
저 남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 때문에 힐데스 공화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심지어 원정군이 피폐해질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북부 전선이 뚫리면서 국토가 유린당하기도 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지크프리트를 위험인물 1순위로 지정할 가치는 충분했다.
아직 공화국 안에서 두각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않은 상태인데도 이 정도다.
만약 저 남자가 제대로 된 실권을 잡으면 얼마나 큰 위협이 될까?
‘여기서 반드시 잡는다.’
브란스 공작은 다소의 무리를 해서라도 지크프리트를 잡아내기로 했다.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적을 추격한다.”
“옛. 알겠습니다.”
브란스 공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지크프리트를 추적했다.
이때 브란스 공작은 어쩌면 적의 유인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어지간한 함정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지크프리트님. 적의 추격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말을 달리면서도 부하의 보고를 받았다.
“브란스 공작은 따라오고 있나?”
“예. 그렇습니다.”
“따라오는 병력은?”
“기사로 보이는 병력이 40인, 병사들도 기병을 위주로 해서 1,000기는 따라오고 있는 듯합니다.”
“좀 처지기는 했지만 보병도 뒤에서 따라오고 있겠군.”
지크프리트는 말을 달리면서도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계산했다.
그러고는….
“잡을 수 있다. 예정된 포인트로 유인하라.”
“옛!”
브란스 공작은 적을 추격하며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애당초, 이런 추격전은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것이다.
힐데스 공화국의 기마 부대는 수준이 형편없기로 유명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역이다 보니 기마 부대를 운용하기에 어려운 지형이었고, 당연히 기마 부대 자체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힐데스 공화국은 산악병의 수준이 높다고 평가 받았지만 반대로 기마 병력의 수준은 떨어졌다.
말의 질도 떨어지고 기마술 수준도 낮다 보니 점점 거리가 좁혀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리가 좁혀졌을 때 적들은….
“반전하라!”
도주하기를 포기하고 반전해서 역으로 돌격을 시도했다.
“오는군.”
브란스 공작은 거기에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준비를 단단히 했다.
어차피 적은 소수다.
기껏해야 300기 정도 될까 말까 한 숫자다.
검은 해골 모양의 투구를 쓰고 있는 적들은 정예이긴 했지만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예군 앞에서는 큰 위협이 아니었다.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지.’
브란스 공작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그때….
“지금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크프리트의 신호가 떨어진 순간 적들의 무기에서 선명한 오러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한 명도 남김없이 300명 전원에게 말이다.
“헉?”
“마…. 말도 안 돼!”
300명의 익스퍼트가 갑자기 나타난 광경에 모든 이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이 당황하건 말건 300명의 익스퍼트는 거칠게 자신들을 덮쳐왔다.
콰콰콰쾅! 콰아앙!
“크아아악!!”
“아아아아악!!”
여기저기서 부서지고 깨지는 소음과 인간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모래성을 덮친 검은색의 파도와 같았다.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고스트는 소수였지만 적을 완벽하게 제압하면서 적을 반대로 유린해 갔다.
“이…. 이게 무슨….”
브란스 공작은 크게 당황했다.
전원 익스퍼트인 특수 부대라니?
이런 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브란스 공작은 자신에게 덮쳐온 공격을 쳐내고 역으로 고스트를 몇 처리했지만 그것만 가지고 지금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버텨 봐야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기사와 일반 기병들에게 있어서 익스퍼트는 재앙이었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300씩이나 나타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힐데스 공화국의 익스퍼트를 전부 여기에 모으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은….’
브란스 공작은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에 적절한 지시를 내릴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브란스 공작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다.
쇄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카롭게 날아간 공격에 브란스 공작은 반사적으로 자기 검을 들어서 대응했다
콰아앙!
커다란 굉음이 울리고 상대는 공격의 반탄력을 이용해서 뒤로 물러났다.
“으음….”
손목을 넘어 팔꿈치까지 저릿저릿한 충격에 브란스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강하다.’
브란스 공작은 굳은 얼굴로 적을 바라봤다.
“네놈은 누구냐?”
브란스 공작에게 공격을 날린 인물은 이전에 지크프리트와 함께 있었던 거대한 거구의 남자였다.
“특수 부대 고스트의 대장을 맡고 있는 제이크라고 하오.”
“고스트? 이 해골들의 대장이 네놈이냐?”
“그렇소.”
대화를 하면서 브란스 공작은 적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리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최초의 공격을 나누고 나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하지만 차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설마…. 설마 이놈은?’
“마스터지.”
브란스 공작의 의심에 확답을 해준 것은 뒤에서 차분한 표정으로 다가온 지크프리트였다.
“큭…. 그런 거짓말을 믿을….”
“제이크.”
“옛!”
화아악!
지크프리트의 짧은 명령에 제이크의 거대한 검에는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었다.
마스터의 상징인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 브란스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당신과 같은 마스터요.”
확실하게 확인을 해주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브란스 공작이 이를 갈며 말했다.
“지크프리트….”
“알아주니 영광이오. 데릭 브란스 공작.”
브란스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비장의 카드를 숨기고 있었나? 익스퍼트로만 구성된 특수 부대. 거기다 이제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마스터까지?”
“당신이라는 거물을 사냥하기 위해서 공을 들인 준비입니다. 나쁘지 않죠?”
“흥. 나쁘지 않은 걸 떠나서 너무 과할 정도군. 이렇게 준비를 할 정도로 내가 무서웠나?”
“워낙 신중한 성격이라서 말이오.”
둘이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이미 주변은 빠르게 정리가 되고 있었다.
브란스 공작이 추격에 이끌고 왔던 병력들은 이미 고스트의 칼날 아래에 거의 다 쓰러졌다.
일부 기사들이 악착같이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들도 곧 시간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