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회의를 끝낸 후에 데릭 브란스 공작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막사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는 잘 끝나셨나요?”
“그렇소. 클라우디아.”
개인 막사에서 브란스 공작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은 바로 1왕자의 아내였다가 이제는 미망인이 된 클라우디아였다.
그녀는 브란스 공작의 개인 막사에 자연스럽게 머물고 있었고 무엇보다 둘의 분위기 자체가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브란스 공작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키스를 했다.
클라우디아는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브란스 공작의 목에 팔을 감고는 그 키스에 호응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본국에 처자식이 있고, 전쟁을 하러 원정을 온 남자와 최근에 남편을 잃어서 아직도 몸에 상복을 두르고 있는 여자가 정열적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더구나 이 둘이 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위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특급 스캔들이다.
둘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막사 한쪽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새 두 사람은 본능에 충실한 남녀가 되어 서로를 탐닉했다.
본능의 욕구가 해결되고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오자 브란스 공작은 자기 품 안에 있는 클라우디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이 먼저 본국에 가 있는 편이 좋겠소.”
“제가 먼저 말인가요?”
“한동안 전쟁이 좀 거칠어질 거요. 그동안은 내 곁이 가장 안전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겠지. 위험하니 당신은 먼저 본국에 가 있는 게 좋겠소.”
브란스 공작의 이 말에 클라우디아는 슬픈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저를 밀어내는 건가요?”
“아니. 절대 그렇지 않소.”
클라우디아의 슬픈 표정을 본 브란스 공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클라우디아의 뺨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로 한동안은 내 곁이 위험하니 그런 거요. 당신은 먼저 본국에 있는 내 영지에 가서 기다려 주시오. 그럼 내가 돌아갔을 때는 정식으로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거요.”
브란스 공작의 필사적인 변명에 클라우디아는 수줍은 얼굴을 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내의 자리 같은 건 바라지 않아요. 어차피…. 나라는 여자는 당신에게 폐만 될 거예요.”
“폐라니?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하겠소?”
“하지만 저는 미망인이잖아요? 아직 상복도 벗지 않았어요. 그런 여자를 아내로 들이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비난할 거예요.”
“상관없소.”
“그리고 당신의 아내도 저를 반기지는 않겠죠. 비판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이해해요. 같은 여자인걸요.”
“클라우디아….”
브란스 공작은 클라우디아의 말에서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를 느끼고 크게 감격했다.
‘어찌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
브란스 공작은 원래 여자에게 약한 인간은 아니었다.
자리가 자리다 보니 다가오는 여자들을 많았지만 딱히 흔들린 적은 없었다.
지금의 아내와는 정략적으로 결혼한 것이었고 딱히 사랑은 없었지만 불만도 없는 그런 여성이었다.
즉, 한평생을 여자에게 담담한 마음으로 살아온 남자였다.
그런 브란스 공작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상대가 바로 얼마 전만 해도 타국의 왕족의 아내였고, 이제는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라는 사실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브란스 공작은 클라우디아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자신이 주축이 되어서 본격적인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곁에 두고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만에 하나 위험에 처한다고 생각하면 심장에 칼이 박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클라우디아. 내 사랑, 당신은 진정 내 전부요.”
“데릭….”
“그러니, 지금은 당신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나를 용서해 주시오. 우선 내 영지에 가 있으면 내가 돌아갔을 때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하겠소.”
브란스 공작의 말은 진심이었다.
설령 세상에 어떤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차하면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브란스 공작의 그런 마음을 진작 눈치챘다.
항상 이렇다.
자신에게 매료된 남자들은 항상 헌신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남자들을 이용하는 것에 능숙했다.
“하지만 무서워요. 당신이 없는 곳은 두려워서 갈 수가 없어요.”
마치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울먹이며 애원하는 클라우디아의 모습에 브란스 공작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험악해질 전쟁터에 그녀를 둘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어떻게 하면 당신을 안심시킬 수 있겠소?”
브란스 공작은 원하면 자신의 심장도 기꺼이 꺼내줄 것처럼 간절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바로 클라우디아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인장을 맡겨 주실 수 있나요?”
“가문의 인장 말이오? 그것은 우리 브란스 공작가의 가주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오.”
브란스 공작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인장을 넘겨 달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알아요. 하지만… 저는 불안해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하지만 여자는 항상 증거를 원해요. 그러니…. 안 되나요?”
클라우디아의 간절한 애원에 브란스 공작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당신을 믿소. 기꺼이 넘겨주지.”
“아…. 고마워요. 데릭.”
클라우디아는 브란스 공작의 품 안에 파고들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살을 섞은 후에 눈물로 애원하면 대부분의 억지는 통하는 법이지. 신은 어찌하여 사내들을 이리 어리석게 만든 걸까?’
그리고 클라우디아는 다음날 호위 병력을 거느리고 전쟁터에서 멀어졌다.
사실 브란스 공작이 말하지 않아도 더 이상 전쟁터에 있고 싶은 마음은 없던 클라우디아였다.
클라우디아를 보낸 브란스 공작은 이제 전쟁에 집중했다.
브란스 공작이 참모들에게 지시한 작전.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을 미끼로 써서 적의 주력을 유인하라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가장 큰 공적이자 승리로 다가가는 필승의 공식은 하나다.
머리를 치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크프리트를 노리는 것처럼 공화국군에서도 브란스 공작 자신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을 미끼로 내밀면 반드시 상대방이 걸려들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물론 미끼를 자처한 이상 위험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브란스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원래 전쟁을 복잡하게 수행하지 않고 힘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라면 설령 어떤 공격이라 해도 물리칠 수 있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스스로를 지키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미끼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최소한의 호위 병력만을 거느리고 다른 진형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자리를 잡았다.
만약 적이 기습을 감행한다면 아군의 원조를 신속하게 얻기 힘든 위치에 진형을 차렸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깃발을 드러내며 생각했다.
‘자, 판은 만들어졌다. 이제 뛰어들어라.’
직접 적을 정찰하기 위해서 높은 지대에서 적을 바라본 지크프리트는 바로 적의 속셈을 알았다.
“유인책인가?”
사실 지크프리트의 입장에서 이 책략은 눈에 뻔히 보이는 장난질에 불과했다.
다만, 너무 뻔히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도발의 의미로 그 효과를 보였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 이거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크프리트의 뒤편에서는 검은색 해골 갑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호위로 붙어 있었다.
“글쎄? 제이크, 네 생각은 어때?”
제이크라는 남자는 검은색 갑옷에 검은색 해골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그 존재감이 굉장히 뚜렷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남자가 등에 매고 있는 커다란 검이었다.
투핸디 소드?
아니다.
이건 보통의 투핸디 소드보다 훨씬 더 컸다.
보통 사람이라면 휘두르는 고사하고 들기도 어려워 보일 정도로 기형적인 사이즈를 자랑하는 검이었다.
하지만 그런 검이 어색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제이크라는 남자의 몸도 컸다.
2미터가 넘는 신장에 넓은 어깨, 두꺼운 팔뚝은 곰의 목 정도는 간단하게 비틀어 버릴 듯했다.
그런 남자가 지크프리트에게 몹시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뻔한 도발이지만 기회이기도 합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저 분수도 모르는 놈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그의 태도는 그저 직위에서 차이가 나서 보이는 형식적인 예의가 아니었다.
진심 어린 존경과 절대적인 복종심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 역시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대답했다.
“네가 고스트를 이끌고 공격하면 아마 가능은 하겠지.”
고스트라는 이름은 검은 해골 투구를 쓴 부대의 정식 명칭이다.
지크프리트가 총통에게 말해서 공화국 안의 인재를 모아서 만든 특수 부대 고스트.
총통 직속의 부대로 기존의 명령 체계에서 예외로 취급되는 부대이며 오로지 총통부 직속의 명령만 받는다.
적어도 공화국 안에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고스트의 리더인 제이크는 이미 지크프리트의 사람이었다.
그 말은 이미 지크프리트가 총통부 직속의 무력 부대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정작 힐데스 공화국의 총통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크프리트는 적 진형을 유심이 보고 말했다.
“데릭 브란스 공작이라… 지금 살려두면 향후 스트라부스 왕국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겠군.”
“처리하시겠습니까?”
“음, 잡초는 뽑을 수 있을 때 뽑아야지.”
지크프리트의 말투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는 듯이 담담했다.
“브란스 공작님. 검은 해골 놈들이 후방의 진형에 나타났습니다.”
“즉시 기사단을 파견하라. 내 직속 기사단을 움직여라.”
“옛. 알겠습니다.”
적의 기습에 대응을 지시하고 브란스 공작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겁쟁이 놈들….”
자신이 노골적으로 빈틈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없는 부분만 골라서 공격을 하는 적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있는 참모들에게 말했다.
“적이 바로 미끼를 물지 않는군. 좀 더 무방비하게 있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 말에 참모들은 기겁을 하며 말했다.
“공작님. 이 이상 주변 경호를 소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공작님이 나라의 보물이라는 자각을 가져 주십시오.”
참모들의 말을 들으며 브란스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 가장 앞으로 나왔는데 정작 적은 자신이 없는 부분만 골라서 공격을 하고 있다.
“이래도 지루하게 시간만 끌 수는 없지 않나?”
“그건….”
“하다못해 적의 본진이 있는 위치라도 알 수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참모들은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 전투가 계속되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적의 본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적은 철저하게 산발적으로 게릴라전을 하면서 아군을 괴롭혔다.
그런데 그 공격 방향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적의 본군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군의 숫자와 질로 앞선다고 해도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았다.
그때 한 참모가 말했다.
“차라리 군을 좀 물려서 후퇴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군을 물린다고?”
“예. 애당초 지금의 지형은 너무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이곳은 산야에서 너무 가까운 곳이라서 힐데스 공화국의 산악병들이 활동하기에 너무 좋은 장소입니다.”
“으음…. 그건 그렇죠.”
“확실히 힐데스 주변 지형이 산야만 아니라면 놈들의 기습에 이렇게까지 시달리지는 않을 겁니다.”
참모들은 어느 정도 동감하는 듯했다.
숫자가 배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데 군을 물린다는 것이 굴욕적이긴 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피해가 점점 커져가기만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일단 군을 몰리고 신중하게 다른 우회로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참모들이 그렇게 말하자 브란스 공작도 그 뜻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지금의 상황에 짜증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지략보다는 힘으로 전쟁을 풀어가는 타입인 브란스 공작에게 있어서 소수의 적을 상대로 군을 물린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비록 그것이 전략적 후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참모들에게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따라주기는 하지만….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심기는 상당한 저기압이었다.
그때….
“급보입니다. 놈들의 본진으로 보이는 곳을 발견해서 지금 추적 중입니다.”
“뭐라고!?”
브란스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참모들 역시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