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서쪽의 우회로를 따라서 진격하는 밀턴은 행군 속도를 빠르게 올렸다.
동쪽에서 진군하고 있는 스트라부스 왕국에 처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동하면서 비앙카와 대화를 하며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파악했다.
마법사가 워낙 드물다 보니 그녀가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밀턴은 그녀의 능력이 생각보다 많이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마법 한 방에 적을 수천 명씩 날려버리는 그런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비앙카가 말하기를 그런 마법사는 지금 이 시대에는 없다고 했다.
비앙카도 공격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니었지만 최대 위력의 마법을 상용해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숫자는 대략 열 명 전후 정도가 한계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실망한 밀턴이었지만 대화를 계속 해 보니 알았다.
마법이라는 것이 강력한 게 아니었다.
유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유용성이 빛을 발휘했다.
“밀턴? 밀턴 어디 있노?”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비앙카는 창문을 열고 밀턴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비앙카 씨.”
밀턴이 말을 몰고 마차까지 다가오자 비앙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찾았데이.”
“정말입니까?”
비앙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밀턴은 감탄했다.
‘역시… 어설픈 공격 마법보다는 이렇게 활용하는 편이 백배는 낫지.’
비앙카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패밀리어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패밀리어 마법은 동물과 의식을 동조해서 그 동물을 조종하는 마법이다.
그 마법으로 매 한 마리를 이용하여 하늘에서 주변을 꾸준하게 정찰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적을 찾았다.
“제롬. 잠시 정지하고 휴식하며 전열을 정비하라.”
“알겠습니다. 주군.”
밀턴은 제롬에게 지시를 내린 후 마차로 들어갔다.
“백작님은 또 저 마차에 들어가네.”
“거참… 아무리 젊다고 해도 애인을 전쟁터에 데리고 오다니….”
비앙카는 대외적으로 이 전쟁의 작전 참모로 전쟁에 참여했다.
마법사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밀턴이 그렇게 지시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게 핑계로만 보였다.
누가 봐도 섹시한 미인이 군의 총사령관과 잦은 독대를 가지고 있다.
구설수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포레스트 백작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
너무 아껴서 전쟁터에 데리고 나왔다.
전쟁이 끝나면 아마 결혼할지도 모른다.
대강 이런 소문들이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돌았다.
비앙카가 몹시 아름다운 미인이라는 점이 소문의 속도를 더 부추기고 있었다.
“솔직히 부럽긴 하지?”
“말해서 뭐 하냐? 부러워 죽겠다.”
본의 아니게 병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된 밀턴이었다.
병사들의 상상과 달리 마차 안에서는 사랑의 밀회가 아니라 진지한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밀턴은 지도를 펼치고 말했다.
“적의 위치를 짚을 수 있겠습니까?”
“쉽지. 여기 숲을 끼고 군을 나눠서 매복해 있드라.”
“꽤 멀리 있군요.”
지금 있는 위치에서 적의 위치까지는 행군을 하면 반나절 정도는 더 가야 있는 거리였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자신들이 적의 위치를 먼저 알았다면 적은 아직 아군의 위치를 잘 모를 것이다.
“적의 숫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
“어렵데이. 하늘에서 보는 건데 숲이 시야를 너무 가린다카이. 거기다 다 숨어 있다 아이가.”
“그렇군요.”
밀턴은 지도를 유심하게 살폈다.
그러다가 말했다.
“여기하고 여기, 그리고 여기로 가는 길에 적이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알았다. 좀만 기다리라.”
그리고 비앙카는 의식을 집중해서 매를 조종했다.
잠시 후….
“여기는 막혔고, 이쪽은 소수지만 정찰대가 지키고 있드라. 여기는 괜찮은 것 같다.”
그녀가 지도에서 가리키는 위치를 보며 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서 매복을 하고 우리를 맞이할 생각이었군.”
“아마 그렇지 않겠나?”
성에 틀어박혀서 수성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적을 격퇴하는 쪽을 선택한 모양이다.
적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내가 만만하게 보였다거나 아니면 상황이 급하다는 거겠지. 혹시 둘 다일까?’
어느 쪽이든 밀턴으로서는 잘된 일이다.
매복은 성공했을 때의 보수가 크지만 적에게 사전에 발각되면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비앙카 씨, 혹시 마법으로….”
밀턴이 비앙카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그러자 비앙카는 알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가능하지. 몇 명한테 걸어주면 되겠노?”
“저하고 제롬, 그리고 믿을 수 있는 기사들까지 포함하면… 30명 정도는 됩니다.”
“알겠데이. 대신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으니까 주의해야 된데이.”
비앙카는 밀턴이 뭘 하려고 하는지 대강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얼마나 지속될까요?”
“한 시간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밀턴은 즉시 제롬을 포함해서 남부군의 정예 기사단을 호출했다.
알프레드 대위.
지크프리트가 높게 평가하는 인재 중의 한 명으로 이번에 3만의 군대를 위임받아서 남부군을 상대하게 된 남자다.
지크프리트가 안심하고 군을 맡길 수 있는 것은 그가 몹시 안정적인 지휘관이기 때문이다.
알프레드의 나이는 45세.
그가 처음으로 군에 투신한 것이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으니 이제는 전쟁터에서 군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인생의 반을 넘었다.
그는 처음부터 두각을 드러낸 천재는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지휘관이었고 상관들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군에서 복무하였고 무엇보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남았다.
그리고 25년의 세월은 한 명의 범용한 남자조차 우수한 지휘관으로 바꿔 놓았다.
지크프리트가 높게 평가하는 알프레드의 장점은 안전성과 꼼꼼함이었다.
알프레드는 전쟁에서의 승률은 70퍼센트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였지만 승패를 떠나서 병사들의 생존율은 공화국군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높았다.
패배는 해도 전쟁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큰 패배는 하지 않는 타입의 지휘관인 것이다.
딱히 일신에 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적을 손바닥 위에 올려둘 정도로 대단한 지략을 타고나지도 못했다.
하지만….
안전성, 꼼꼼함, 신중함.
이런 무기로 특출 난 천재들을 이겨본 적도 있는 알프레드였다.
그는 우선 적의 행군 루트를 확인하고 매복에 최적화된 지형을 찾았다.
그리고 매복군을 배치하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대비해야 할 것은 최적의 상황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이다.’
알프레드는 평소대로 매복을 배치하면서도 꼼꼼한 준비를 했다.
우선 적이 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정찰대를 배치했다.
또 매복이 발각되어도 불리하지 않게 아군을 지휘할 수 있는 진형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혹시 적의 반격에 밀릴 때를 대비해서 퇴로를 확보했다.
일이 잘 풀렸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를 둘 다 대비한 것이다.
이런 꼼꼼한 사전 준비 하나하나가 승리로 이어진다고 믿었기에 소홀함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프레드 대위님. 적들이 예정된 포인트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알프레드가 보낸 정찰대에 적의 위치가 걸렸다.
“적의 규모는? 거리는?”
“병력은 2만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금 우리 병력과 반나절 떨어진 위치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진지를 구축한다고?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행군을 멈춘단 말이냐?”
“예. 보고로는 그렇습니다.”
“…….”
적이 이상 행동을 보일 때는 절대 그냥 넘기지 마라.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알프레드의 철칙이었다.
“적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정찰병을 배로 늘려서 적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마라.”
“옛! 알겠습니다.”
매복을 하고 적을 기다리는 입장에 있는 알프레드였지만 그의 머릿속에 방심은 한 조각도 없었다.
알프레드는 정찰을 늘리고 혹시 몰라서 다시 퇴각로와 주변 상황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 쪽에 이상이 없다면 적의 진형에 갑자기 행군을 멈출 이유가 생겼다는 건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중에 하나이기는 했다.
갑자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거나 적의 후방에서 다른 명령이 내려온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동쪽의 전선에서 전황이 어떻게 될지 확인하기 위해서 망설이는 것일 수도 있지.’
만약 동쪽의 대로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이 지크프리트에게 패배한다면 그때는 즉시 남부군이 수도로 귀환해서 나라를 지켜야 했다.
그러니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서 전력을 아끼려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 그렇다면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도 말이 되는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중에 하나로 보였다.
‘일단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자. 적들이 지금의 위치를 방어선으로 생각한다면 본격적으로 진형을 차릴 것이다. 대응은 그때 적들의 움직임을 봐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
결국 알프레드는 적의 반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 당장 공격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상 가장 신중한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중을 기울여도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도 나오는 법이다.
그날 밤.
숲에 매복한 공화국 군사들은 모닥불 하나 피우지 못하고 은밀하게 밤을 보내야 했다.
“제길, 차라리 진지를 차리는 게 낫지. 이게 무슨 고생이래?”
“어쩔 수 없지.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진지는 고사하고 모닥불 하나 피우지 못하는 숲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두운 숲속에서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까지….
그나마 옆에 사람들이라도 없으면 으스스한 분위기 때문에 더 피곤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일까지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도 후퇴하겠지?”
“알프레드 대위 성격상 그러지 않겠어. 이기는 것보다 안전하게 싸우는 것을 우선시하는 지휘관이니 말이야.”
“하긴, 덕분에 우리 같은 말단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사람이지.”
윗사람들에게는 신중함이 지나쳐서 큰 공을 세우지 못하는 장수로 평가받은 알프레드였지만 의외로 일반 병사들은 알프레드의 지휘하에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승패를 넘어서 병사들의 생존율이 가장 높은 지휘관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사람 굴리는 게 험해도 살아남는 사람은 제일 많으니까 좋긴 좋은 거지. 안 그래?”
병사 한 명이 그렇게 동의를 구했지만 다른 병사는 대답이 없었다.
“이봐. 론? 대답이…. 어?”
같이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대답이 없자 말을 한 병사는 당황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론이라는 병사는 바닥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무슨… 커억….”
당황한 그 순간 병사 본인도 심장에 칼날이 박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안…. 안 보여….’
자신을 공격한 적의 존재가 보이지를 않았다.
죽음의 그 순간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원통했는지 그 병사는 눈도 감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 시각….
“커억….”
“끄아악….”
“누…. 누구… 으윽….”
여기저기서 보초를 서고 있던 경계병들이 보이지 않는 칼날에 쓰러져 가고 있었다.
정찰병들은 전혀 대응을 하지 못했다.
적이 보이지도 않았고 전투의 소음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밤눈이 밝은 산악병이라고 해도 대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일대의 병사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알프레드가 배치한 정찰망에 커다란 구멍이 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정찰병들을 다 처리한 후에 어둠속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명하신대로 이 일대의 병사들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롬과 밀턴 그리고 남부군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 기사들이었다.
“실수는 없었겠지?”
“예. 우리가 적들을 쓰러트릴 동안 외부로 도주하거나 연락을 취한 병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롬의 보고를 듣고 밀턴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릭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말했다.
“모두 마법사님 덕분입니다. 마법으로 이런 효과가 가능하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의 효과를 체험해서 그런지 기사들은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다.
특히 성격이 단순한 릭은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런 릭을 보고 염려가 된 밀턴이 말했다.
“모두에게 말해 두겠지만 아직은 마법사의 존재는 비밀이다. 적이든 아군이든 모를 때가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듬직하게 대답하는 기사들 사이에서 릭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누가 그분이 마법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예.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원래 마법사 하면 나이 지긋한 노인에 수염도 성성한 그런 이미지죠. 저는 사실 그분이 마법사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철석같이 영주님의….”
“나의 뭐?”
“어어…. 그게….”
말을 하던 릭은 깨달았다.
또 자신의 주둥아리가 매를 벌었다는 것을 말이다.
“바쁘니까. 지금은 넘어가지.”
“예. 알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