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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78화 (78/257)

제78화

“사상의 광신도라는 건가?”

밀턴은 공화국의 무모한 돌격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섭군. 그리고…. 무서운 것 이상으로 불쾌해.”

이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인간은 숭고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 이상이 거짓이라면 그저 허무한 희극일 뿐이다.

‘이상향? 놀고 있네.’

공화주의건 왕권주의건, 그리고 밀턴이 전생에 체험했던 민주주의건 간에….

사상 하나 잘 만든다고 이 세상에 이상향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사상은 그저 사상일 뿐.

현실에 대입하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이상향에 목숨을 바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짜증이 왈칵 치솟았다.

솔직히 더 이상 봐주기도 힘들었다.

“제롬.”

“옛. 주군.”

“기사단을 이끌고 출격한다. 적의 중앙을 정면에서 때려 부순다.”

“옛. 알겠습니다.”

밀턴의 지시를 받은 제롬은 즉시 기사단을 준비시켰다.

이번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살린 남부 기사단이 즉시 모였다.

밀턴과 제롬, 그 밑에 남부 지방의 귀족들이 지원한 기사와 레이라 공주가 지원해준 기사들까지 포함한 이 남부 기사단이야말로 밀턴이 정면 승부에서 꺼낼 수 있는 최강의 카드였다.

“준비는 되었나?”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제롬의 대답을 들은 밀턴은 투구를 눌러쓰고 외쳤다.

“돌격!!”

그리고 밀턴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단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공화주… 크아악!”

“막…. 막아라!”

그것은 마치 거대한 파도를 가르고 지나가는 난폭한 상어를 연상하게 했다.

밀턴이 직접 이끄는 기사단은 무시무시한 돌파력을 보이며 공화국의 병사들을 가로질러 갔다.

아무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진하는 광신도들이라고 해도, 사기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

남부군의 기사단에는 밀턴과 제롬을 포함해서 익스퍼트만 해도 열 명이 넘게 있었다.

그들이 전열에 서서 오러를 휘두르고 익스퍼트에 거의 준하는 기사들 40명이 뒤를 받쳤다.

일반 병사들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전력인 것이다.

이들의 돌파는 적 병사의 전열을 무너트렸고, 전열이 무너진 병사들은 아무리 사기가 높다고 해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주군이 만들어주신 절호의 기회다. 쏴라!”

궁수대를 지휘하고 있던 트라이크는 이 시점에서 궁수대에 호령했다.

화살을 아낄 필요는 없다.

전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지금 퍼부어야 했다.

“크아아악!”

“아아아악!”

비 오듯이 쏟아지는 화살에 좀비마냥 전진하던 공화국군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사실상 결정되었다.

공화국군 특유의 광신도적인 돌격 때문에 자칫 피해가 커질 뻔했지만, 밀턴의 기사단 돌격과 트라이크의 후방 지원으로 무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딱 하나.

적 지휘관의 목을 치는 것뿐이었다.

“밀턴 포레스트는 어디 있느냐!?”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알프레드에게 한 명의 기사가 달려들었다.

“내가 상대해 주마!”

호기롭게 외치며 달려드는 기사를 보고 알프레드는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 밀턴 포레스트냐?”

“너 따위한테 주군이 나설 것 같으냐? 나는 릭 스토리다. 저승길에 가기 전에 똑똑히 기억해 둬라.”

호기롭게 외치면서 알프레드에게 달려드는 것은 밀턴의 측근 기사인 릭이었다.

그런 릭을 보며 알프레드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패전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다.

그런데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 하수가 만만하게 보며 덤비고 있는 상황.

전쟁터에서 빡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흔하지 않다.

“이 애송이가!!”

알프레드는 검에 오러를 잔뜩 머금고 휘둘렀다.

카아앙!!

“크아악….”

릭 스토리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익스퍼트의 진심이 담긴 일격을 체험해본 순간이었다.

물론 대련에서는 제롬이나 밀턴에게 수도 없이 깨져봤지만 그래도 실전과 연습은 다르다.

그나마 연습의 경험이 있었기에 일격에 목이 날아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꼴은 말이 아니었다.

단, 일격에 말에서 떨어진 릭은 검이 부러지고 갑옷도 갈라졌다.

목구멍에서 핏물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 릭에게 알프레드의 용서 없는 일격이 날아들었다.

“죽어라!”

순간 릭은 죽음을 예감했다.

한평생 겁 없이 살아왔는데 설마 이렇게 죽는 건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다행이도 아직은 그가 죽을 때가 아닌 모양이다.

콰아앙!

릭의 앞에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나서 알프레드의 공격을 막았다.

그는 여유를 남기고 공격을 막았는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알프레드의 앞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음….”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알프레드는 뒤로 말을 물리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그 물음에 상대는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내가 밀턴 포레스트다.”

“호오…. 네가 포레스트 백작인가?”

“그래.”

밀턴은 담담하게 대답한 후에 주변을 슥 둘러보고 말했다.

“보다시피 전황은 완전히 기울었다. 항복해서 병사들의 목숨이라도 살리지 않겠나?”

항복을 권하는 밀턴의 말에 알프레드는 검을 겨누고 말했다.

“웃기지 마라! 우리는 언젠가 이룩될 이상향의 초석이 되기 위해 최후의 일인까지 용감하게 싸울 것이다.”

그 말에 밀턴은 인상을 와락 구기고 중얼거렸다.

“XX, 지랄은….”

“네놈 방금 뭐라고….”

자신의 정의가 모독당한 알프레드가 눈에 불을 켜고 따지려 했다.

하지만 밀턴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됐다. 어차피 항복할 마음이 없다면 네놈 목을 따는 게 가장 빠르게 이 전투를 끝내는 길이겠지.”

뿌득….

알프레드는 이를 갈며 외쳤다.

“어디 해봐라!!”

그리고 두 남자가 서로를 향해서 정면으로 부딪혀 갔다.

콰아앙!!

“웃…. 귀가?”

“젠장, 떨어져. 익스퍼트 간의 결투다. 휘말리기 싫으면 떨어져.”

두 사람이 돌격하자 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가까이 있던 병사들은 청력에 손상이 올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었다.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어느 정도 공간이 생기자….

“죽어라! 왕국의 개!”

“너나 죽어!”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쾅! 카카카카…. 콰앙!

오러가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기고 굉음이 울린다.

말들은 공격이 부딪힐 때마다 버텨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보통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도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 허공에 빛의 궤적을 남겼지만 정작 그 궤적의 표적인 둘은 공격을 용케 피하고 막았다.

두 사람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불이 붙자 주변에서는 섣불리 끼어들 수도 없었다.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자기편이 불리해질지도 모를 정도로 상황이 팽팽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비교적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던 릭은 멍하니 그 싸움을 지켜봤다.

“릭. 이 곰탱이 자식아. 괜찮냐?”

“…….”

“릭 스토리, 너 괜찮냐고?”

토미가 다가와서 상태를 물었지만 릭은 대답하는 대신 멍하니 중얼거렸다.

“주군이 저렇게 강했나?”

“…….”

그 릭의 말에 토미 역시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릭과 토미.

포레스트 가문의 직속 기사인 이 둘은 남부군 안에서 실력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둘은 남부군의 맹주인 포레스트 백작의 직속 기사이며 측근이었다.

다른 기사들은 물론이고 남부군의 귀족들도 이들에게 함부로 뭐라 하지는 못했다.

가까운 만큼 오래 지켜봤고, 릭과 토미는 세상 누구보다 밀턴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밀턴 포레스트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보였다.

어느새 저렇게 강해졌단 말인가?

상대는 최소한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으로 보였다.

그런데 밀턴은 그런 강적을 상대로 대등하게 맞서고 있었다.

아니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승기를 잡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밀턴이 공격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적은 점점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강하다.

아니, 원래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릭과 토미가 알고 있던 것보다 밀턴은 훨씬 더 강했다.

원래 밀턴으로서 가지고 있던 재능에, 박문수로서 각성하고 얻은 근성, 그리고 제롬 테이커라는 훌륭한 스승을 곁에 두고 정진한 결과 지금의 밀턴은 익스퍼트 중급.

순수한 검의 기교만 놓고 보면 상급과 겨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밀턴의 실력을 보고 릭과 토미는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때 릭과 토미의 안에서는 더 강해지고 싶다는 절실한 바람이 생겼다.

콰아앙!!

“크으으….”

밀턴의 강한 베기를 간신히 막았지만 뒤로 밀려난 알프레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하다.’

처음에는 만만치 않다 정도로 느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실력의 차이가 느껴졌다.

오러의 강함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검술의 정교함과 수읽기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이대로 가면 진다.

이미 전쟁에서 패했는데 적 지휘관의 목이라도 가져갈 수 없다면 이 전투는 비참한 패배로 기록될 뿐이다.

‘그럴 수는 없지.’

알프레드는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이게 내 인생에 마지막 싸움이다.’

체념한 것 같은 알프레드를 보고 밀턴이 말했다.

“항복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거다.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약속하지.”

밀턴의 말에 알프레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품 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뭐지?’

순간 밀턴은 알프레드가 독을 먹고 자살하는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흐읍!”

알프레드의 검에서 일렁거리던 오러가 갑자기 훨씬 더 강해졌다.

“뭐냐? …네놈 뭘 한 거냐?”

밀턴도 이번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밀턴에게 알프레드가 다시 달려들며 말했다

“알 것 없다. 죽어라!!”

그리고 알프레드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알프레드에게 군을 맡기면서 지크프리트는 작은 약병 하나를 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최근 군부에서 개발한 비약이오. 아직 개선의 여지는 있지만 이 약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잠재력을 폭발시켜서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해 주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알프레드는 크게 놀랐다.

설마 군부에서 그런 약을 개발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인체에 그렇게 강력한 작용을 하는 약이라면 효과만큼이나 부작용도 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점을 물어보자 지크프리트가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말해주었다.

[부작용은 간단하지. 죽는 거지.]

그 말에 알프레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먹으면 죽는다니?

이건 비약이라기보다는 독약으로 봐야 하지 않는가?

알프레드의 그런 표정을 보며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아직 개발 중인 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소. 언젠가는 개선되겠지.]

결국 알프레드는 비약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일단 주는 거니 받기는 하겠지만 자신이 이 약을 쓸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거지.’

알프레드는 지금 그 비약을 마시고 싸우고 있다.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며 처절하게 말이다.

“크윽…. 이 자식 너 뭘 먹은 거냐?”

“알 것 없다!”

밀턴의 표정에는 여유가 싹 사라졌다.

공격의 파괴력과 스피드가 몰라보게 강해졌다.

실력은 둘째치고 오러의 양만 놓고 보면 상급, 어쩌면 최상급에 필적할지도 몰랐다.

밀턴은 그 공격을 받을 때마다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최대한 흘린다고 흘리고 있는데도 이 지경이라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체불명의 약을 먹은 후에 적이 갑자기 강해졌다.

생각도 못한 상황에 밀턴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다 이긴 전쟁인데 마지막에 내 목이 날아가서야 다 허사잖아?’

밀턴은 이를 악물었다.

강해진 것은 오러뿐이다.

적의 경지 자체가 올라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기술로 버티면서 빈틈을 찾아야 했다.

‘집중…. 집중하자.’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밀턴은 검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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