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닷새가 되도록 남부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화살 한 대 날리지 않고 얌전하게 대치하고만 있었다.
알프레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딱히 뾰족한 대응책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쯤에 알프레드에게 이상한 보고가 올라왔다.
“병사들 중에 병자가 나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아직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꽤 많은 병사들이 고열과 몸살, 그리고 구토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병에 걸린 병사들의 숫자는?”
“아직은 30명 정도입니다. 혹시 몰라서 병사들은 이미 격리 조치해 두었습니다.”
부관의 보고를 들은 알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격리 조치를 철저하게 하고 경과를 지켜보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은 심각하지 않았다.
고작 30명 정도일 뿐이었기 때문에 적절한 조치만 취하면 금방 진정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다음날.
알프레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게 되는 보고를 받았다.
“대위님. 병자가 늘어났습니다. 수백 명의 환자들이 같은 증상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격리 조치는 확실하게 한 것이 맞는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도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병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
알프레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쯤 되면 확실하다.
전염병이 돌고 있는 것이다.
하필 지금 말이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가 있을까?’
침착함이 장점인 알프레드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적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터진 전염병이라니?
이래서야 정상적으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병자의 격리를 철저하게 해라. 그리고 모든 물은 끓여서 마시게 하고, 병이 발발한 환자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어서 찾아라!”
“옛. 알겠습니다.”
알프레드는 서둘러서 지시를 내리고 제발 이 이상 병이 퍼지지 않기를 바랐다.
3일 후.
알프레드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은 거침없이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아직 사망자는 없었지만 병사들 중에 상당수가 고열과 구토의 증세를 보이며 병에 쓰러졌다.
격리 조치도 소용없었고 전시 상황에서 가능한 위생 환경도 최대한 신경을 썼다.
하지만 병을 잡을 수는 없었다.
유일한 소득이 있다면 역학 조사를 통해서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인은 식량이었다.
식량 중에서도 이전에 적의 야습에서 지켜냈던 식량을 먹은 병사들이 병에 걸린 것이다.
뿌득….
“개자식들. 먹는 것에 장난질을 쳐?”
알프레드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수단을 가린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래도 이를 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알프레드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발병 원인을 알아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미 원인이 되는 식량은 전부 소비했고 많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이 질병이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적이 유도한 것이라면 적들도 이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제야 알프레드는 적의 목적을 알았다.
적은 자신들이 병에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알프레드는 선택해야 했다.
첫 번째 선택은 지금 군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정면 승부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면 승부에서 승산은 거의 보이지가 않았다.
적의 진형에 공성 병기조차 보이지 않고 완벽한 진형을 차려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적들은 자신들이 지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가뜩이나 병사들이 반 이상 쓰러진 상황이다.
이 시점에서 정면 승부를 선택해 봐야 이길 가능성은 5퍼센트 미만 정도밖에 없었다.
다만, 설령 패배한다고 해도 이대로 시간을 계속 끌다가 병사들의 병세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싸울 기회조차 없이 패배할 것이다.
선택 두 번째.
그것은 농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병사들은 반 이상 쓰러졌지만 그래도 아직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적이 무슨 독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애당초 인간을 치사량에 도달하게 하는 독을 대량으로 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봐서 이대로 시간을 보내면 병사들은 회복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병력이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수성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은 남아 있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이 지나면 병세가 진정될 것이다, 라는 가설을 전제하에 했을 때 유효한 선택이다.
만약 병세가 더 심해지면….
그때는 원통함을 안고 이 성안에서 말라죽어 버릴 뿐이다.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알프레드는 신중하게 결정했다.
‘농성에 집중한다.’
정면 승부를 했을 때의 승산은 너무나 희박했다.
더구나 적의 진형을 보고 판단컨대 적들은 자신들이 농성을 풀고 밖으로 나올 것을 예상하고 준비를 하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이 원하는 쪽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 보이겠다.’
알프레드는 굳건하게 농성의 의지를 새겼다.
그러나, 그 의지는 불과 하루를 갈 수 없었다.
다음 날.
진형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 잠깐 성벽을 내려와 있던 알프레드에게 전령이 달려와서 말했다.
“대위님. 적들이…. 적들이….”
“무슨 일이냐?”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잊지 못하는 전령의 모습에 알프레드는 큰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된 건가?’
그때 알프레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두 가지였다.
올 것이 왔구나.
올 테면 와라.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어느 정도의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을 넘어선 말이었다.
“적들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순간 알프레드는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아니면 전령이 미쳤거나….
“아니, 적이 후퇴하고 있다고? 그게 정말이냐?”
한 박자 늦게 상황을 받아들인 알프레드의 질문에 전령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적이 물러났다? 적이….’
알프레드는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야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던 적들이 사라진 것이다.
“어째서 적들이 물러난 거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알프레드에게 옆에 있는 부관이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들이 물러났으니 다행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기는 한데….”
알프레드는 가슴 한구석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적은 절대로 의미 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기행으로 보이는 행동에도 모두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무슨 이유지? 여기서 군을 물려서 무슨 이득이 있… 설마?’
알프레드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다급하게 부관에게 외쳤다.
“지도를 가져와라!”
“예?”
“지도를 가져오란 말이다! 그리고 정찰병을 보내서 적의 동태를 관찰하고 보고하라!”
“어…. 예.”
“서둘러!!”
부리나케 달려가는 부관을 보며 알프레드는 이를 악물었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살다 보면 때때로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초조함과 불안감이 극에 달하면 1초가 하루같이, 1분이 1년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알프레드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랬다.
지도를 내려다보며 정찰병의 보고를 기다리는 알프레드의 분위기가 얼마나 침통한지 옆에 부관이 말도 걸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찰병이 돌아왔다.
“적이 후퇴한 방향은 어디냐?”
거두절미하고 바로 질문을 하는 알프레드에게 정찰병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적은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알프레드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부관에게 바로 지시를 내렸다.
“즉시 움직일 수 있는 전군을 소집해라! 적을 추격한다!”
항상 신중한 전략 전술을 사용하던 알프레드가 과감한 지시를 내리자 부관은 당황했다.
“대위님. 진정하십시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 요새를 지키고 있으면….”
“서둘러라!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단 말이다!!”
알프레드는 버럭 소리를 질렀고 즉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군을 다 동원해서 밀턴의 남부군을 추적했다.
패밀리어 마법으로 적의 동태를 관찰하고 있던 비앙카가 밀턴에게 말했다.
“적이 요새 밖으로 나왔어.”
그 말을 들은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알프레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이 양자택일이라고 생각했다.
농성으로 지키거나, 혹은 적을 공격해서 정면 승부를 보거나.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다.
애당초 밀턴은 적에게 선택권을 줄 생각이 없었다.
밀턴은 우선 적에게 독이 충분히 퍼지기를 기다렸다.
사실 알프레드에게는 이때가 유일한 기회였다.
비앙카가 만들어준 독은 적은 양으로도 많은 병사들을 중독시킬 수 있었지만 잠복기가 있었다.
독이 퍼지기 전에 알프레드가 정면 승부를 걸었다면 밀턴도 그 정면 승부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독의 존재도 모르는 알프레드가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밀턴도 요새의 바로 앞에서 대치를 하였던 것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독이 퍼진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밀턴의 생각대로였다.
농성을 선택하려는 알프레드였지만 밀턴은 독의 효과가 절정에 도달한 시점에서 군을 물렸다.
단, 후방으로 물리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말이다.
동쪽으로 이동하면 지크프리트와 스트라부스 왕국의 데릭 브란스 공작이 붙고 있는 전투가 있다.
밀턴이 병력을 이끌고 그쪽으로 이동해서 지크프리트의 뒤를 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알프레드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적의 병력을 묶어두는 것이었다.
이겨도 되고 져도 되지만 적을 이 자리에 묶어두는 것은 최우선 사항이었다.
즉, 밀턴이 동쪽으로 이동한 시점에서 알프레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무조건 추격을 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제롬!”
“옛. 주군!”
밀턴의 부름에 제롬이 충직하게 대답했다.
“전군 반전한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자.”
“옛. 알겠습니다.”
알프레드가 군사를 이끌고 밀턴을 따라잡았을 때 밀턴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였다.
하지만 알프레드에게는 여기서 멈춘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전군, 돌격하라! 언젠가 건설될 이상향을 위한 초석이 되자!”
“오오오오!!”
기세를 살려서 크게 소리친 알프레드의 외침에 병사들은 호응했다.
이상향을 위한 초석이 되자.
이 말은 공화국군이 결사의 각오를 다졌을 때 하는 말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죽어도 언젠가는 공화주의가 왕권주의를 몰아내고 이 세상에 이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목숨을 바치라는 요구였다.
공화국군의 정규 병사들은 사상에 대한 교육을 철저하게 받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순간 분위기가 확 고조되고는 했다.
알프레드는 이런 병사들의 기세를 살려서 어떻게든 이 전투에서 성과를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적을 물리치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적이 물러나도록 지휘관이라도 죽여야 했다.
특히 자신을 이렇게까지 농락한 지휘관은 처음이라서, 알프레드는 사적으로도 꼭 죽여 버리고 싶은 게 지금 심정이었다.
하지만 사기가 높다고 성과를 바라기에는 눈앞에 적이 너무 강했다.
“쏴라!!”
궁수대를 이끄는 트라이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에 화살이 하늘을 날았다.
퍽! 퍼퍼퍽! 퍽퍽!
“아아악!”
“크아아아악!”
돌격하던 병사들의 전열이 화살에 맞고 비명을 질렀다.
알프레드는 이를 악물고 병사들이 위축되지 않게 외쳤다.
“물러서지 마라! 화살을 피하고 싶다면 거리를 좁히는 수밖에 없다! 전진하라!! 전진하라!!”
병사들을 가장 많이 살리는 신중한 지휘관.
이 평가가 무색하게 지금의 알프레드는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하는 전투였다.
“으아아아!!”
“죽어라. 이 새끼들아!”
“공화주의 만세!!”
공화국의 병사들은 온몸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앞으로 전진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단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서 앞으로 향했다.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뒤에 따라오는 아군에게 다음 한 걸음을 맡기며 병사들은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