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놀란 밀턴과 달리 정작 레이라 공주는 태연했다.
“이상한가요? 제가 왕위에 오른다고 해도 다음 후계는 필요해요. 그렇다면 남편이 있어야죠.”
“아니 그거야….”
“백작은 유능하고 나와 좋은 이해관계에 있죠. 무엇보다 중앙에서 권력을 쥐고 나라를 쥐락펴락하려는 욕심도 보이지 않고… 지금으로서는 내 남편감 1순위는 당신이에요.”
“…….”
밀턴은 순간 멍했다.
설마하니 이런 얘기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말이다.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이군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딱히 사랑을 요구하지는 않아요.”
“사랑은 없어도 된단 말입니까?”
“예. 나는 백작이라는 강한 우방을 내 편으로 만들고 정치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결혼도 겸사겸사 해결하는 거죠. 그리고 백작은….”
“저는 뭐가 이득일까요?”
“나라는 아름다운 여자를 손에 넣는 거죠. 축하해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공주님 하나면 충분하단 말입니까? 그거 참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자신감이 없을 이유라도 있나요?”
레이라 공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에 손을 얹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
그 모습을 보고 밀턴은 순간 은은하게 감탄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분하지만 근거 있는 자신감이긴 해.’
분명 레이라 공주의 미모는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울 만한 것이었다.
그런 미인과의 결혼이 싫다고 하는 남자는 거짓말쟁이 아니면 게이일 것이다.
그리고 밀턴은 양쪽 다 아니다.
솔직히 혹하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군요.”
“그런가요?”
밀턴이 한 걸음 물러나자 레이라 공주는 김이 빠졌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밀턴에게 살짝 떨어져서 와인 잔을 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들이댔나?”
“예? 지금 뭐라고 하셨죠?”
밀턴은 순간 레이라 공주의 입에서 왕족의 위엄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말이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크흠… 어쨌든.”
레이라 공주는 자세를 바로하고 밀턴에게 말했다.
“본론으로 넘어가죠. 말했다시피 어려운 전쟁입니다. 그러니 저 나름대로 백작에게 조력자를 파견할 생각입니다.”
“조력자라고요?”
“예. 페일런 공작과 더불어서 내가 손에 쥐고 있던 비장의 카드 중에 하나죠.”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적지 않게 놀랐다.
‘페일런 공작에 버금가는 인물을 조력자로 보낼 수 있다고?’
이 공주님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력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밀턴은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럼 용건은 이걸로 끝났군요. 시간도 시간이니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아! 전쟁 끝나면 우리 결혼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고 말이죠.”
“사망 플래그는 좀….”
“예?”
“그런 것 있습니다.”
“……?”
아무리 똑똑한 요물 공주라도 이해 못할 말은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 비장의 인재라는 사람은 언제 소개시켜 줄 겁니까?”
“지금은 수도에 없어요. 며칠 안으로는 도착할 테니까 오면 소개해 줄게요.”
“누군지는 당연히 비밀이겠죠?”
“잘 아는군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동안 출전 준비나 철저하게 해 두도록 하죠.”
출전 준비라고 해도 자잘한 일은 지시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개중에는 밀턴이 직접 나서야 하는 일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참모진에 새로운 인물을 영입한다거나 하는 일이 바로 그렇다.
“세비안 자작, 부디 힘을 빌려주지 않겠소?”
전쟁에 나서는 이상 유능한 참모의 존재는 황금보다 귀하다.
지력 91에 전쟁에 특화된 특성을 다수 가지고 있는 세비안 자작은 밀턴에게 있어서 영입 1순위였다.
이전 전쟁에서 밀턴이 그의 전략을 전격적으로 채용했고, 개선식 이후에 그의 공적도 거짓 없이 보고했다.
그로 인해서 밀턴에 대한 호감이 꽤 올라갔지만 아직 그의 충성 수치는 61이었다.
굉장히 미묘한 수치였다.
밀턴에게 어느 정도 끌리고는 있지만 아직은 밀턴의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운 단계였다.
그래서 밀턴이 과감하게 영입을 제의했는데 세비안 자작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의는 영광스러우나 죄송하게도 거절해야 할 듯합니다.”
정중한 세비안 자작의 거절에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겠소?”
“그것이… 제 스승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스승? 자작의 스승이라면? 트라우스 후작님을 말하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트라우스 후작은 세비안 자작에게 전략 전술을 가르쳐준 스승이었고, 또 개인적으로 각별한 은사이기도 했다.
세비안 자작은 스승의 능력을 진작에 뛰어넘었지만 그럼에도 독립하지 않고 스승을 따라서 1왕자의 군에 종사했을 정도로 스승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런 스승이 죽은 것이다.
원래 노구이기도 했지만 최근 1왕자의 죽음을 접하고 정신적으로 큰 쇼크를 받은 것이 죽음의 원인이었다.
자신이 잘 보필하지 못해서 1왕자가 죽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 트라우스 후작은 시름시름 앓다가 그대로 쓰러졌고,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평생 독신을 고집한 트라우스 후작은 자식이 없었고, 그의 장례를 치러줄 가족도 없었다.
그래서 트라우스 후작의 애제자인 세비안 자작은 스승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서 한동안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기로 한 것이다.
“부디 이해를 바랍니다. 저에게는 진정 스승을 넘어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분이셨습니다.”
세비안 자작은 밀턴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사적인 감정과 이유로 전쟁에 참전할 것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런 세비안 자작에게 밀턴이 담담하게 말했다.
“고개를 드시오. 세비안 자작.”
그리고 고개를 든 세비안 자작의 손을 잡아주며 밀턴이 말했다.
“자작의 마음은 이해하오. 나도 몇 해 전에 부친을 잃었소.”
“백작님….”
“부디 마지막 가시는 길에 후회가 없도록 정중하게 보내 주시오.”
밀턴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허락해주자 세비안 자작은 크게 감동했다.
“감사합니다. 이번 전쟁에는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멀리서나마 백작님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세비안 자작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정한 듯이 말했다.
“스승님의 장례가 끝나는 대로 백작님의 휘하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밀턴은 이 순간 확인했다.
61이던 세비안 자작의 충성심이 81로 변하는 것을 말이다.
‘한꺼번에 20이나 오르다니.’
밀턴은 몹시 만족했다.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 카리스마가 제대로 터진 모양이다.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겠소.”
“감사합니다. 주군.”
그날 밀턴은 전쟁에 유능한 참모를 데리고 가는 것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 유능한 참모를 자기 사람으로 영입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출정 하루 전날.
밀턴이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레이라 공주가 말했던 인재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말을 듣고 밀턴은 바로 레이라 공주를 찾아갔다.
“어서 와요. 포레스트 백작.”
“공주님을 뵙습니다.”
밀턴은 정식으로 인사를 한 후에 슬쩍 레이라 공주의 옆에 있는 인물을 확인했다.
‘누구지?’
온몸을 로브로 감싸고 후드까지 깊숙하게 눌러서 외모를 볼 수가 없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포레스트 백작. 이분은 제가 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비앙카 코넬리우스라고 합니다.”
레이라 공주가 그렇게 말하자 비앙카라고 소개 받은 여성은 로브를 벗었다.
‘우와….’
순간 밀턴은 탄성을 질렀다.
로브를 벗자 드러난 것은 레이라 공주와는 다른 타입의 미인이었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붉은색 머리카락에 황금색에 가까운 노란 눈동자.
거기다 로브로 용케 감추고 있었다 싶은 몸매는 S라인이 정말 뚜렷하게 드러났다.
거기에 화룡정점을 찍은 건 그녀의 당당한 눈동자였다.
오만하지만 그 오만함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아서 더 당당한 눈빛이 더해지자 섹시하면서도 유능한 여성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크흠….”
살짝 멍해졌던 밀턴은 레이라 공주가 눈치를 주자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대단한 미인이시군요. 저도 모르게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그런 밀턴을 보며 비앙카라고 이름을 밝힌 여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머슴아가 와 이래 능글맞노?”
‘남대륙 사투리?’
겉보기와 달리 그녀는 털털한 사투리 미인이었다.
“남대륙 분이신가요?”
밀턴이 묻는 말에 비앙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맞다. 근데 왜?”
“조금 알아듣기 힘든데 표준어로는 말 못 하나요?”
“못 한다. 뭐 문제 있나?”
“…….”
말은 둘째치고 이렇게 땍땍거리는 반응은 좀 거슬렸다.
“레이라 공주님. 진짜 이 사람이 페일런 공작에 버금가는 인재라는 겁니까?”
밀턴의 의구심에 레이라 공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
밀턴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즉시 비앙카의 스텟을 살펴봤다.
[비앙카 코넬리우스]
마법사 LV.6
무력 - 07 통솔 - 45
지력 - 99 정치 - 22
충성 - 00
특성 - 마법, 인챈트, 간파.
마법 LV.6 :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더 많아진다.
인챈트 LV.3 : 마법적 효과가 깃든 물품을 제작할 수 있다.
간파 LV.6 : 타고난 관찰력으로 대화 상대의 말에 허실을 파악한다.
‘오오… 지력 99는 처음 봤어.’
마법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대단한 능력치였다.
“많이 신기한가 보죠?”
밀턴이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며 은은하게 감탄하자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예. 마법사라니….”
밀턴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비앙카를 바라봤다.
비앙카는 ‘뭘 보노?’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개의치 않았다.
‘살다 보니 진짜 마법사를 보기도 하는군.’
밀턴이 이렇게 감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마법사는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 세상에서 마법사들이 흔하던 시기도 있었다.
국가마다 마법사를 양성하는 기관이 있었고 그런 마법사들이 모여서 서로 연마하던 마법사들의 길드도 있었다.
그때는 마법이 일상생활에 깊숙하게 파고들어서 일상생활에서도 마법이 관여된 아티팩트를 태연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를 지금은 고대 시대라고 부르며 마법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 자체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한 시기라고 한다.
역사에 남지 않아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시대는 멸망하였고 마법사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어, 무엇보다 마법사들의 성향이 폐쇄적으로 변해 갔다.
마법사들은 세속에 관여하지 않고 은밀하게 잠적해서 마법을 연마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마법사를 발견하게 되면 국가에서는 정말 귀한 대접을 해 주었다.
하지만 마법사 자체가 워낙 드물고 국가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해서 마법사의 희귀함은 거의 마스터와 비등할 정도였다.
“정말 용케 이런 인재를 거느리고 있었군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느리다, 라는 표현은 옳지 않아요. 그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와는 이해가 일치한 동맹입니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밀턴이 바로 사과를 하자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됐다. 몰랐으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어쨌든….”
비앙카는 미소를 머금고 밀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데이.”
“아… 예. 잘 부탁드립니다.”
밀턴은 꽤 당황했지만 손을 잡았다.
사실 이 세계에서 여성과 악수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비앙카가 털털한 건지? 남대륙의 문화가 다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고 밀턴이 이끄는 남부군과 브란스 공작이 이끄는 스트라부스군이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 소식은 북쪽에 있는 지크프리트에게도 들렸다.
지크프리트는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지크프리트 비서관님. 적들은 동쪽과 서쪽으로 나눠서 오고 있습니다.”
“적의 병력 구성은?”
“예. 동쪽 대로로 올라오는 군은 스트라부스 왕국군으로 총 병력은 5만, 지휘관은 데릭 브란스 공작이라고 합니다.”
“5만에 마스터가 지휘관인가?”
“스트라부스 왕국 놈들 작정을 했군.”
참모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차분하게 전령에게 말했다.
“서쪽의 병력 구성은?”
“예. 서쪽은 이전에 보고했던 밀턴 포레스트 백작이 이끄는 남부군이라고 합니다. 총 2만의 병력입니다.”
전령의 보고에 지크프리트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2만이라고? 확실한가?”
“예. 그렇습니다.”
‘이상하군.’
전령의 보고에 지크프리트는 의문을 품었다.
지크프리트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지금 레스터 왕국의 가용 병력은 최대 4만이다.
그중에 1만을 수도 방위를 위해서 남긴다고 해도 최소 3만의 병력이 남는다.
이 전쟁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최대한 많은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여력을 남겨도 괜찮을 정도로 동맹군을 신뢰하고 있는 걸까? 그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면 좋기는 하겠는데….’
지크프리트는 몇 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른 것들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최대한 신중하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지.’
결론을 내린 지크프리트는 머릿속으로 이 전쟁의 상황을 설명했다.
적의 총 병력은 7만.
공화국군의 현 전력은 최근 본국에서 보낸 지원군을 포함해서 5만이다.
‘충분해.’
머릿속으로 전체적인 전략을 결정한 지크프리트가 결론을 내렸다.
“알프레드 대위.”
“예. 비서관님.”
“그대에게 3만의 병력을 맡기겠다. 서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남부군을 격퇴하라.”
“예. 알겠습니다.”
“동쪽의 스트라부스 왕국군은 내가 맡겠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참모 중에 한 명이 말했다.
“비서관님. 스트라부스 왕국의 병력이 더 강군입니다. 그런데 2만의 병력만 가지고 상대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왜? 위험해 보이는가?”
“사실은…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위험한 것을 넘어서 참모들이 보기에 지크프리트의 지시는 무모한 만용으로 보였다.
그런 참모들의 표정을 보며 지크프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적들도 그렇게 생각할 테지.”
“묘책이 있으십니까?”
“나를 믿고 따라라. 그렇다면 나는 귀관들에게 브란스 공작의 수급을 약속하겠다.”
지크프리트의 대범한 공약에 참모들이 모두 일어나서 외쳤다.
“옛. 알겠습니다!”
더 이상의 의심은 없었다.
한다면 하는 남자.
참모들이 알고 있는 지크프리트는 그런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