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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72화 (72/257)

제72화

밀턴은 캐르버에게서 얻은 정보를 레이라 공주에게 알렸다.

“그러니까… 공화국에서 이렇게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 것이 고작 한 남자를 잡기 위해서라는 건가요?”

레이라 공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 있던 페일런 공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공작은 그 지크프리트라는 남자와 직접 대치를 해 봤다고 했죠?”

“예. 그렇습니다.”

페일런 공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말을 이었다.

“직접 대치를 해본 제가 보기에 확실히 상대편의 지휘관은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면이 그렇죠.”

“그 전투에서 제가 공주님에게 받은 명령은 적의 침략을 저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죠. 그리고 공작은 그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나요?”

“…사실은 제가 욕심을 조금 부렸습니다.”

“욕심이라고요?”

“예. 아무래도 침략자들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보니 본때를 보여주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일런 공작은 그 전투에서 적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여차하면 자신이 직접 북방으로 군을 몰아서 영토에서 공화국군을 쫓아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을 써도 적의 탄탄한 진형이 무너지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중앙 돌파를 시도해 본 적도 있었지만….”

“실패했다는 건가요?”

“가장 손해가 컸습니다. 제 공격을 유연하게 받아내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자리를 비운 본대가 갉아 먹히고 있었습니다.”

“…….”

“마치,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난 고수와 체스를 두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뭘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수비에만 치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페일런 공작의 설명을 듣고 레이라 공주는 안색을 굳혔다.

“적의 병력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마스터인 공작이 있었는데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단 말인가요?”

“만약 그 적진에 마스터가 있었다면, 지금쯤 신은 살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페일런 공작의 말은 무장이 적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이었다.

“지크프리트라…. 그래. 그렇단 말이지.”

레이라 공주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생각에 빠진 듯하자 밀턴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요물 공주님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사악… 아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거지.’

이제 세세한 것은 그녀에게 믿고 맡기면 될 것이다.

데릭 브란스 공작은 레스터 왕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불편했다.

“시간을 너무 끄는군.”

브란스 공작은 연회를 즐기기 위해서 이 먼 나라까지 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레스터 왕국의 북부에 자리를 잡은 공화국군을 공격해서 공화국의 남하를 막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 위험인물로 인식된 지크프리트를 사살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물론 그 후에 스트라부스 왕국은 레스터 왕국의 수뇌부와 물밑으로 협상해서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낼 것이지만 그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전쟁에서 군을 이끌고 공화국을 물리치는 것까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여기가 외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하려면 레스터 왕국의 협조가 필요하다.

물론 자신들은 왕족이 직접 원군을 청했다는 칙서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공식 문서를 발행한 1왕자는 자신들이 오기 얼마 전에 자살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 종이쪼가리 하나 믿고 자신들 마음대로 군을 움직여서 공화국과 전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 나라의 공식적인 협조 선언을 받아내야 하는데….

문제는 지금 이 나라의 대표를 맡고 있는 레이라 공주가 뚜렷한 대답을 해 주기는커녕 공식적인 답변도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시간만 보내고 있으려니 몹시 답답한 브란스 공작은 아무래도 무슨 수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협상을 할 때는 먼저 요구 조건을 말하는 쪽이 반은 지고 들어가는 법이다.

하지만 더 이상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브란스 공작은 직접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왕실이 붙여준 시종이 찾아와서 말했다.

“공작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누구지?”

브란스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약소국인 레스터 왕국의 귀족들에게 있어서 브란스 공작은 신분적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귀족 위의 귀족이었다.

어떻게든 줄을 대보기 위해서 안달이 난 귀족들이 줄줄이 달려들었다.

정작 브란스 공작에게는 귀찮은 날파리 이상으로는 인식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스카이트 폰 레스터 전하의 부인이신 클라우디아님이십니다.”

“…만나겠다.”

이건 거부할 수 있는 만남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들이 이 나라에 발을 들일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1왕자의 부인.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시종은 한 명의 여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은 검은색 상복으로 몸을 감싸고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우아하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클라우디아 레스터입니다.”

브란스 공작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데릭 브란스 공작이오.”

둘은 자리를 마주하고 브란스 공작이 말했다.

“최근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클라우디아는 젖은 목소리로 간신히 쥐어짜듯이 대답했다.

겉으로만 보면 남편의 죽음에 슬퍼서 무너져 내리려는 자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가련한 미망인의 모습이었다.

누가 이 여인을 보고 남편을 직접 독살했다고 생각할까?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제 남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클라우디아는 그렇게 말문을 열고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 사정이란 즉….

이미 사망한 1왕자가 스트라부스 왕국에 원군을 청하여 레스터 왕국에서 공화국을 물리치려고 했지만 실의에 빠져서 자살해 버렸다.

그러니 미망인인 그녀는 남편의 뜻이라도 이뤄주기 위해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전쟁에 한 팔을 거들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게… 남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합니다.”

끝내 눈물을 흘리며 처연하게 말하는 클라우디아의 모습에 브란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뜻은 잘 알았습니다.”

브란스 공작이 보기에 클라우디아의 절절한 호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을 어지간히 사랑했나 보군.’

하지만 그런 브란스 공작을 보며 클라우디아는 속으로 조소를 하고 있었다.

‘왕족이건, 마스터건, 사내들을 조종하는 것은 똑같은 일이지.’

미모의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은 강한 신뢰도를 가진다.

클라우디아는 경험상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좀 더 확실한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침대 위에서 속삭이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 그건 무리겠지.’

미망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조금 아쉬운 클라우디아였다.

하지만 괜찮다.

브란스 공작을 설득시킬 수 있는 패는 미리 준비해 왔으니 말이다.

“미력하지만 이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클라우디아는 그렇게 말하며 브란스 공작에게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브란스 공작은 그 서류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부인. 이것을 어디서?”

“도움이 되실까요?”

클라우디아의 말에 브란스 공작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하군요.”

몹시 기뻐하는 브란스 공작을 보며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제가 부인을 도울 일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 주십시오.”

브란스 공작의 말에 클라우디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기다렸지.’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좀 어려운 부탁이 될지 모르겠지만… 감히 말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예. 사실은….”

클라우디아의 부탁을 들은 브란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남편분을 정말 사랑하셨군요.”

“제 반쪽… 아니 전부였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부인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브란스 공작의 말을 들은 클라우디아는 베일 너머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이제 반은 된 거야.’

브란스 공작은 레이라 공주와 자리를 마련했다.

“급하게 접견을 청해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둘은 가볍게 운을 뗐고 브란스 공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주님도 아시겠지만 우리는 귀국의 북부 지방을 차지하고 있는 간악한 공화국을 격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호의에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원군을 요청한 당사자인 오라버니는 불운하게 사망하셨고, 현 국왕인 아버님은 병환이 깊어서 친딸인 저도 얼굴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레이라 공주는 안타까운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임시로 국정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이고 비공식적인 상황일 뿐이죠. 제 권한으로는 공작님이 우리나라 안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답니다.”

이제까지 레이라 공주가 브란스 공작의 전쟁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논리에 빈틈이 없어서 어찌 파고들 수가 없던 브란스 공작은 못마땅하면서도 그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공주님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 보다시피 귀국의 국왕 전하께서 직접 써주신 친필 문서가 있습니다.”

브란스 공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군을 정식으로 인정하며 그들이 국내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협력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걸 어디서….”

“딸을 만나지는 않아도, 며느리와는 만날 생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

레이라 공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암여우가….’

레이라 공주는 클라우디아가 어디서 뭘 하는지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 빈틈이 생겼는지 몰래 움직여서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모양이다.

다행인 것은 레이라 공주가 이런 사태에 대비를 하기는 했다는 것이다.

국왕이 직접 쓴 칙서가 아니라고 해도 어떤 방법으로도 더 이상 스트라부스 왕국을 억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작정하고 대군을 동원한 스트라부스 왕국을 국내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도 역시 무리였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피할 수 없는 독이라면 먹고 버텨야지.’

레이라 공주는 자세를 꼿꼿하게 하고 말했다.

“전하의 명이 내려온 이상 저도 최선을 다해서 협조하겠습니다.”

“음, 호의에 감사합니다.”

레이라 공주가 순순히 협력을 한다고 하자 브란스 공작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협조라고 해서 말인데, 귀국의 왕족 중에 한 분이 우리 군에 참전 의사를 밝혔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브란스 공작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순간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보통은 존재감이 옅은 3왕자나 4왕자가 일발 역전을 노리고 전쟁터에 몸을 던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제 오라버니의 부인이 꽤 용감한 편이죠?”

‘간이 퉁퉁 부을 정도로 말이야.’

레이라 공주의 말은 바로 정곡을 찔렀다.

혹시 몰라서 애매하게 귀국의 왕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레이라 공주는 바로 클라우디아의 존재를 찍어낸 것이다.

“예. 돌아가신 부군의 의지를 다하기 위해서 전쟁터에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브란스 공작에게 클라우디아가 한 부탁이 이것이었다.

남편의 의지를 직접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전쟁에 따라가겠다고 부탁을 한 것이다.

‘실상은 내가 주도권을 잡은 상황에서 수도에 머물고 있는 게 불편하다는 거겠지.’

지금 클라우디아가 가장 꺼려하는 상대는 레이라 공주다.

굳이 경쟁자였던 1왕자의 미망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레이라 공주와 클라우디아 사이에는 보다 직접적인 앙금이 존재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뿐이지 레이라 공주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친오빠의 죽음에 그녀가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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