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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73화 (73/257)

제73화

레이라 공주가 클라우디아에게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아직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서일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가 증거를 찾는다면?

그날이 클라우디아의 목이 단두대에 떨어지는 날일 것이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으니 수도에 있는 게 불편하겠지.’

레이라 공주는 클라우디아의 속셈을 대강 눈치챘다.

‘하지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몰라.’

레이라 공주는 브란스 공작의 요청을 받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원군으로 인정한 이상 연락책을 위해서라도 우리 쪽 사람을 포함시켜야 했으니까요. 정식으로 그녀를 사절단으로 파견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란스 공작이 몹시 기뻐하는 것을 보며 레이라 공주는 슬쩍 촉이 왔다.

‘홀렸군.’

밀턴이 들었다면 ‘네가 할 말이냐?’라고 했을지 모를 생각이었지만 레이라 공주는 확신했다.

원래 클라우디아라는 여자는 자기 미모와 재력과 가문의 권력을 동원해서 자신에게 유용한 남자를 잡아 조종해 왔다.

미모를 뛰어넘는 마성의 매력이 있는 그녀는 남자를 유혹해서 조종하는 것이 몹시 능숙했다.

그렇게 몇몇의 남자를 거쳐서 마지막에 도달했던 것이 스카이트 1왕자였다.

하지만, 그 1왕자가 죽은 지금 그녀는 다시 한번 남자를 갈아타려는 것이다.

‘군사 강국 스트라부스 왕국에 세 명밖에 없는 마스터이자 공작의 신분. 확실히 그 암여우가 노릴 만한 상대이긴 해.’

그리고 지금 레이라 공주가 보기에는 브란스 공작 본인도 상당히 마음이 흔들린 듯했다.

레이라 공주는 그걸 눈치챘지만 모른 척하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군대를 조직해서 북부 탈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레이라 공주의 말에 브란스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굳이 원군을 보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이고 우리나라의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인데 어찌 우리가 발을 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레이라 공주의 말에 브란스 공작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브란스 공작은 마치 전쟁을 모르는 어린 여자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전쟁터에서 통일되지 않은 지휘 계통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우리 군의 병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병력의 증강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예. 정 도움을 주시겠다면 안정된 보급선을 유지하며 후방에서 조력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지휘 계통의 혼란이라.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군요.”

레이라 공주는 정말 나는 하나도 몰랐어요, 라는 표정을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발을 뺀다는 것은 역시 염치가 없고… 아!”

레이라 공주는 막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차라리 군을 양쪽으로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양쪽으로 나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북쪽으로 향하는 길목은 동쪽과 서쪽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동쪽의 대로와 서쪽의 우회로. 이 양쪽으로 군을 나눠서 움직이는 것이 어떨까요?”

“…나쁘지 않군요.”

브란스 공작은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신들의 전쟁에 외부인이 와서 이런저런 소리를 하며 방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별개의 공격 루트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하면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럼 결정되었군요. 그럼 브란스 공작님은 어디를 공격하시겠습니까?”

레이라 공주의 말에 브란스 공작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희는 동쪽을 맡겠습니다. 5만의 군대가 움직이려면 우회로는 너무 좁을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서쪽으로 진군하죠.”

그렇게, 레스터 왕국과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대가 각기 다른 루트로 북부로 진격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온 야심한 시각.

밀턴은 레이나 공주의 서신을 받았다.

- 지금 즉시 왕궁으로 오세요. 가능하면 몰래 오도록 하세요.

밀턴은 서신의 내용대로 로브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을 가리고 왕궁으로 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궁에 도착하자 시종이 은밀하게 밀턴을 안내했다.

그렇게 안내된 곳은….

‘여기로 들어오라고? 진짜로?’

레이라 공주의 방이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서 은밀하게….

여인의 침실에 들어간다.

‘진짜 들어가도 되나?’

밀턴이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레이라 공주님. 포레스트 백작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밀턴이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자 그 안에서는 뭔가 서류를 보고 있던 레이라 공주가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끝날 거예요.”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서류를 몇 장 더 처리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습니까?”

“일단은요.”

그녀의 피곤한 안색을 보고 밀턴이 말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긴….’

밀턴이 보기에 레이라 공주의 상태는 한 달에 딱 하루 쉬고 계속 출근해야 했을 때의 자신과 똑같았다.

인간이 업무와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을 때 딱 나오는 그 표정은 몹시 익숙했다.

전생에서 거울만 보면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크서클이 생겨도 예뻐 보일 수 있다는 건 처음이라서 신선하지만 말이야.’

레이라 공주는 그대로 찬장으로 가서 와인 병과 잔을 하나 꺼내왔다.

“피곤한데 그러실 필요 없습….”

밀턴은 사양하려고 말했다.

하지만….

“응? 백작도 마실 건가요?”

‘그럼 혼자 마시려고 했냐?’

아무래도 그랬던 모양이다.

어쨌든 둘은 자리를 마주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부른 용건은 알고 있나요?”

“이번 전쟁 때문에 부른 것 아닙니까?”

“맞아요. 이번 전쟁에서 백작에게는 조금 어려운 요구를 할 생각이에요.”

“…….”

순간 밀턴은 레이라 공주가 태연하게 ‘이번 퀘스트는 몹시 빡실 거야.’라고 말하는 NPC 같았다.

“전쟁 자체는 어렵지 않지 않습니까? 일단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5만의 병력에 데릭 브란스 공작도 구원으로 왔고….”

사실 북부를 수복하는 것은 온전하게 스트라부스 왕국의 전력만 가지고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그냥 이기는 것보다 어떻게 이기느냐? 라는 겁니다.”

레이라 공주는 잠시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공화주의가 대륙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패 같은 나라죠. 그러기 위해서 왕국들도 협조를 하고 있고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트라부스 왕국은 종종 외교적인 협상에서 그 점을 활용하고는 해요.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그 점을 활용하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스트라부스 왕국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공화국을 견제할 힘이 없으니 이렇게 침략을 당한 것이랍니다.”

“그건…. 사실이긴 하네요.”

힐데스 공화국보다 레스터 왕국의 국력이 약한 건 사실이다.

“거기다 바이런 2왕자가 공화주의를 표방했던 것을 예로 들어서 이 나라에 공화주의라는 독이 얼마나 퍼졌을지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뭐라 변명할 말은 없네요.”

2왕자가 공식적으로 공화주의를 표방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진실을 콕콕 찍어서 외교적인 공격을 해온 모양이다.

“그래서?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노리는 것이 도대체 뭐랍니까?”

“북부에 공화국을 몰아낸 후에, 방위군을 주둔시켜서 우리나라를 공화국의 마수에서 지켜 주겠다고 하더군요.”

“잠… 잠깐만요? 북부를 수복한 후에 자신들의 군대가 거기 머물겠다고요?”

깜짝 놀란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가 말을 이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정식으로 방위조약을 맺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주둔군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서 북부의 토지를 관리할 권리를 넘기라고 하더군요.”

“…·미친.”

“마지막으로, 주둔군을 보내서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대신 군사유지비를 지원하는 명목으로 이런 금액을 요구하더군요.”

레이라 공주는 한 장의 서류를 밀턴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밀턴은 그 서류에 적혀 있는 금액을 보고 말했다.

“우와, 이 도둑놈들….”

때때로 숫자는 인간을 욕 나오게 하는 신기한 기능을 한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북부를 수복한 후에 지켜줄 테니 땅을 내놓고 돈도 내놔라. 이 말입니까?”

“요약하면 그래요.”

“하아아….”

밀턴은 기가 막혔다.

물론 국가 간의 일이라는 게 이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지 군사를 파병했으니 적당한 이익을 요구할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빨대 꽂은 김에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겠다는 속셈이 빤하게 보였다.

“항의는 했습니까?”

“항의라….”

레이라 공주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포레스트 백작.”

“왜 부르십니까?”

“백작이 스트라부스 왕국의 귀족이라면 우리나라에서 하는 항의를 귀담아 들을까요?”

“…망할.”

할 말이 없었다.

스트라부스 왕국과 레스터 왕국의 국력 차이는 사람으로 치면 어른과 어린아이만큼의 차이가 난다.

아마 레스터 왕국에서 항의를 해 봐야 제대로 들어줄 리가 없다.

이럴 때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국제 사회에 불합리함을 호소하는 것인데….

“국제 사회에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겠죠?”

“예. 다른 나라들 입장에서는 대륙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공화국의 남하를 막아내는 게 최우선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보다는 스트라부스 왕국에 협력하는 게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테고 말이죠.”

밀턴이 척하면 착하고 알아듣자 레이라 공주가 살짝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머리가 좋은 건가? 무가의 귀족하고 대화하는 것치고는 말이 무척 잘 통해.’

사실 밀턴이 국제적인 정세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전생의 기억 때문이다.

지금의 세계보다 몇 배는 더 복잡 미묘한 세계에서 살던 기억이 있어서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레이라 공주가 보기에는 밀턴이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보일 뿐이었다

‘역시, 이 남자는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좋겠어.’

이 순간 레이라 공주의 안에서 밀턴에 대한 가치와 소유욕이 올라가며 모종의 결심을 굳혔다.

‘뭐지? 좀 으스스한데?’

그리고 밀턴은 몸에 한기가 들었다.

어쨌든 상황의 어려움을 설명한 레이라 공주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 전쟁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공화국보다 우리가 전쟁터에서 더 큰 공을 세우고 활약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국경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거군요.”

“맞아요. 그게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페일런 공작은 참전할 수 없습니다.”

“예? 공작님이 어째서?”

“페일런 공작은 수도를 지켜야 합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전쟁 중에 적이 직접 수도를 노릴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니 수도에도 강한 전력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하아… 어렵군요.”

전쟁터에서 마스터라는 전력은 정말 크다.

그런 전력이 빠진다는 것은 심각한 전력 분산이었다.

“정말 요구 사항이 너무 큰 것 아닙니까?”

밀턴의 불평에 레이라 공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이기면 후작으로 승작시켜 줄 테니 참아요.”

작위 하사를 어린애한테 사탕 주듯이 말하는 그녀에게 밀턴이 퉁명하게 말했다.

“후작위는 어차피 변경백 얘기할 때부터 약조된 거였잖습니까?”

“음, 그러네요. 그럼 뭐 해줄까요? 뭐 원하는 것이 있나요?”

레이라 공주가 반 장난식으로 하는 말에 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은근슬쩍 말했다.

“그럼 키스라도 해 주시죠?”

“좋아요.”

“그렇다면 저도… 예?”

“키스 정도야 뭐….”

레이라 공주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일어나서 밀턴에게 다가왔다.

“자, 그럼 눈 감아요.”

“자…. 잠시만요. 공주님.”

밀턴은 레이라 공주를 제지한 후에 진지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이러는 겁니까?”

“본인이 말하고서 그렇게 묻는 건 좀 멋없지 않나요?”

밀턴은 이 판국에 멋이 중요하냐고 생각했다.

“괜찮은 겁니까?”

“괜찮다니 뭐가요?”

“저하고 키스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냐는 말입니다.”

레이라 공주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백작, 나는 백작을 결혼 상대로도 생각하고 있어요. 키스 정도는 별것 아니죠.”

“결혼?”

밀턴은 진심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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